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 자산가를 타깃으로 한 프라이빗뱅킹(PB)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벤처 창업, 가상자산 투자 등으로 큰 돈을 번 슈퍼 리치가 늘어난 데다 인구 고령화 등으로 맞춤형 자산관리 수요도 급증했다. 금융사들은 PB를 미래 수익원이자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점찍고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

[커버스토리]
 서울 반포동 래미안 원베일리 상가에 위치한 NH투자증권 PB센터. 이 상가에만 고액자산가 대상 PB 특화 센터 6곳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서울 반포동 래미안 원베일리 상가에 위치한 NH투자증권 PB센터. 이 상가에만 고액자산가 대상 PB 특화 센터 6곳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고액자산가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성과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갈수록 은행에서 프라이빗뱅킹(PB)과 자산관리(WM)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인구 고령화와 금리 인하, 금융당국의 가계대출 억제 등 수익 창출 우려가 깊어지면서 은행들은 자사 프리미엄 브랜드를 앞세운 PB 서비스 확장에 공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실제로 최근 시중은행들은 주요 부촌에 새 지점을 내고, PB 인력을 영입하는 등 고액자산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분주하다. 금융권에 따르면 국민, 신한, 하나, 우리 등 4대 시중은행이 운영하는 고액자산가 전용 PB센터는 지난 4월 말 기준 총 87개로 집계됐다. 2018년 말(75개)과 비교해 5년여 동안 16%(12개) 늘어난 셈이다. PB센터는 일반적으로 금융 자산 3억 원 이상 보유한 부유층을 대상으로 각종 자산 운용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특별히 설치한 점포다. 최근엔 30억 원 이상의 금융 자산을 보유한 초고액자산가를 대상으로 한 ‘프리미엄’ 등급 PB센터가 늘어나는 추세다.
‘PB 경쟁력이 미래 좌우’…고액자산가 잡기 경쟁
이와 달리 대중을 상대로 영업하는 오프라인 지점은 매년 감소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4대 시중은행의 영업점포(지점+출장소) 수는 2018년 말 3563개에서 지난해 말 2826개로 20.1%(737개) 줄었다. 인터넷뱅킹이 활발해지면서 오프라인 지점을 이용하는 소비자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늘어난 부자, WM 서비스 니즈도 각양각색

업계 관계자들은 이런 흐름에 대해 급변하는 시장의 불확실성과 투자 외에도 가업승계, 증여·상속 등 다양한 WM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고액자산가들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2023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금융 자산이 10억 원 이상인 부자는 45만6000명으로, 이는 4년 만에 41.2%나 급증한 수치다.

박현정 법무법인 가온 패밀리오피스센터 센터장은 “최근 10년 새 PB 서비스를 제공받는 고객들의 자산이 증가했다”며 “이들이 보유한 금융 자산뿐 아니라 부동산과 주식의 가치도 커지면서 자산관리 유형도 복잡해졌다”고 말했다.

