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9일부터 12일까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가전 박람회 ‘CES 2024’는 인공지능(AI)으로 시작해 AI로 귀결됐다. 모빌리티, 에너지, 가전 등 AI가 적용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CES 2024, 메가트렌드가 된 AI
AI 동반자
‘AI가 일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제다. 지난 몇 년 동안 CES에서는 AI가 주요 화두로 등장해 왔다. AI의 비약적인 성능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AI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즉 소비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CES 2024’에서는 AI를 현실로 끌어냈다. 박람회장에선 세탁기, TV 등 익숙한 물건은 물론, 생경한 서비스와 기술 등이 모두 AI를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AI가 단순히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우리 생활에 깊숙이 스며들어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임을 공언한 것이다. 특히 CES 2024에 참가한 기업들은 AI를 활용한 제품과 서비스를 기반으로 사람과 사람의 소통, 업무 효율성 향상, 가정 내 기기들의 유기적인 연결, 외로움을 덜어줄 돌봄 기술 등을 보여주었다. 이는 CES가 강조한 ‘모두를 위한 인간안보(HS4A)’ 캠페인의 일환이다.
가정에서 AI와의 접점이 가장 빈번한 영역은 가전제품일 것이다. 즉, AI는 가전제품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고 할 수 있다. CES 2024에서는 AI가 엔터프라이즈 시장을 넘어 스마트폰, TV, PC, 세탁기, 냉장고 등 일상적인 기기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 실체가 삼성전자와 LG전자 부스에서 목격됐다.
삼성전자는 AI 기능이 적용된 스마트홈 생태계를 보여줬다. 특히 신형 ‘네오 QLED 8K’ TV를 공개했는데, 처리 속도가 기존보다 2배 더 빠른 3세대 AI를 탑재해 영상과 음향을 8K 해상도로 업스케일링한다. 다른 생활가전들은 AI로 연결성을 강화했다. AI 비전 인사이드가 적용된 냉장고는 냉장 중인 식재료를 구분하고 인식한다.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빼고 넣으면 자동으로 푸드 리스트가 업데이트되는 식. 다시 말해 양파가 몇 개 있는지, 계란이 몇 개 남았는지를 냉장고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냉장고는 인덕션과 연결되기도 한다. 냉장고에 든 식료품을 토대로 무슨 요리를 할 수 있는지, 인덕션에 탑재된 스크린으로 레시피를 받아볼 수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반려로봇이다. 삼성전자가 공개한 ‘볼리’는 반려동물처럼 집 안에서 사람을 쫓아다니며, 집 안 환경과 주변 기기를 인식하며 진화한다. 음성명령을 내리면 바로 수행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AI가 탑재됐는데, 사용자의 행동과 습관을 학습하며 성장한다는 것이 삼성 측 설명이다. 원거리와 근거리 투사가 가능한 프로젝터를 탑재해 천장이나 바닥 어디에든 최적의 화면을 보여준다. 재밌고 유용한 기능도 있지만 가장 큰 장점은 고령자나 몸이 불편한 사용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란 점이다.
반면, LG전자는 여러 센서를 기반으로 가족구성원을 면밀히 이해하는 스마트홈을 선보였다. 집 안에 설치된 비접촉 센서는 가족들의 심박 수와 호흡을 감지해 집 안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며, 사용자가 가전기기를 조작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최적의 상태로 설정한다.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반려로봇도 공개했는데, LG전자의 ‘스마트홈 AI 에이전트’는 가사 생활 도우미로서의 역할을 한다. 바퀴가 달린 두 다리는 자율주행 기술을 통해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음성·음향·이미지 인식 등이 가능한 ‘멀티모달 센싱’과 AI 프로세서를 토대로 사용자의 상황과 상태를 정교하게 인식하고 소통한다. 사용자는 외부에서도 스마트홈 AI 에이전트를 조작할 수 있어 거실 불을 켜고 끄는 것이나 에어컨 가동, 반려견 상태 모니터링 등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반려동물처럼 현관 앞에 마중 나와 사용자를 반갑게 맞이하기도 한다. 또 사용자의 목소리나 표정을 인식하고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재생하는 등 초개인화된 AI 기능을 보여준다.
LG전자의 AI 반려 로봇 ‘스마트홈 AI 에이전트(왼쪽)’와 삼성전자 ‘볼리(오른쪽)’
LG전자의 AI 반려 로봇 ‘스마트홈 AI 에이전트(왼쪽)’와 삼성전자 ‘볼리(오른쪽)’
이외에도 현대자동차그룹과 소니, 지멘스 등과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가전, 자동차, 에너지, 유통, 물류,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를 탑재한 제품을 선보이며, AI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님을 증명했다. 한마디로 AI가 우리 삶의 필수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위로보틱스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의 걷기를 돕는 웨어러블 로봇 ‘윔’을 선보였다
위로보틱스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의 걷기를 돕는 웨어러블 로봇 ‘윔’을 선보였다
디지털 헬스케어

AI의 성장은 우리 일상에 깊이 들어온다. 생활가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자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헬스케어 영역에서도 AI의 영향력이 커진다. CES 2024에서는 디지털 헬스케어가 새로운 기술의 전초지로 주목받았다. 전시회에서는 비용 절감, 건강 형평성 개선, 인명 구호 등을 목표로 하는 혁신적인 기술이 대거 소개됐다. 디지털 치료법, 정신건강 관리, 수면 기술, 여성 건강 기술, 원격 의료 서비스 등 앞으로 의료 산업의 미래를 이끌어 갈 트렌드였다.
