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는 피하고 연착륙에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점차 높아지고 물가에 대한 우려를 덜어낸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는 사상 최고치에 근접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는 금융 시장에 부정적일 것으로 우려했으나 생각보다 영향은 크지 않았다. 반면 팬데믹 종료 기대감으로 연초에 낙관론으로 시작한 중국에 대한 투자심리는 갈수록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한 모습이다.
지난해 10월 미 국채 10년물 금리가 16년래 최고치인 5% 수준까지 빠르게 상승했다. 하반기 금융 시장 주요 변동성 요인이었던 ‘고금리 장기화(higher for longer)’ 우려는 11월 이후 금리 인상 기조가 마무리될 것이라는 기대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주요 자산 가격이 높은 변동성을 보이는 구간에서 투자의사 결정과 목표하는 수익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포트폴리오 내 일정 현금 비중 확보라는 투자 원칙을 고수한 투자자들에게는 서두르지 않고 전략적으로 투자 기회를 포착함으로써 양호한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 한 해이기도 했다. 과거 대비 높아진 금리 수준과 불확실성이 일상이 된 시대에서 포트폴리오 내 현금 비중은 전통적인 현금 자산이 아닌 진화된 현금 자산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포트폴리오 내 현금성 자산, 변동성 장세서 안전망 역할
“현금은 쓰레기가 아니다. 나를 믿어라.”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이 이끄는 글로벌 투자 회사 버크셔 해서웨이의 지난 5월 주주총회에서 회사가 너무 많은 현금성 자산을 보유한 것이 아니냐는 한 주주의 지적에 버핏이 한 말이다.
CNBC,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버크셔는 3·4분기 실적발표에서 9월 말 현재 보유 현금 규모가 1572억 달러(약 204조 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전 사상 최고치(2021년 9월·1492억 달러)보다 5.4% 늘었는데 미국 금리가 급등하며 현금성 자산으로 분류되는 3개월 미만의 미국 초단기국채 비중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라면 누구나 BLASH(Buy Low And High Sell)를 꿈꾸지만 성공하기 쉽지 않다. 버핏은 투자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포트폴리오 내 현금 비중을 보유하고 있으며 과거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과감하게 현금을 사용해 주식 비중을 크게 늘렸고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현금성 자산은 위험을 관리하고 유동성을 제공하며 투자 포트폴리오 내 기회를 포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변동성 장세에서 포트폴리오의 안정성과 유연성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현금 비중은 폭우를 피하기 위한 우산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과거 초저금리가 지속되던 투자 환경에서는 현금성 자산이 투자 수익을 저해할 수 있다는 논리로 그 쓸모가 평가 절하되기도 했지만, 금리가 과거 대비 한 단계 레벨업 되고 다양한 시장 변수로 투자의 난이도가 높아지면서 그 쓰임새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첫째, 현금성 자산은 시장 변동성에 대한 안전망 역할을 수행하며 전반적으로 포트폴리오의 위험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금융 시장은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종종 이례적인 일들이 발생하곤 한다. 일정 비중 현금성 자산을 통해 예상치 못한 변수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둘째. 일정 수준의 현금 비중은 포트폴리오의 효율성을 제공한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아니고서야 완벽한 마켓 타이밍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현금성 자산이 지닌 유동성은 투자의사결정을 하거나 긴급하게 자금이 필요한 경우 빠르게 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 특히 매력적인 투자 기회가 발생할 때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셋째, 인간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중한 투자자라 할지라도 최악의 시점에 매도하거나 밸류에이션이 지나치게 높은 주식을 추격 매수해 손실을 보는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투자의 유연성을 제공하고 시장이 변동성을 나타낼 때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심리적인 여유를 갖는 것이 도움을 준다. 투자자, 단기자금(파킹형) ETF로 쏠려
고금리 상황이 지속되면서 하루만 넣어도 이자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단기자금(파킹형) ETF에 대한 투자자의 관심도 증가하고 있다.
올해 미국 시장 채권형 ETF의 자금 동향을 살펴보면 고금리 장기화 우려가 깊어지던 7월 이후 초단기채권형 ETF로 강한 자금 유입이 이뤄졌다. 국내 자금 흐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올초 대비 국내 상장 초단기채권형 ETF의 순자산은 연초 6조8000억 원에서 지난해 11월 말 기준 약 25조 원으로 큰 폭으로 증가했으며 순자산가치 총액 상위 5개 ETF 가운데 4개가 단기금리형 ETF다.
초단기채권형 펀드로 가파른 자금 유입의 주요 배경으로는 과거 대비 한 단계 높아진 금리 수준과 변동성 지속에 따른 투자 선로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지난해 12월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새롭게 발표된 경제 전망 요약을 통해 2024년 말 기준금리 수준을 4.5~4.7%로 세 차례의 기준금리 인하 전망을 제시했다.
금리 인하 전망에도 불구하고 2025년까지 미국 기준금리는 3% 중반 수준에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주요국의 긴축 마무리와 통화정책 전환에도 불구하고 예전보다 높은 금리 수준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를 이루면서 초단기채권형 ETF에 대한 선호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긴축 누적에 따른 경기 전반의 둔화 신호가 감지되고 있어 위기관리에 대한 대응력을 높이고자 하는 투자자들의 성향 변화도 초단기채권형 ETF로 눈길을 돌리게 하고 있다.