박 센터장은 “부동산만 해도 매각, 보유, 신축 등을 통해 자산을 이전할지, 개발할지 등등 고민이 생기기 마련”이라며 “이런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상담해주고, 대안을 제시해줄 전문가들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금융기관들이 적극적인 브랜드 마케팅을 통해 시장 선점에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은정 하나은행 WM본부장도 “코로나19 팬데믹, 부동산 시장의 급락과 급등, 레고랜드 사태로 촉발된 채권 시장의 자금경색 등 각종 사건들이 터지면서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졌다”며 “고액자산가들은 이러한 외생 변수에 대비, PB 서비스를 통해 투자 포트폴리오, 세무, 부동산 등에 포괄적이고 안정적인 컨설팅을 받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 본부장은 “최근 몇 년 새 고액자산가 손님의 유형도 급변했다. 벤처 창업에 성공했거나, 유튜브 콘텐츠 크리에이터, 코인·주식 투자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척한 ‘영리치’ 손님들이 늘어났다”며 “이들은 대개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원하고, 워라밸과 미술품 투자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이런 다양한 니즈들에 대응하기 위해 최근 젊은 프라이빗뱅커(PB)들도 많이 영입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뜨거운 PB 전쟁, 홍보·인재 영입도 후끈
‘KB 골드앤와이즈더퍼스트’ 광고 모델인 배우 이영애. 사진 KB국민은행 제공.
‘KB 골드앤와이즈더퍼스트’ 광고 모델인 배우 이영애. 사진 KB국민은행 제공.
하나금융그룹의 광고모델로 발탁된 가수 임영웅. 사진 한국경제.
하나금융그룹의 광고모델로 발탁된 가수 임영웅. 사진 한국경제.
PB 시장의 승기를 꽂기 위한 은행들의 경쟁은 홍보에서도 치열하다. 이영애, 임영웅 등 톱클래스 연예인을 모델로 기용하며 자사 WM 브랜드 알리기에 나섰다. KB국민은행은 프리미엄 자산관리 브랜드 ‘골드앤와이즈 더 퍼스트(GOLD&WISE the FIRST)’의 홍보모델로 배우 이영애를 앞세웠다. 이영애의 탄탄한 커리어와 인지도, 아름다움과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골드앤와이즈 더 퍼스트’와 닮았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하나은행도 가수 임영웅과 계약 후 첫 광고로 WM 영상을 선보이는 등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하나은행은 따스하고 선한 이미지의 임영웅을 내세워 믿을 수 있는 WM 서비스에 중점을 뒀다.

우리은행은 배우 김희애가 WM 브랜드 ‘투체어스(Two Chairs)’의 모델로 활동 중이다. 우리은행은 김희애의 이미지와 투체어스가 제공하는 고품격 서비스가 일맥상통하는 점에 주목했다. 최근 신한금융도 그룹 WM 광고모델로 배우 김수현을 발탁해 대대적으로 마케팅에 돌입할 계획이다.

무엇보다 PB 서비스의 핵심은 PB 인재들의 역량에서 드러난다. 현재 금융사들이 앞다퉈 자산관리 부문에 필요한 인재 확보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다. 특히 씨티은행 출신 PB를 영입하기 위한 경쟁이 뜨겁다. 금융사들이 씨티 출신 PB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PB 영업 분야에서 한국씨티은행이 쌓아 온 명성 때문이다.

씨티은행은 1989년 국내 최초로 PB를 도입하고 씨티골드 프로그램을 통해 세분화된 자산관리를 선보였다. 이후 2022년 씨티은행이 국내에서 소매금융 서비스를 종료한 데 따라 금융사들은 씨티은행 출신 PB 인력을 대거 영입할 수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시중은행들이 그간 쌓아 온 브랜드 신뢰도와 촘촘한 네트워크를 통해 고액자산가 고객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과거 씨티은행에서 25년간 PB로 일한 신은재 신한금융투자 광화문WM센터 이사는 PB 경쟁력에 대해 “시장에 대한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풀어서 고객과 소통하고, 꾸준히 제안할 수 있는 성실함이라고 생각한다”며 “시장도 시시각각 변하고, 고객들의 생각도 매일 변해 오늘은 아니지만, 내일은 상품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판단은 고객에게 맡기고, 고객의 포트폴리오에 추가하면 좋을 상품이라는 판단이 들면 부지런히 접촉해 알려주는 꾸준함이 성공하는 PB의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이은정 하나은행 WM본부장도 “시장에 대한 전문성만큼이나 손님에 대한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며 “자산관리 시장의 본질도 결국 사람과 사람이다. 손님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관심사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PB가 가져야 할 중요한 역량”이라고 설명했다.

유수정 IBK기업은행신수동 팀장(VM)은 “머지않아 ‘인공지능(AI)’이 금융 시장 대부분을 대체할 것으로 전망하지만, PB 서비스는 인간의 영역으로 오래 남을 것”이라며 “기계가 자산 전략을 짤 수는 있지만, 인간의 감정까지 공감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서울 여의도 파크원 빌딩에서 한 자산가 부부가 NH투자증권 소속 PB와 상담을 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서울 여의도 파크원 빌딩에서 한 자산가 부부가 NH투자증권 소속 PB와 상담을 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증권사·생보사도 PB에 진심

비단 PB 시장 경쟁이 은행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증권사와 생보사 역시 PB 서비스 확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 증권사들도 비대면 고객이 늘어나면서 기존 점포를 폐쇄 또는 통합하면서 축소하는 반면, 초고액자산가를 위한 점포들은 확대하고 있다.

