얼마 전 작고한 박서보 선생은 단색화 열풍을 이끌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만, 반대로 이런저런 구설과 비난도 많았던 인물이다. ‘단색화 거장’이라는 타이틀의 이면, 박서보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박서보 화백.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 화백.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 선생에 대한 책을 내기로 결심하자, 내 주위의 미술계 지인들이 나한테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그 훈수는 대체로 경고적 뉘앙스였다. ‘박서보 화백이 얼마나 악명 높았는 줄 알아요?’, ‘박서보 사단의 얘기를 모르시는군요. 책 내면 이래저래 말들이 많을 겁니다’라고 하며 나의 순진한 열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박서보, 단색화에 담긴 삶과 예술>을 쓴 아트플랫폼아시아 대표 케이트 림은 책의 서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책을 쓰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주위의 걱정이 시작됐다니. 그의 말년만 본 일반인에게는 컬러풀한 옷을 즐겨 입는 선한 인상의 노인이었을지 모르나, 정작 미술계에서 박서보는 오래전부터 꽤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성격과 언행이 거칠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박서보라는 인물을 다루는 것부터가 걱정을 살 정도로 말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박서보는 한국의 단색화 열풍을 이끌며 197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을 주도했던 작가다. 그를 싫어할 수는 있어도 그의 업적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를 추앙하는 이들만큼 그를 비판하고 싫어하는 이도 많았다.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는 직선적 언행, 홍익대학교 미대 위주로 패거리를 만들어 미술계를 좌지우지한 정략적 인물이었다거나, 독재 정권이 주도했던 민족기록화(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정부 주도하에 당대 화가들이 한국의 발전상을 주제로 그린 대형 회화 작품)에 참여한 기록, 그가 강조했던 수신의 가치가 옅어진 말년의 작품 활동 등. 고상한 미술계에서 이렇게 극렬한 찬반을 불러일으킨 인물도 드물다.
박서보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과거를 훑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1931년생인 그는 한국전쟁과 산업화, 군부독재, 민주화 투쟁 등 한국사의 굵직한 순간을 온몸으로 겪었다. 전쟁 전후의 빈곤과 피폐함을 정면으로 받아들인 세대인 것이다. 박서보의 딸 박승숙이 쓴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전쟁통에 부친을 여의고 모든 게 엉망이던 시대를 살아내면서 아버지는 자신의 에너지를 통제하는 법을 차분히 배우지 못했다. 워낙 다혈질이라 좌충우돌했고, 많은 사람을 곤란하게 한 것은 물론 자신도 그 결과로 늘 당황하고 아파했다. 하지만 그 과정조차 없었으면 그 시대의 그는 자기 에너지에 스스로 치여 광기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럴 만한 삶이었고, 그럴 만한 시대였다.”
전쟁은 한 인간에게 거대한 실존적 아픔과 체념을 남긴다. 크고 작은 전쟁에 휘말린 수많은 이들이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고집불통의 면모를 보이곤 하는 이유다. 박서보 역시 좋은 것과 싫은 것을 애써 숨기지 않았던 인물이다. ‘호오’가 명확했기에 그만큼 친구도, 적도 많았다.
그런 측면에서 박서보를 비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홍대 미대 위주의 패거리 문화’에 대한 것이다. 박서보는 자신이 졸업한 홍대 출신을 편애하며, 그들을 통해 한국 미술판을 좌지우지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박서보는 30년 이상 홍대 미대 강단에 섰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내는 등 행정가로도 성공했던 인물이다.