12월에 발표된 한국은행, 통계청, 금융감독원의 가계금융복지 조사 결과를 보면 수익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는 답변 비중은 2022년 21%에서 올해 19.3%로 1.7%포인트 줄었다. 반면 안전성은 66.9%에서 67.5%로, 현금화 가능성은 6.3%에서 7.4%로 늘었다. 고금리를 누리면서 단기자금 방망이를 짧게 잡는 투자에 대한 재테크 선호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국내외 초단기채권형 ETF는
초단기채권형 ETF의 두 번째 장점은 ETF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매매가 가능해 단기 현금 보유 전략에 적합하다는 점이다. 정책에 민감한 단기 금리 특성상 높은 금리 수준을 유지하려는 통화정책 기조가 지속될 경우 투자 환경이 유리하다는 면도 장점으로 꼽힌다.
미국 상장 ETF의 경우 투자 기간이 짧더라도 매월 분배금을 받을 수 있는데 현재 시장금리가 높아 초단기채 역시 꾸준히 분배금을 지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 채권 ETF는 월분배금을 지급하는데, 저금리 국면에서 분배금을 지급하지 않던 초단기채들도 지난해 금리 인상기를 기점으로 매월 분배금을 지급하고 있다. SPDR 블룸버그 1-3 먼스 T-빌 ETF(SPDR Bloomberg 1-3 Month T-Bill ETF·BIL)와 아이셰어 0-3 먼스 트레저리 본드 ETF(iShare 0-3 Month Treasury Bond ETF·SGOV)는 3개월 미만 국채에 주로 투자하는 대표적인 초단기채권형 ETF. BIL은 2007년 5월에 상장돼 자산 규모가 345억 달러로 가장 큰 T-빌ETF다.
2020년 5월에 상장된 SGOV는 자산 규모가 174억 달러이며 각각 0.07년 및 0.09년의 듀레이션과 4.81%, 4.93% 수준의 채권 만기수익률(YTM)을 제공한다. BIL과 SGOV가 올해 지급한 월분배금이 평균 주당 각각 0.37달러, 0.4달러 수준이다.
연간 배당수익률로 환산하면 3.7~4%에 달하는 수치다. 초단기국채에 투자하며 추가 수익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NEOS 인헨스드 인컴 캐시 얼터네이티브 ETF(NEOS Enhanced Income Cash Alternative ETF)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ETF는 1~3개월 초단기채권에 투자하면서 옵션 프리미엄으로 추가 수익을 추구한다.
미국 상장 단기채권 액티브 ETF로는 PIMCO 인헨스드 쇼트 머추러티 ETF(PIMCO Enhanced Short Maturity ETF·MINT)와 JP모건 울트라-쇼트 인컴 ETF(JPMorgan Ultra-Short Income ETF·JPST)가 있다.
국내 대표적인 파킹형 ETF는 양도성예금증서(CD) 91물을 추종하는 타이거(TIGER) CD금리투자KIS(합성)(357870) ETF다. 금융투자협회가 매일 고시하는 CD 수익률을 추종하는 국내 최초 금리형 ETF다. 매일 이자가 복리로 쌓이고 쉽게 현금화할 수 있다는 이점과 금리 인상 사이클이 맞물리며, 국내 투자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지난 11월 말 기준으로 순자산이 7조 원을 돌파하며 한국 주식 시장에 상장된 전체 ETF 중 1위에 올랐다. 무위험지표금리(KOFR) 지수 수익률을 추종하는 ETF 역시 올해 가장 많은 자금이 유입되며 급성장했다. TIGER KOFR금리액티브(합성)ETF(453060)와 KODEX금리액티브(합성) ETF(423160)에 6조 원이 넘는 자금이 몰렸다.
머니마켓펀드(MMF) 지수를 추종하는 ETF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3개월 이내 초단기채권 등에 투자해 상대적으로 금리형 ETF 대비 더 나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원화로 투자할 수 있는 미국재무위험지표 금리인 SOFR을 추종하는 ETF도 올해 다수 상장됐다. 환 노출 상품으로 미국 금리와 더불어 달러에 투자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다만 미 Fed의 긴축 완화로 달러가 약세 흐름을 보이게 되면 환율 하락에 따른 환차손이 ETF 성과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2024년 투자 환경 역시 녹록지 않을 전망이다. 거시경제 사이클과 통화정책 변화에 대응해야 하고 예전보다 높아진 금리 수준에도 적응하면서 민첩한 전술적 자산 배분의 필요성이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불확실성이 상수가 되며 투자의 난이도가 높아진 투자 환경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시장을 면밀히 살피고 순발력 있는, 유연한 투자 의사 결정이 중요하다. 투자 목적과 성향에 맞추어 초단기채권형의 업그레이드된 칼이 달린 방패로써 쓰임새를 전략적으로 활용해보길 바란다.
글 신영덕 KB증권 WM투자전략부 수석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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