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의 대표작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속 나체 여성은 매춘부가 아니었다.

[전유신의 벨 에포크]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2~1863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2~1863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에두아르 마네(1832~1883년)는 1863년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당시 파리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공모전이었던 살롱전에 출품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양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두 남성 사이에 누드의 여성을 배치해 작품이 외설적으로 보이는 데다 완성도 역시 떨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체라는 소재, 빛과 그림자의 생략 등이 인상주의 회화에 익숙해진 당시 비평가들의 눈에는 매우 낯설게 비치는 것이 당연했다.

같은 해에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도 비평가와 대중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그림 속 여성이 매춘부인 데다 여성의 몸을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가 논란의 중심에 선 이유의 핵심은 그림 속 나체 여성과 관련이 있다. 그림 속 여성이 당시 얼굴이 잘 알려진 매춘부인 데다,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하도록 그리는 바람에 남성 관객을 불쾌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려진 바와 달리 그림 속 여성은 실제로는 매춘부가 아니라 빅토린 뫼랑(1844~1927년)이라는 전문 모델이었다. 오늘은 마네 그림 속의 그 여자, 뫼랑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뫼랑은 16세 되던 해인 1860년에 토마스 쿠튀르라는 화가의 스튜디오에서 모델 일을 시작했고, 여성들을 모아 지도하던 그의 아틀리에에서 그림 수업도 받았다. 2년 뒤부터는 마네 작품의 모델로도 활동했다. 뫼랑은 모델 이전에 바이올린과 기타 레슨을 하고 카페에서 연주도 하던 음악가였고, 캉캉 댄서로 해외 순회공연을 다니던 전문 무용가이기도 했다. 마네가 처음 그린 그녀의 모습 역시 <거리의 가수>라는 작품에 나오는 것처럼 음악가로서의 뫼랑이다.

그러나 다음 해에 뫼랑은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에서 나체의 여성으로 등장하며 예상치 못한 유명세를 타게 된다. 마네는 인상주의 작가들의 리더로 불렸지만 정작 인상주의 미술전에는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거장들의 고전적인 작품을 좋아한 작가이기도 했다. 20대에 유럽을 여행하면서 거장들의 작품을 학습했던 그였지만 이들의 작품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도발적인 주제를 부각하며 논란의 대상이 됐다.
<거리의 가수>, 1862년, 보스턴 미술관 소장
<거리의 가수>, 1862년, 보스턴 미술관 소장
마네는 르네상스 거장들의 회화를 바탕으로 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통해 당대에 센 강변에서 유희를 즐기던 젊은 남녀들의 방탕한 모습을 포착하고자 했다. 르네상스의 거장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나 신고전주의의 대가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를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는 <올랭피아> 역시 마네 자신이 살던 당대 파리의 밤 문화 현장을 보여준다. 이로써 마네는 당대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상을 그린 모던한 작가로 평가받게 됐지만, 그림 속의 뫼랑은 방탕한 여성이자 매춘부로 영원히 그림 속에 박제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은 대부분 하위 계층이었고, 이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매춘을 강요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가수나 무용가 등 오늘날에는 전문직으로 여겨지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라 해도, 당대에는 그저 생계를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하위 계층의 만만한 여성으로 인식됐다. 카페의 가수이자 무용가로 얼굴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던 뫼랑 역시 남성 관객들에게는 그런 존재로 인식됐다. 마네의 작품을 통해 당돌한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한 뫼랑은 남성 관객들에게는 불쾌한 대상일 뿐이었다. 마네 작품의 불편함은 고전적인 회화의 문법을 비튼 그의 작품 스타일이 지닌 생경함과 아는 여자 뫼랑의 조합에서 기인한 것이다.
빅토린 뫼랑, <자화상>, 1876년, 보스턴 미술관 소장
빅토린 뫼랑, <자화상>, 1876년, 보스턴 미술관 소장
뫼랑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난다면 ‘벨 에포크’ 당시 여성의 잔혹사를 꺼낸 것에 불과하겠지만,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는 뫼랑이 화가가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뫼랑은 화가의 모델로 일하면서도 계속해서 그림 수업을 받았고, 1879년에는 ‘아카데미 보자르’에도 입학했다. 여성이 정식 미술 대학인 아카데미 보자르에 입학하는 일은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다. 자신을 방탕한 여자이자 매춘부로 그렸던 마네와 같은 전시실에 작품이 걸리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권위 있는 살롱전에도 네 차례나 참여했다. 1903년에는 프랑스 예술가협회의 가입 자격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활동 이력에도 불구하고 뫼랑은 여전히 마네 그림의 모델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지만, 벨 에포크 시기에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으로 당당한 삶을 살았던 그의 이야기는 꽤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의 대상이 됐다. 2000년대 이후부터 최근까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이 여러 차례 출간되기도 했다. 지난 2021년에는 뫼랑의 자화상이 미국의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면서 그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도 시작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 여성 미술가들은 소수였지만 각자의 아름다운 시절, 다시 말해 벨 에포크를 만들어 갔다. 이런 벨 에포크 시기 여성 작가들의 활동이 더 많이 조명되기를 기대한다. 나아가 뫼랑 역시 마네의 모델이 아닌 자신만의 독자적인 삶을 영위한 여성이자 독립적인 화가로서의 활동이 더욱더 많이 알려질 수 있기를 바란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