1981년 안성 한서당 작업실의 박서보 화백. 한국경제 DB
1981년 안성 한서당 작업실의 박서보 화백. 한국경제 DB
1970년부터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으로 일했던 그는 1977년 이사장이 됐다. 미술협회 이사장은 큰 권력이었다. 그 기간에 그가 가장 힘쓴 것은 신인 작가 발굴이었다. 그 첫걸음이 1972년에 개최한 <앙데팡당>이라는 전시였다. 누군가의 선정을 받아야 했던 이전과 달리, 참가비만 내면 누구나 전시를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좋은 반응을 얻은 작가들을 국제 대회에 내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 선발 과정에서 측근만 챙긴다는 비판이 일었다. 197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는 홍대 미대 4학년 학생이 국가 대표 자격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후에도 국제전에 선발되는 작가들은 대체로 박서보의 측근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건들이 겹치자 ‘박서보 사단’만 미술계에서 인정받는다는 노골적인 불만이 등장했다. 박승숙은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 박서보는 학연이나 지연에 매여 사람들을 고르지 않았다. 나이에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하고나 뜻이 맞으면 친구가 되었고, 어느 학교 출신이든 가리지 않고 도왔다. 좋은 작가를 골라내는 안목도, 밀어주고 싶은 마음도 순수했다… 하지만 박서보와 그의 친구들이 국제전의 단골손님이라는 비아냥과 단색조로 치우친 획일성에 대한 비난은 반박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가 ‘내 편’을 챙겼다는 비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내 편이어서였는지, 자신이 능력 있다고 생각한 작가에 대한 적극적 지지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쨌든 당시의 결정으로 독선적 리더라는 비판과 동료들의 외면을 받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박서보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은 ‘시대 의식 결여’다. 박서보를 비롯한 단색화 작가들이 박정희 독재 정부 시절 시대에 침묵하고 모호한 추상화로 도피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민족기록화를 그린 전력도 있다. 얼마 전 광주 비엔날레에서 ‘박서보 예술상’이 신설되자마자 폐지된 이유이기도 하다. 반서구, 민중미술, 학생운동,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1970년대를 생각해보면 그 비판도 일리는 있다. 케이트 림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박서보는 ‘작가가 시대 상황을 너무 의식하면 의식 과잉이 되고 작품은 죽는다’고 말했다. 박서보는 시대 상황과 예술 작품을 1 대 1로 연결하는 단계를 뛰어넘었고, 묘법은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모든 예술가는 자신이 사는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반대로 시대를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것만이 예술은 아니다. 어떤 예술가는 시대를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한다. 예술가가 반드시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교조주의다. 그의 작품을 단순히 현실 도피라고 치부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자기 사람 챙기기와 시대 의식이 없다는 비판이 계속되자 그는 결국 1981년 미술협회 이사장 직을 그만두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가 한지를 사용한 단색화를 선보인 것도 이즈음이다. 물감을 바른 캔버스 위에 연필로 반복해 선을 긋고, 다시 그 위에 물감을 발라 선을 지우고. 그 과정을 수십 차례 반복하면 안개처럼 과거 행위의 잔상이 올라오면서 미묘한 느낌을 준다. 그것이 박서보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묘법(描法)의 기본 개념이다. 행위의 반복성과 무목적성,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생각과 욕심을 비우는 것. 그는 이것을 수신(修身) 혹은 치유 개념으로 설명한다. 동양적 사상을 온전히 담아낸 그의 작품을 탐내는 해외 유명 갤러리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또 한 번 비판에 직면한다. 어시스턴트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면서 ‘수신’을 말하는 것은 누가 봐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해외 유명 작가들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수신도 대리행위가 가능하다”고 떼쓰듯 말하는 아버지에게 딸 박승숙은 이렇게 말을 건넨다.
“아버지, 말을 아끼거나 돌릴수록 아귀가 안 맞아요. 수신 행위를 강조하는 것만큼은 이제 버려야 해요. 노구(老軀)로 더는 작업을 하기 힘들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렸다고 인정하세요. 아버지가 노년을 스스로 부정하고 우기니까 이상하게 뭘 숨기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진실 그대로 말하면 돼요. 그러면 사람들도 그냥 그 자체로 이해할 거예요.”
젊은 시절 박서보는 자식들에게 수시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싸워라, 이겨라, 누구도 믿지 마라, 인생은 경쟁이다, 세상에는 온통 나쁜 놈만 우글댄다,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 한국 사회의 가장 잔혹한 시절을 관통했던 젊은 박서보에게 인생은 일종의 투쟁이었을지 모른다. 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여야 하는.
12월 3일까지 부산 조현화랑에서 박서보의 마지막 개인전이 열린다. 박서보 화백이 평생을 쏟아온 묘법 연작 25점을 전시한다. 조현화랑 제공.
12월 3일까지 부산 조현화랑에서 박서보의 마지막 개인전이 열린다. 박서보 화백이 평생을 쏟아온 묘법 연작 25점을 전시한다. 조현화랑 제공.
나는 박서보 선생을 옹호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 짧은 칼럼에서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룰 수도 없다. 다만 그가 어느 한쪽 입장에서만 옹호 혹은 비판을 받기보다 좀 더 객관적으로 읽힐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박서보의 면모가 궁금한 이에게 케이트 림이 쓴 <박서보, 단색화에 담긴 삶과 예술>과 박서보의 딸 박승숙이 쓴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를 권한다. 불꽃같이 살다 간 박서보 선생의 명복을 빈다.


글 | 이기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