디지털 헬스 부문 최고 혁신상을 수상한 것은 미국 헬스케어 기업 애보트가 공개한 이중 챔버형 무전극 유도 심박동기 시스템 ‘어베어’였다. 어베어는 심장 문제로 맥박 저하를 겪는 환자들을 위해 개발된 장치로, 고주파 펄스를 사용하며, 자연스러운 전도성과 심장에 지속적인 박동을 제공한다. 기존 심박동기의 10%에 불과한 크기이며, 배터리 소모량 또한 현저히 적어 심장 질환으로 고통을 겪는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들도 신선한 기술로 주목받았다. 국내 의료 AI 소프트웨어 기업 시너지에이아이는 AI를 기반으로 부정맥이 언제 발생할지 기간을 예측하는 ‘맥케이’라는 제품을 공개했다. 부정맥 위험을 예측해 의료진이 조기 진단하고, 치료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
한편, 근골격계 질환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 에버엑스는 업무 환경에서 생기기 쉬운 근골격계 질환을 예방하고, 개인 맞춤화된 운동을 제공하는 재활운동 치료 솔루션 ‘모라 케어’를 공개하고, 위로보틱스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의 걷기를 돕는 웨어러블 로봇 ‘윔’을 선보였다. 웨어러블 로봇은 주로 산업 현장에서 쓰이지만, 윔은 근력이 저하된 고령 사용자나 보행 운동이 필요한 환자를 위한 기기로 큰 관심을 모으며 ‘CES 2024 에이징 테크 혁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령화 사회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여러 사회에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디지털 헬스케어와 AI를 활용한 맞춤형 의료, 예방 중심, 홈케어 등의 키워드가 미래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 이는 곧 디지털 헬스케어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 이러한 혁신은 환자와 의료진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증 질환이나 고령자 외에 수면의 질이나 컨디션 관리가 필요한 운동선수 등 모든 사람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다.
현대차그룹의 미래항공모빌리티(AAM) 독립 법인인 슈퍼널이 공개한 차세대 기체 ‘SA-2’
현대차그룹의 미래항공모빌리티(AAM) 독립 법인인 슈퍼널이 공개한 차세대 기체 ‘SA-2’
모빌리티 혁신
‘전자제품 박람회가 모터쇼가 됐다’는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나온 지 몇 해가 지났다. 하지만 이제는 모빌리티와 전자제품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의미 없어 보인다. ‘자동차가 얼마나 빠르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자동차에서 무엇을 경험할 것인가’가 더 큰 관심사가 됐기 때문이다.
CES 2024에선 전기차(EV) 프로토타입의 메르세데스-벤츠 ‘G클래스’ 등 눈길을 사로잡는 자동차들이 전시됐지만, 예년에 비해 근사한 디자인의 최첨단 자동차는 크게 줄어들었다. 대신 전 영역의 모빌리티로 한층 다채롭게 채워졌다. 600개 이상의 모빌리티 업체가 자율주행차량과 전기차, 마이크로 모빌리티, 플라잉 카 등을 선보였는데, 이전에 주로 소개하던 모빌리티의 형태보다는 모빌리티에서 경험할 서비스와 기술 그리고 모빌리티 생태계를 조명했다.
디자인보다 기능과 경험을 전시한 이유는 CES 2024의 화두가 AI와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일 것. 자동차 산업은 물리적인 형태와 기능에서 디지털 혁신으로 이동하고 있다. 추세에 맞춰 글로벌 자동차 완성차 업체들은 디지털 혁신과 다양한 신기술을 보여주었다.
현대차그룹은 목적기반모빌리티(PBV)와 미래항공모빌리티(AAM) 기술을 통해 미래 모빌리티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또한 수소에너지 생태계 구축과 소프트웨어 기반의 대전환을 강조했다. 특히 기아는 전통적인 자동차 개념을 넘어서는 PBV 라인업 출시와 다이내믹 하이브리드 등의 신기술을 적용한 PBV 미래 전략을 보여주었다. 현대모비스는 차세대 전기차 구동 기술인 e코너 시스템을 탑재한 실증차 ‘모비온’을 통해 전동화 기술력을 선보였고, 슈퍼널에서는 2028년 상용화를 예고한 차세대 기체 ‘S-A2’의 실물 모형도 공개했다.