2010년 업계 최초로 초고액자산가 전담 브랜드인 ‘SNI(Success & Investment)’를 도입한 삼성증권은 올해 1월 패밀리오피스 사업의 본격적인 확대를 위해 패밀리오피스 전담 지점인 ‘SNI 패밀리오피스센터’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개설했다. 삼성증권 측에 따르면 2020년 7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패밀리오피스’ 서비스에 가입한 가문이 올해 7월 현재 100여 곳으로, 전체 예탁 자산 규모는 30조 원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신한투자증권은 신설 조직인 ‘자산관리총괄’을 통해 증권·은행의 개인자산관리(PWM)와 증권 자산관리 비즈니스 역량을 하나로 모았다. 신한투자증권은 해당 부서를 통해 증권 고객뿐만 아니라 은행 고객에게도 차별화된 통합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KB증권은 KB국민은행과 함께 2022년 압구정에 프리미엄 자산관리센터인 ‘KB 골드앤와이즈 더 퍼스트’를 열었고 올해 4월에는 반포 원베일리에 2호점을 오픈했다. 연말에는 도곡에 3호점을 오픈할 예정이다. NH투자증권은 5월 기존 반포WM센터와 방배WM센터 2곳을 반포금융센터로 통합하고 반포브랜치는 반포 래미안 원베일리 상가에 오픈하는 등 대면 거래를 선호하는 고액자산가의 수요에 맞춰 반포에만 2곳의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금융 업계가 전통적인 사업 수수료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업권별 비즈니스 영역이 점차 개방되면서 증권사들 역시 PB 서비스 시장에 적극 뛰어들었다”며 “삼성증권의 경우 은행·보험 대비 다양한 금융 자산을 바탕으로 자산관리가 가능해 주식부터 채권, 펀드, 그리고 더 나아가 다양한 사모형 상품들까지 종합해 고객의 기대수익과 리스크를 고려한 최적의 포트폴리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형 생명보험사들도 일찍이 WM 사업에 진출해 고액자산가 모시기에 나섰다. 이들은 전속 설계사를 앞세워 타 금융사보다 고객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한편 상속·증여 관련 WM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이 분야 리딩 컴퍼니인 삼성생명은 2002년부터 WM지원팀을 통해 부유층 고객 대상 자산관리 컨설팅 조직인 파이낸셜플래닝(FP)센터와 초부유층 고객 대상 가문 관리 조직인 삼성 패밀리오피스를 총괄한다. 패밀리오피스와 전국 총 8개의 FP센터에서 근무하는 96명의 전문가들이 단편적인 자산관리를 넘어 다음 세대까지 장기적인 플랜을 제공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생보사만의 PB 서비스 특징은 자산관리와 상속·증여 설계 부분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며 “라이프 사이클에 따라 고객을 넘어 다음 세대로 이전함에 있어서, 자산을 운영하고 상속과 증여 설계를 통해 효과적으로 이전하기 위한 종합자산관리에 강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한화생명은 총 7개의 ‘파이낸셜어드바이저(FA) 센터’에서 전담 설계사가 상속·증여, 절세 전략 등을 상담해주고 보험 상품을 활용한 고객 맞춤형 플랜을 제시하고 있으며, 미래에셋생명은 2022년부터 운영해 온 디지털자산관리센터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고객의 평안한 노후를 위한 ‘디지털 WM 라운지 서비스 및 변액보험 VIP 고객을 위한 전용 상담 센터’를 올해 5월 출범하는 등 보험 업계 내 PB 서비스 경쟁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PB 경쟁력이 미래 좌우’…고액자산가 잡기 경쟁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