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부패 키우고 개선 의지 저해, ‘경제개발’로 목표 바뀌어

‘무상 지원이 발전 막아’…원조도 ‘스마트’로
국제사회의 원조는 지난 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 박애주의 차원에서 시작됐다. 사정이 나은 선진국들이 전쟁 피해국과 신생 독립국을 도왔다. 선진국들은 공여국이 돼 수원국이 발전할 수 있도록 무상으로 자금을 증여하기도 하고 초저리 장기차관을 빌려주기도 했다. 이런 재원을 공적개발원조(ODA)라고 부른다. 선진국들은 이제는 원조를 하더라도 자국 경제에 실질적인 도움이 돌아올 수 있도록 투자하겠다고 방향을 전환했다. 시혜적인 무상 원조가 오히려 수원국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한다는 ‘원조 무용론’을 선진국들이 이미 경험한 터다. 시혜적인 무상 원조 시대가 끝나고 투자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스마트 원조’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 원조로 방향 트는 선진국

2000년 이전까지는 국제적으로 ODA 규모를 어떻게 늘릴 것인지에 논의가 집중됐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 위기를 겪으며 선진국조차 지원이 여의치 않은 형편이 되면서 ODA는 좀체 늘어나지 않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국제 개발 어젠다는 ‘새천년 개발 목표’였다. 빈곤 퇴치·의료·교육 등이 주요 목표였던 사회개발은 각국 정부가 내는 ODA 재원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지원은 절대 빈곤을 줄인 외에는 큰 성과가 없었다는 평가다.
이런 평가를 바탕으로 올해 2015년 이후 과제를 준비하는 국제회의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열렸다. 국제사회는 지난 7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제3차 개발 재원 총회에서 아디스아바바 행동계획을 채택했다. 이어 지난 9월 열린 유엔개발정상회의에선 2016~2030년 적용될 ‘지속 가능 개발 목표’를 채택했다.
사회개발이 아니라 경제개발을 새로운 목표로 정하고 정부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와 민간 기업까지 끌어들여 민간 재원을 확보해 실질적인 개발과 발전이 이뤄지게 한다는 게 지속 가능 개발 목표의 골자다. 자연히 소요 재원도 는다. 유엔은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매년 3조5000억~5조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각국은 늘어나는 개발 협력 사업의 수요에 맞춰 어떻게 재원을 조달할 수 있을지 의견을 짜냈다. 민간 재원을 효과적으로 유인하는 혼합 금융(공적 개발 금융+민간 금융) 등 혁신적 개발 금융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세계은행은 국제통화기금(IMF) 및 다국적개발은행(MDB)들과 함께 2016~2018년 3년간 4000억 달러 규모의 재원을 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 돈을 직접 원조 자금이 아니라 민간 재원을 더 끌어들이는 마중물로 쓰겠다는 것이다. 아디스아바바 회의에선 ‘빌리언(수십억)을 넘어 트릴리언(수조)으로’라는 슬로건이 제시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선진 공여국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개도국 민간 부문을 개발하기 위한 민간 기업 대출, 지분 투자, 보증 등 민간 금융 수단(PSI)을 ODA로 인정해 주기로 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내년 2월 확정할 예정이다.
최근 ‘서울 공적개발원조 국제회의’에 참석한 마크 로코크 영국 국제개발부 차관은 “최근 수년간 세계 ODA 규모가 연 1조3000억 달러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 국가를 포함한 상당수 나라가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ODA 지원을 전혀 늘리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선진국들도 개도국 지원을 예전처럼 사회개발과 빈곤 퇴치가 아니라 경제개발로 바꿔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개발과 지속적인 사업이 있어야 민간이 들어올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실제적인 발전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인프라 사업이다. 유엔에 따르면 글로벌 인프라 개발 수요는 2013년 기준으로 4조2000억 달러에 달하고 2025년엔 9조 달러가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원조도 사업성 갖추도록 법 개정 필요

전문가들은 중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을 주도한 것은 신흥 개발국들이 개발 협력 사업의 판도 변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 AIIB의 지분율은 중국(29.8%)·인도(8.4%)·러시아(6.5%)가 1~3위이고 여기에 브라질(3.18%, 9위)까지 적극 참여하고 있는 등 브릭스(BRICs) 국가들이 주도하고 있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과 중국·인도 등 신흥국들이 새로운 국제 개발 협력을 통해 지구촌 곳곳에 영향력을 높이면서 자국 비즈니스 기회를 잡으려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이 현 상황이다.
무상 원조에서 스마트 원조로 바뀌는 것은 단지 자금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무상 원조 자체가 오히려 수원국의 발전을 지체시키기도 한다는 지적과 반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외국의 원조만으로 경제 사정이 개선된 나라는 없다. 수원국의 적극적인 노력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 원조는 부패 구조만 확산시킬 가능성이 높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 프린스턴대 교수는 바로 이 같은 무상 원조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디턴 교수는 빈곤국이 빈곤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성장이라고 보고 있다.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정책이 빈곤과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디턴 교수는 시혜적인 원조는 오히려 각국 정부들이 자국민의 삶의 질을 스스로 개선하겠다는 노력을 떨어뜨린다고 지적한다. 특히 병원이나 학교 건설에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 직접적인 자금 지원은 해당 정부의 부패를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시혜성 원조의 이런 한계를 공여국들이 경험하면서 무상 원조에 대한 환상은 사라졌다.
올해 한국의 ODA 예산은 2조3782억 원이나 된다.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여전히 순진한 지원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ODA를 마중물로 대형 원조 사업을 벌여야 하는데 국회가 이를 막고 있다. 개발도상국 대형 개발 프로젝트에 한국 기업의 참여를 늘리기 위한 대외경제협력기금(EDCF)법 개정안이 1년 반이 넘도록 처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EDCF는 1987년 한국이 개도국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유상 원조 기금이다. 재원을 국가재정에만 의존해야 하는 데다 지원 방식도 초장기 저금리 차관 위주여서 건당 500억 원 이하의 ODA에만 집중돼 있다. 그러다 보니 중진국 등이 추진하는 수천억 원짜리 대형 프로젝트는 중국 등 외국 기업들에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개정안은 기금 운용 기관인 수출입은행이 국제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대형 원조 사업을 할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한국 기업들의 참여를 늘리자는 게 골자다. 하지만 야당은 해외 사업이 많은 대기업이 결국 혜택을 볼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한국은 2015년 기준 국민총소득(GNI)의 0.25%를 ODA로 쓰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었지만 아직 0.15%를 밑돌고 있는 상태다.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바뀐 한국이 스마트 원조에선 한 발 앞서 갈 수 있어야 한다.

권영설 한국경제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Vitamin’ 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