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향한 도전은 계속된다. 한국 금융사에 ‘파괴적 혁신가’의 족적을 남긴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의 혁신 여정을 따라가 봤다.
[스페셜] 대한민국 금융그룹 대해부 – 미래에셋그룹
‘영원한 혁신가’를 자처하는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한국 자본시장의 역사를 새로 쓴 인물로 평가받는다.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로 ‘펀드의 대중화 시대’를 연 그는 인덱스 펀드, 랩어카운트, 사모펀드(PEF), 해외 진출 등 숱한 최초 기록을 쓰며 미래에셋의 경이로운 성장을 이끌었다.
박 회장의 리더십 아래 미래에셋은 가장 짧은 기간 가장 크게 성장한 금융그룹으로 자리 잡았다. 1997년 미래에셋벤처캐피탈 창업 이후 미래에셋은 자산운용, 증권, 보험, 투자 등 30개 금융 계열사를 보유한 대기업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대기업 순위에서 미래에셋은 22위에 올라 있다. 자기자본 20.9조 원, 고객 자산 838.4조 원, 연금 자산 65.9조 원, 글로벌 상장지수펀드(ETF) 순자산 175조 원(2024년 6월 기준)의 글로벌 투자 전문 그룹으로 도약하고 있다.
‘전략적 판단’과 ‘기회 포착 능력’ 탁월
박 회장은 2024년 ‘올해의 국제 최고경영자’에 이름을 올리며 글로벌 무대에서 주목받았다. 지난 2024년 7월 2~6일 국제경영학회가 개최한 ‘2024 AIB 서울’에서 박 회장은 아시아 금융인 최초로 ‘올해의 국제 최고경영자상’을 수여했다. 이 상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경영인이 수상하는 상 중 최고 권위의 상으로 통한다.
박 회장은 AIB 기조연설을 통해 “모범적인 창업자들이 이끄는 글로벌 사업을 바라보며 왜 금융은 안 될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며 “전략적으로 옳다고 판단되면, 유기적 성장 또는 전략적 인수 모두를 고려한 과감한 투자 결정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미래에셋의 차별화된 정체성은 글로벌에 있다. 박 회장은 일찍이 국내 시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글로벌 비즈니스를 미래 승부처로 삼았다. 특히 최근 국내 증권사들이 시장 성장 둔화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결단이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는 강력한 오너십이 바탕이 됐을 때 추진할 수 있는 '백년지계'이기도 하다.
박 회장의 리더십 스타일은 한 마디로 ‘전략적 리더’로 요약된다. 단순히 실적을 추구하는 경영자에서 나아가 큰 그림을 그리고 글로벌 비전과 혁신을 강조하며, 조직과 구성원의 성장을 도모하는 모습이다. 박 회장은 AIB 기조연설에서 성공적인 기업가의 핵심 요건으로 ‘전략적인 사고 능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적응력’을 꼽으면서 “기회가 왔을 때 올바른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이 미래에셋 발전의 초석이 됐다”고 강조했다. 탁월한 전략적 판단과 기회 포착 능력으로 박 회장은 오늘날의 미래에셋을 만든 몇 가지 명장면을 탄생시켰다.
1. 도전을 통한 성장…‘위기를 곧 기회로’
그도 한때는 샐리러맨이었다. 박 회장은 “금융업 기업가로서의 목표 달성을 위한 10년 계획을 세우고, 국내 증권사 직원으로의 경험부터 쌓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박 회장은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에 입사해 32세의 나이에 국내 최연소 지점장이 됐고, 이어 본부장과 임원 타이틀도 거머쥐게 된다. 그리고 입사 후 10여 년이 지나자 8명의 동원증권 직원과 함께 오랫동안 구상해 온 창업을 위해 새로운 문을 열었다. 당시 외환위기 파고로 시장의 불안감이 커지던 때다. 평범한 직장인이 개인 회사를 설립한다는 것이 엄청난 도전이었지만, 박 회장은 ‘위기는 곧 기회’라는 역발상적 시각을 견지하며 자본금 100억 원을 모아 자산 운용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과거 ‘박현주 펀드’ 투자 유치를 위해 설명회장을 종횡무진 누비던 모습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펀드를 선보인 것은 고객에게 믿음을 주려는 의도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98년 12월 삼성증권 창구를 통해 ‘박현주 1호’ 판매에 돌입한 지 2시간 30분 만에 500억 원 한도가 모두 팔려나갔다. 은행 예금 위주의 저축 문화를 적립식 펀드 위주의 투자 문화로 바꾸는 데도 기여했다는 평가다.
