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출신 니콜라스 파티는 몇 년 전부터 미술계에서 엄청난 속도로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스타다. 파스텔화의 명맥을 잇고 있는 그가 호암미술관에서 단독 전시를 연다.

[아트]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잊혀지고 사라지기 위해 작품을 만드는 아티스트는 없다. 아티스트는 대부분 자신의 작품이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영속하기를 갈망한다. 그들이 만드는 조각, 회화, 설치미술은 영원을 향한 열망의 증거에 가깝다. 지금 소개할 니콜라스 파티(Nicolas Party)는 그런 점에서 조금 다르다. 전통적 아티스트와 비교할 때 그의 작업은 좀 더 가볍고 동시대적이다. 파스텔 위주로 작업하기 때문이다.
파스텔화는 18세기 유럽에서 한동안 유행했지만, 어느 순간 마이너해진 장르다. 가장 큰 약점은 보존의 어려움이었다. 파스텔은 쉽게 흩날리고 훼손되는 안료다. 당시만 해도 효과적인 고정제가 없어 작품이 쉽게 훼손되다 보니 컬렉터와 미술관들이 파스텔화 구매나 전시를 꺼렸고, 작가들 역시 조금씩 사라져갔다. 강렬하고 극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낭만주의의 등장, 산업혁명으로 인한 유화물감의 대량생산도 영향을 미쳤다. 미술 교육기관조차 유화 중심의 커리큘럼을 강화하면서 파스텔화는 조금씩 시대 흐름에서 멀어져갔다. 물론 샐리 스트랜드(Sally Strand)나 리처드 매킨리(Richard McKinley) 같은 훌륭한 작가들이 있지만, 여전히 소수 느낌이 강했다.
이렇게 파스텔화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느낌을 주던 와중, 40대 초반의 젊은 작가가 파스텔이라는 재료를 들고 나온 것이다. 잊힌 파스텔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의 작품은 선명한 색채와 단순한 형태, 독특한 이미지의 조합으로 이뤄진다.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풍경, 정물, 초상 등 모든 전통 장르가 그의 화폭 위에서 새롭게 구성된다.
(앞) 국보 ‘금동 용두보당’, 10~11세기, 청동·도금 ©리움미술관  (뒤) ‘산’, 2024, 벽에 소프트 파스텔 ©니콜라스 파티, 사진 김상태
(앞) 국보 ‘금동 용두보당’, 10~11세기, 청동·도금 ©리움미술관 (뒤) ‘산’, 2024, 벽에 소프트 파스텔 ©니콜라스 파티, 사진 김상태
파스텔, 덧없고 연약한

파스텔은 본질적으로 덧없고 연약한 재료다. 미세한 안료 입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흩어지고, 작품 역시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파스텔화가 많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젊은 작가는 왜 파스텔이라는 재료를 택했을까. “우선 파스텔 작업은 매우 직접적이고 즉각적이에요. 손과 손가락으로 직접 작업할 수 있어 빠르고 감각적이죠. 파스텔을 사용하면 작품과 더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물론 파스텔은 영속적인 재료가 아니죠. 하지만 쉽게 ‘공기 속 먼지’가 되어버릴 수 있는 작품에는 시적인 면이 있습니다.”
근사한 답변 아닌가. 파티의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가 순간의 감정을 언어로 포착하는 것처럼, 파스텔화도 찰나의 빛과 색을 붙잡아둔다. 사라질 운명에 저항하는 대신 그 운명을 받아들여 더 강렬한 현재의 순간을 창조한다. 니콜라스 파티의 파스텔 작품 역시 영원불멸이라는 환상을 거부하고, 순간의 아름다움과 변화의 불가피함을 껴안는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예술 또한 순간의 빛나는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앞) ‘부엉이가 있는 초상’, 2021, 리넨에 소프트 파스텔 ©니콜라스 파티, 사진 Adam Reich (뒤) ‘구름’, 2024, 벽에 소프트 파스텔 ©니콜라스 파티, 사진 김상태
(앞) ‘부엉이가 있는 초상’, 2021, 리넨에 소프트 파스텔 ©니콜라스 파티, 사진 Adam Reich (뒤) ‘구름’, 2024, 벽에 소프트 파스텔 ©니콜라스 파티, 사진 김상태
샘플링, 혹은 창의적 재해석

샘플링이라는 음악 용어가 있다. 기존에 녹음된 음악, 사운드 또는 음성의 일부를 추출해 새로운 음악에 사용하는 기법이다. 힙합이나 K-팝 장르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파티는 이 샘플링이라는 기법을 아트에서 활용하는 작가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미술사를 자유롭게 참조하고 재해석하는 것이다. 덕분에 그의 작품은 범위가 아주 넓다.
경기도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2025년 1월 19일까지 열리는 <니콜라스 파티: 더스트>전에서 파티는 기존 회화 및 조각 48점, 신작 회화 20점, 그리고 전시장 벽면에 직접 그린 대형 파스텔 벽화 5점을 선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는 데서 벗어나 한국의 전통 미술과 현대미술 간 교류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파티는 조선 시대 <십장생도 10곡병>과 김홍도의 <군선도> 등을 참조해 상상 속 팔선(八仙)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등 흥미로운 작업을 이어나간다. 이유가 있을까.
<스미스소니언>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파티는 샘플링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뮤지션처럼 일해온 것 같아요. 다른 그림의 요소를 샘플링해 제 그림에 넣었죠. 저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열려 있어요. 제가 사랑했던 화가들과 다른 관계를 맺고 싶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전시장을 가득 채운 대형 파스텔 벽화다. 소규모 작품에 주로 사용되는 파스텔을 거대한 벽화에 적용한 것도 놀라운데, 이 벽화들은 전시 기간이 끝나면 사라진다. 말하자면 파스텔 벽화는 퍼포먼스다. 이 순간이 지나면 벽화들은 관람객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게 되는 것이다.

직접 경험해야 할 전시

이번 전시는 작품 이미지만 봐서는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미로처럼 연출된 전시장은 방마다 전혀 다른 색과 구성으로 만들어 독특한 시각적 경험을 전달한다. 특히 전시장을 에워싼 벽화는 작가의 다른 작업, 혹은 미술관이 소장 중이던 한국 고미술 작품과 병치되면서 굉장히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파스텔의 부드러운 색채, 그와 대비되는 강렬한 이미지, 그리고 깊이 있는 사유가 어우러진 니콜라스 파티의 전시는 아마 올해 최고 전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비록 그의 작품이 ‘사라짐’을 전제로 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기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