생성형 AI 챗GPT를 음성비서로 탑재한 폭스바겐의 신형 골프 GTI
생성형 AI 챗GPT를 음성비서로 탑재한 폭스바겐의 신형 골프 GTI
글로벌 기업의 부스에도 인파가 몰렸다. 특히 폭스바겐은 IDA 음성 어시스턴트에 챗GPT(ChatGPT)를 통합한 차량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운전 중에도 챗GPT로 검색한 콘텐츠를 확인할 수 있는데, 기존 음성 제어 기능을 뛰어넘어 인포테인먼트, 내비게이션, 에어컨 공조기를 제어한다. 일반적인 지식이나 정보 등 챗GPT의 기존 기능도 모두 제공된다. 운전 중 별다른 조작 없이도 차와 매끄럽고 깊은 대화를 이어 갈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챗GPT 기능은 올해 2분기부터 생산되는 폭스바겐 차량에 적용된다. 폭스바겐은 챗GPT를 표준 기능으로 제공하는 최초의 대량 자동차 생산 기업이 될 예정이다.
한편, 메르세데스-벤츠는 그들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인 MBUX에 생성형 AI와 엔비디아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적용한 ‘MBUX 가상 어시스턴트’를 선보였다. 기존 MBUX와의 대화는 사용자가 질문을 하면 적절한 답을 제시하는 수준이었지만, 생성형 AI 기반의 MBUX 가상 어시스턴트는 사용자를 이해하며 자연스럽게 상호작용을 한다. 아침에 차량에 탑승하면 사용자가 평소에 듣는 음악이나 뉴스를 재생하고, 약속 시간에 늦으면 상대에게 양해 전화를 하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자동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CES 2024에선 친환경적인 아웃도어 모빌리티 솔루션이 펼쳐졌다. 가까운 거리를 더 편리하고 지속 가능하게 이동해주는 탈것들이다. 에너지를 적게 소비하는 접이식 스쿠터와 챗GPT를 탑재해 대화가 가능한 전기자전거, 새로운 형태의 신발 같은 이동 수단이 처음 공개됐다.
모빌리티 산업은 디지털 혁신의 길을 걷고 있다. 자율주행, 전기차, AI, 소프트웨어는 모빌리티의 미래를 형성하는 주요 축이며, 이러한 혁신이 우리의 생활과 환경, 이동 수단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으로 보인다.
SK그룹은 ‘기후위기가 사라진 넷제로 세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주제로 테마파크 콘셉트의 전시관을 꾸몄다
SK그룹은 ‘기후위기가 사라진 넷제로 세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주제로 테마파크 콘셉트의 전시관을 꾸몄다
그린테크
최첨단 기술이 공개되면 그에 따른 문제들도 고민이 필요하다. 전기차는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 기여하지만 동시에 배터리 폐기물을 만든다. CES 2024에 전시된 새로운 기술들에선 지속 가능한 미래에 대한 고민도 엿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모빌리티 분야에서는 전기화와 디지털화를 시도하면서 재생 가능한 순환성도 고려했다. 내연기관 차량의 전동화를 간소화하며, 동시에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을 개발하고, 배터리 재활용과 같은 기술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은 탄소배출량과 폐기물을 줄이는 데 중요하며, 우리의 미래를 위해 지속 가능한 솔루션이다.
CES 2024의 지속 가능한 기술들을 살펴보면 스타트업의 성과가 눈부시다. 바이오, 모빌리티, 기후 테크 분야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스타트업이 주목받았다. 플라스틱을 대체할 신소재를 개발한 스타트업 에이엔폴리와 재생에너지원이 될 수소를 저장할 수소 저장 시스템 개발 업체 하이드로럭스, AI 비전 미세먼지 모니터링 스타트업 딥비전스, 저조도 빛으로 3배 더 많은 전력을 제공하는 소형 태양광 셀을 만든 앰비언트 포토닉스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 스타트업의 첨단 기술도 눈길을 끌었다. 특히 태양광 전문 기업 나눔에너지는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기술 특허를 보유한 옵티마이저 ‘옵티몬’을 선보였다. 옵티몬은 신재생에너지 발전시설의 성능 향상, 정밀 진단, 고장 원인 분석, 원격 관리 기능을 제공하는 솔루션으로 머신러닝 기반으로 운영된다.
기술로 기후위기를 극복한다. 이 청사진을 제시한 것은 SK그룹이었다. SK그룹은 탄소 감축 기술로 기후위기가 사라진 ‘넷제로(netzero)’로 세상을 테마파크 어트랙션으로 구성했다. 관람객들은 수소전지로 움직이는 기차를 타고 넷제로 세상을 이동하고, UAM에 탑승해 넷제로 세상을 비행하기도 했다. 또 AI로 운세를 점치고, 로봇 암의 자동차 쇼를 공개하는 등 탄소 감축 기술을 위트 있는 방식으로 선보이며 큰 화제를 모았다.
테슬라는 삼성전자와 함께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는 기술을 선보였다. 삼성 스마트싱스와 테슬라의 전기차, 태양광 패널, 가정용 배터리 파워월을 연동해 에너지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안 등 탄소 배출을 저감하고 지속 가능한 생활 방식을 장려했다.
CES 2024에서 기술 혁신이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린테크 기술은 삶의 질을 높이고, 환경 친화적인 생활을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무엇보다 기후변화와 환경 문제에 대응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협력, 스타트업들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라스베이거스=글 조진혁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