2. 전략은 곧 차별화…1위 향한 ‘야성’적 면모도
박 회장의 전략가 면모는 증권사 출범 스토리에도 잘 드러난다. 당시 ‘신인 박현주’가 급부상할 수 있던 데는 삼성증권에서 뮤추얼펀드를 국내에 소개하며 대대적인 판매로 판을 깔아준 게 발판이 됐다. 뮤추얼펀드 1호부터 미래에셋드림 3호까지 운용사와 판매사로서 비공식적 의형제 관계가 이어졌다. 삼성에선 박 회장의 증권사 설립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 회장은 온라인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E증권사(E*미래에셋증권)라는 방향을 잡았다. 삼성과의 밀월관계를 끝내고 새 도전에 나서는 명분을 챙기고, 후발주자로서 기존 증권사와 차별화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박 회장은 기존 증권사들과 달리 온라인 거래를 통해 수수료를 대폭 낮추며 고객 접근성을 강화했다. 또 리서치센터 같은 고유 업무를 제외한 영업직원은 모두 자산관리 영업 경험자로만 뽑았다. 점포 입지에서도 은행과 같은 사통팔달 지역에 지점을 개설하며 차별화를 기했다.
자산운용사와 증권사의 성장을 바탕으로 박 회장은 2005년 SK생명(현 미래에셋생명) 인수로 종합 금융그룹으로의 도약을 꾀했다. 당시 인수를 검토했던 메트라이프가 인수를 포기하면서 박 회장은 생명보험사 인수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도 차별화 포인트로 상품에서는 투자형 보험인 변액보험을, 조직에서는 사업가형 점포를 주목했다.
그의 승부사 기질이 잘 드러난 순간은 대우증권 인수전이다. 대우증권 인수는 말 그대로 ‘신의 한 수’로 기록된다. 박 회장의 의중은 2015년 12월 본게임이 시작되기 전까지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인터넷전문은행 사업에 관심이 있다고 알려지던 때다. 박 회장은 본입찰 마감일, 인수 최고가로 알려진 2조2000억 원을 뛰어 넘는 2조4000억 원을 베팅했다. 그리고 당시 자기자본 순위 4위였던 미래에셋은 2위 증권사이자 ‘인재들의 집합소’였던 대우증권을 품에 안았다. 초대형 증권사 탄생의 순간이었다.
3. ‘목표는 아시아 1등’…박현주의 꿈
19개국에 걸친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은 박 회장의 오랜 꿈의 결실이다. 저성장·고령화로 인한 국내 시장 성장 한계를 간파한 그는, 2000년대 들어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전략을 본격화했다. 박 회장은 2023년 12월 11일 한국경제인협회 주관 ‘갓생한끼 2탄’에서 멘토 리더로 나서며 “창업 당시 ‘생큐’ 정도밖에 못했지만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98%를 차지하는 한국 밖 시장을 포기하지 않았다”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겠다는 명확한 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목표는 ‘아시아 1등’이었다. 아시아 1등을 달성하면 세계 1등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박 회장은 2003년 자산운용사 홍콩 진출을 시작으로 2018년에는 국내 증권사 최초로 인도 자본시장에 진출하고, 현지 기업 인수를 통해 글로벌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유기적 성장과 인수합병(M&A), 선 운용사 후 증권사 진출을 바탕으로 꾸준히 수익 다각화를 추진하는 전략이었다. 특히 글로벌 ETF 시장을 선점한 점과 인도 시장에서 타 금융사들이 철수하는 상황에서도 사업을 이어온 점이 높은 평가를 얻는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이 국내 운용사 중 최초로 해외 진출에 나섰을 때만 해도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등 유수의 기업들과의 경쟁은 무리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미래에셋은 글로벌 시장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놓치지 않았고, 글로벌 금융영토 확장을 실현하고 있다. 2011년 ‘호라이즌스(Horizons ETFs)’, 2018년 ‘글로벌엑스(글로벌X)’, 2022년 호주 ‘ETF 시큐리티스(ETF Securities)’를 인수하는 등 글로벌 ETF 비즈니스 확장을 위해 적극적인 M&A를 추진했다. 미래에셋의 ETF 플랫폼은 자산 규모가 173조 원 이상으로 전 세계에서 ETF 자산 기준, 12위 규모까지 성장했다. 박 회장은 “M&A는 거의 10년을 자본 축적의 시간으로 활용한 후 16건의 성공적인 인수를 통해 사업 영역을 크게 확장했다”고 설명했다.
