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TALK
패트릭 브링리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새로운 나와 만나는 용기
[한경 머니 기고=서메리 작가] 처음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를 봤던 순간이 생생하다. 그때 나는 갓 상경한 새내기 대학생으로, 비슷하게 지방에서 올라온 동기들과 ‘서울 투어’를 한답시고 유명한 장소들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동대문과 홍대를 비롯해서 랜드마크로 통하는 동네를 이곳저곳 방문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바로 테헤란로였다. 엄청나게 높은 빌딩들이 끝없이 늘어선, 거대한 왕복 10차선 도로는 스무 살의 내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도감을 주었다. ‘이게 바로 서울이구나’라는 생각을, 입학한 지 몇 달이 지난 그날 처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 나는 3번의 이직을 거친 끝에 테헤란로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됐다. 그것도 코엑스에 바로 연결된 도심공항타워 사무실에서. 당연한 얘기지만, 일개 직장인의 회사 생활은 겉으로 보이는 테헤란로처럼 멋지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왕복으로 3시간 가까이 걸리는 출퇴근은 너무 고됐고, 대중없이 쏟아지는 일을 처리하느라 매일 정신이 없었다. 명함에 찍힌 직함은 ‘연구원’이었지만, 워낙 규모가 작은 회사라 닥치는 일은 뭐든 해야 했다. 계약서가 들어오면 번역도 하고, 손님이 오시면 커피도 타고, 회사 홈페이지가 필요하면 ‘지식IN’을 찾아가며 직접 만들어야 했다(참고로 나는 영문학을 전공한 순도 100% 문과인이다).

일을 하다가 숨이 턱 막힐 때면 가끔 건물 비상계단을 찾았다. 내가 일한 사무실은 고층부에 있어서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덕분에 화재에 대비해 육중하게 만들어진 철문을 밀고 나가면 진공처럼 조용한 공간이 나타났다. 넓진 않았지만 벽 한쪽에 창문이 있어서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그 ‘서울’ 한복판에서, 나를 버티게 해준 건 그 파랗고 네모난 하늘 한 조각이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의 저자, 패트릭 브링리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받은 위안도 그런 종류였을까. 물론 그가 겪은 상실은 나의 괴로움보다 컸고, 그를 받아준 미술관 역시 도심공항타워 비상계단과 비교할 수 없이 웅장한 공간이었지만 말이다.

브링리는 세계적인 시사 매거진 뉴요커에서 일하던 직장인이었다. 스티븐 킹을 비롯한 대작가들, 퓰리처상을 수상한 전도유망한 기자들과 함께 일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 나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연년생 형이 갑작스러운 암 선고를 받으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진단을 받은 형은 고통 속에서 투병 생활을 하다가 약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오로지 형의 회복을 빌며 병원에 살다시피 하던 저자와 가족들은 상실감을 치유할 여유도 없이 생계를 위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부모님과 누이는 고향인 시카고로 돌아가고, 저자는 직장이 있는 뉴욕행 기차에 홀로 몸을 실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너무 이른 나이에 닥쳐온 형의 죽음은 저자의 시간까지 멈춰 버렸다. 형을 보내고 남겨진 스물다섯 살의 그때, 저자는 운 좋게 얻은 맨해튼 한복판의 직장으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었다. “세상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꾸역꾸역 긁고, 밀치고, 매달려야 하는 종류의 일은 할 수가 없었다”고 책을 통해 그는 고백한다. 어디로든 나아갈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고.

하지만 사람은 살아야 하고, 살려면 뭐가 됐든 일을 해야 하는 법이다. 저자가 마지막 남은 의지를 끌어모아 선택한 일은 크고 아름다운 미술관의 경비원이었다.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 가만히 서서, 먼 과거로부터 온 작품들을 말없이 지키는 일.

저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10년간 경비원으로 일했다. 그렇게 생활하며 매일 2000명 가까이 되는 직원들과 마주치고, 200만 개가 넘는 작품들을 돌아가며 살피고, 매년 700만 명씩 몰려드는 관람객들을 관찰했다. 그는 경비원들이 수많은 전시실 중에서 ‘옛 거장의 회화’ 근무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나무로 된 바닥이 다른 전시실의 대리석 바닥보다 다리를 덜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라커룸에서 먼 현대 미술관은 인기가 없다는 것도, 오버타임 근무는 수당이 높아서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전시실 한구석에 못 박힌 듯 서서, 아픈 발과 무릎을 견디면서, 그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경비 업무를 기계처럼 수행했다. 그 와중에 때로는 그림과 조각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전 세계에서 온 관객들의 표정과 반응에 마음이 움직였다. 5년쯤 근무했을 때는 취향에 맞는 전시와 그렇지 않은 전시를 스스로 깨달았고, 가끔 질문을 던져 오는 관람객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다. 그러는 사이 아내와 두 아이라는 새 가족이 생겼다. 육아 휴직과 복직이라는 낯선 경험도 하게 됐다. 그렇게 경비원으로 보낸 시간이 10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 그는 마침내 안락한 방공호와도 같았던 미술관을 떠나 복잡한 세상 속에서 새로운 일을 할 용기를 낸다.

테헤란로에서 다녔던 네 번째 회사를 끝으로, 나는 직장 생활을 영영 그만두었다. 지금은 직장 경력보다 프리랜서 경력이 훨씬 길어졌지만, ‘먹고사니즘’을 위한 내 투쟁은 여전히 바쁘게 진행 중이다. 마감을 쳐내다가 머리가 아플 때면 종종 집 근처의 숲길 공원을 찾는다.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는 이른 아침이다. 점심 이후에는 놀러온 사람들로 붐비지만, 아침에는 비교적 한산해서 여유로운 분위기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부인이 아니라 공원의 관리 담당자다. 매일같이 산책로의 휴지를 줍고, 나무의 잔가지를 쳐내고, 호수의 이끼를 걷어내는 사람들. 그들이 일하는 모습은 어떤 면에서 공원 자체보다도 큰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늘 생각해 왔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읽은 뒤 다시 찾은 그곳에서, 나는 항상 느끼던 감정이 조금 구체적으로 다듬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묵묵하게, 변함없이, 자신의 삶과 세상의 풍경을 동시에 가꾸는 일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글·그림 서메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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