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무부의 새로운 변신이 주목받고 있다. 미국의 2인자이며 외교 수장인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변화를 이끈 주인공이다. 미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힐러리를 ‘비즈니스 외교의 전도사’, ‘미국 최고위 비즈니스 로비스트’라고 평가했다.

작년 12월 3일 힐러리는 국무장관으로서 79번째이자 마지막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그는 브뤼셀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외무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짬을 내 체코를 11시간 동안 방문했다. 페트르 네차스 체코 총리를 만나 체코 원전 프로젝트에 입찰한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을 ‘잘 봐 달라’며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100억 달러 규모의 입찰에는 웨스팅하우스와 러시아 국영기업 컨소시엄인 MIR 간의 2파전이었다. 힐러리는 체코 외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는 “에너지를 러시아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며 압박했다. 힐러리의 체코 방문에는 대니 로데릭 웨스팅하우스 최고경영자(CEO)가 동행했음은 물론이다.
U.S. Secretary of State Hillary Rodham Clinton walks to reception at the Indiana Teahouse at Cottesloe Beach, near Perth, Australia, Wednesday, Nov. 14, 2012. (AP Photo/Matt Rourke, Pool)
U.S. Secretary of State Hillary Rodham Clinton walks to reception at the Indiana Teahouse at Cottesloe Beach, near Perth, Australia, Wednesday, Nov. 14, 2012. (AP Photo/Matt Rourke, Pool)
‘비즈니스 로비스트’ 평가 받아

힐러리가 발 벗고 지원한 대형 비즈니스 딜은 10여 건에 이른다. 2009년 러시아가 항공기 구매를 놓고 에어버스와 보잉을 저울질할 때 힐러리는 모스크바로 날아가 로비스트로 활동했다. 보잉 737 항공기 50대(37억 달러) 구매 계약이 체결됐다. 2011년 일본이 록히드마틴 전투기(72억 달러)를 구매할 때도 힐러리의 막후 역할이 컸다.

힐러리는 역대 국무장관 중 최장 해외 순방 기록을 세웠다. 재임 4년간 112개국을 방문하면서 401일을 해외에서 보냈다. 지구를 서른여덟 바퀴 도는 거리인 95만6733마일(153만8532m)을 움직였다. 아랍 혁명, 이란 핵개발, 리비아 미 영사관 피격 사태 등 국제 안보 현안도 있었지만 해외 순방의 상당 부분은 비즈니스 행보였다. 한국 외교부 장관에서는 이런 행보를 보기 어렵다.

워싱턴 정가에선 힐러리가 ‘비즈니스 외교’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이 나온다. 힐러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모든 나라의 기업들이 공정한 경쟁을 한다면 정부가 나서서는 안 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미국 기업과 근로자들이 불이익을 당하도록 놔둘 수 없다”고 말했다. 비즈니스 외교에 나선 이유다.

미국에서 해외 입찰하는 기업들은 모두 국무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다만 조건이 있다. 계약이 미국 근로자에게 보탬이 돼야 한다. 또 미 기업 2개 이상이 경쟁하면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다. 국무부 ‘승인’이 떨어지면 주재국 대사가 로비를 총괄한다. 수십억 달러 이상의 ‘빅딜’은 힐러리가 직접 챙긴다. 그래서 미 상무부에서는 “국무부가 왜 비즈니스에 관여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국무부 관계자는 “기업인들로부터 불만을 들은 적이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힐러리는 6만9000명의 국무부 직원들에게 ‘CEO 대사’로 활동하라고 주문하면서 “대사관의 최우선 과제는 미국 기업들의 계약 수주를 지원하는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작년 7월 미국이 미얀마의 제재를 해제한 직후 로버트 호매츠 국무부 차관은 구글·마스터카드·다우케미칼 등의 임원과 함께 미얀마를 방문했다. 기업들이 현지 관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힐러리는 국무부의 경제 업무도 대폭 강화했다. 국무부 내 수석 이코노미스트 직제를 신설했다. 경제 분야 외교관을 우선 승진하는 파격 인사도 단행했다. ‘딜 메이커’로서의 힐러리의 업적은 퍼스트레이디, 상원의원, 민주당 경선 대선 후보 등을 거치면서 쌓아 온 개인적인 인맥이 크게 작용했다. 미 기업인들은 힐러리가 물러난 뒤에도 ‘힐러리 스타일’의 국무부가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워싱턴(미국)=장진모 한국경제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