미래에셋그룹은 실제 계열사 전반에 걸쳐 글로벌화를 강조하고 있다. 증권과 자산운용은 해외 호텔, 리조트, 오피스, 인프라 등 다양한 부문에 직·간접투자를 진행했으며, 지속적으로 글로벌 금융 상품을 발굴해 제공하고 있다. 증권, 자산운용, 벤처투자가 연계해 투자 목적 펀드를 조성하는 등 계열사들의 시너지 효과를 추구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윤유동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다만 해외 익스포저가 높은 만큼 타사 대비 글로벌 경기 영향을 많이 받으며, 하나의 투자 자산에 다수의 계열사가 투자했을 경우 이익 혹은 손실 변동 폭이 크다는 양면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글로벌 비즈니스에 발행하는 리스크와 시행착오를 감내하며 지속적으로 해외 투자를 결행할 수 있는 원동력은 박 회장의 결단과 뚝심이 바탕에 있다. 박 회장은 “실패하더라도 한국 자본시장에 경험은 남는다. 내가 실패하더라도 경험이 후대에 남는다”며 크고 작은 실패를 발판으로 삼았다.

‘연금’은 박 회장이 일찌감치 점찍어둔 분야다. ‘투자하는 연금 시대’ 슬로건을 만들고 연금 분야를 핵심 사업 중 하나로 추진해 온 곳도 미래에셋이다. 연금을 통해 고령화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박 회장은 저서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를 통해 “사회가 고령화되면 연금의 위기가 온다”며 “시장 차원에서 이 문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자산 운용을 발전시켜 한국 사회가 고령화에 대비하도록 하는 것으로, 선진국의 경우 연금 비즈니스가 자산운용업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연금 사업에 나선 배경을 설명했다.
박 회장은 ‘연금 해결사’를 자처하고 나선다. 박 회장은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선진국처럼 펀드에 적금식으로 돈을 불입한 후 노년에 그 돈으로 생활하는 투자 형태가 자리 잡을 것이다”라며 “이런 식의 연금 펀드는 창업 초부터 꼭 하고 싶던 비즈니스 중 하나였다. 미래에셋은 자산운용업을 통해 한국 사회에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미래에셋은 적립식 형태의 연금 비즈니스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 미래에셋이 생명보험업에 진출한 이유 중 하나도 보험 상품이 장기 적립식 형태를 띠고 있어 연금 사업과의 시너지가 기대됐기 때문이다. 또한 2005년 말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기 전인 2003년 자체적으로 선진국형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했다. 2005년에는 본격적으로 퇴직연금본부를 구성해 국내 증권사 중 퇴직연금 시장에 가장 먼저 진입했다. 이와 함께 적립식 펀드를 노후 준비라는 사회적 현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단순 상품 광고를 넘어 투자자 ‘교육’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미래에셋은 2024년 11월 조직 개편을 통해 연금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했다. 인력과 조직을 대폭 강화하며 연금에 힘을 싣는 모습이다. 박 회장과 미래에셋이 연금 사업 강화에 나선 이유는 연금 시장의 빠른 성장에 있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지난해 말 기준 430조 원 규모에 이르렀으며, 특히 확정기여(DC)형과 개인형퇴직연금(IRP)의 시장은 연평균 25.9%씩 급성장하고 있다.
박 회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미국은 401K가 발전하는데 한국의 퇴직연금은 안전자산에만 투자한다”며 “한국 퇴직연금이 과감하게 투자 자산으로 흘러 들어가서 근로자가 노후 자산을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을 떠나 글로벌하게 자산을 배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한국 가계 자산의 약 80%가 부동산에 집중돼 있어, 인구가 줄고 내수가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부동산 중심의 자산 구조는 지속되기 어렵다”며 “투자형 연금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5. “경영 승계 안 한다”…전문경영인 체제 순항
박 회장은 미래에셋의 새로운 도전을 이끌고 있다. “2세 승계를 하지 않겠다”고 공개 피력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선언한 것이다. 미래에셋그룹은 2023년 말 창업 멤버의 퇴진과 세대교체를 발표하며, “향후 10년 이상을 준비하는 전문 경영체제가 시작됐다”고 밝혔다. 1997년 창업 후 26년 만의 세대교체이자, ‘전문경영인 1.0 시대’의 막이 올랐다.
그리고 ‘미래에셋 전문경영인 1.0 시대’ 출범 1년이 지나며 실적과 성장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평가를 얻는다. 지난해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사상 최대 실적을 예고하고 있으며, 미래에셋증권도 리스크 방어에 성공했다. 미래에셋생명은 변액보험 판매량 증가 등으로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박 회장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겠다는 뜻을 이전부터 수차례 밝힌 바 있다. 그는 2007년에 쓴 자서전을 통해서도 “미래에셋은 처음부터 그랬듯 앞으로도 계속해서 투자 전문가가 경영하는 회사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직원들에게 샐러리맨의 꿈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의 의자는 누구나 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글로벌전략가(GSO)로서 글로벌 전략과 투자에만 관여하고, 나머지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기로 했다. 자녀들에게는 주식 지분을 물려줘 이사회에서 전문경영인과 함께 중요한 경영 의사결정에만 참여하게 될 예정이다. 박 회장은 자신의 미래에셋컨설팅 주식 25% 기부를 약속했다. 현행 공익법인의 주식 보유와 관련한 규제 등이 완화되는 시점에 향후 미래에셋컨설팅 주식을 미래에셋희망재단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미래에셋컨설팅 지분이 미래에셋희망재단에 넘어가면, 재단이 그룹의 가장 꼭대기에 오르게 된다.
이와 같은 재단형 지배구조는 스웨덴의 발렌베리와 덴마크의 노보노디스크가 성공적으로 도입한 모델로, 국내에서 창업주가 회사 핵심 지분을 공익재단에 기부하는 조치는 매우 이례적이다. 박 회장은 “한국도 창업자가 2세, 3세로 경영권을 넘기는 게 아니라 재단에 기부하고 전문경영인을 통해 같이 기업을 성장시키는 모델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배구조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큰 방향성에 긍정적인 의견을 밝히고 있다. 다만, 준개인 회사인 미래에셋컨설팅과의 내부 거래가 잘 정리돼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박 회장은 또한 미래에셋을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지 않고, “독립 계열사 체제로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지론을 밝혔다. “급변하는 투자 환경에 대응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계열사 체계가 적합하다”는 것이다.
박 회장의 이와 같은 미래 구상은 ‘제2의 창업’에 준하는 결단으로 평가된다. 박 회장은 그동안 카리스마 있는 리더로서 그룹을 이끌고 성장시켜 왔다. 창업 이후 M&A와 유기적 성장(organic growth)이라는 두 축으로 성장을 지속하며 회사가 커졌고, 지금의 미래에셋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이 시스템을 박 회장이 만들었다. 이제는 이 시스템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며, 미래에셋의 ‘미래’를 맡기는 도전을 하는 중이다.
박 회장은 자서전의 끝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젊은이는 꿈을 꾸어야 한다. 하지만 꿈을 꾸는 것만으로는 꿈을 이룰 수 없다. 열정이 있어야 한다. 지키고 싶은 꿈과 열정이 있다면 젊은이의 도전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젊은 인재들이 새로운 도전을 하는데 작은 도움을 준 인생의 선배로 기억되고 싶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자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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