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기업도 떠는 조직 심리의 함정
연말연시가 되면 많은 기업들이 주요 보직 인사와 함께 조직 체계 검토에 착수한다. 크게는 사업 단위 조직에서, 작게는 팀 단위까지 한 해 동안 운영할 조직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 있는 병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위치와 자원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 짜인 조직 체계도 기업의 지속 성장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최고의 선수와 코칭 스태프로 구성된 축구팀도 한 수 아래로 평가 받는 상대 팀에 패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패배의 원인이 각 개인의 역량과 조직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직 내부에 퍼져 있는 병든 조직의 심리 때문일 수 있다.

조직의 심리는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심리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구성원들 사이의 역학 관계, 외부 자극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때로는 한 개인의 생각이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형성, 표출될 수도 있고 때로는 조직의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기업 현장에서 ‘부서 간 협업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조직에 냉소적인 분위기가 팽배하다’, ‘혁신의 시도가 번번이 실패한다’ 등의 이야기들을 종종 들을 수 있는데, 이런 현상 역시 구성원 개개인의 특성과 심리 때문이 아니라 조직 내부를 두텁게 둘러싸고 있는 어떤 심리 작용 때문일 수 있다.

기업이 조직의 심리를 의도하는 대로 잘 관리하면 약이 될 수 있지만 방치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관리한다면 독이 될 수도 있다. 일부 기업들이 의욕적으로 시도했던 변화 관리, 지식 경영, 인수·합병(M&A) 등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도 조직의 심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변화 관리 분야의 저명한 학자인 콜린 프라이스도 “많은 기업들이 성과 향상을 위한 변화 관리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지만 구성원들의 사고방식이나 마인드에 의해 형성된 조직의 심리를 관리하지 못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기업들이 조직의 심리 관리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국내 기업들이 한 해의 조직 체계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주목해야 할 조직의 심리에 대해 살펴보자.
최강 기업도 떠는 조직 심리의 함정
만장일치, 기뻐할 일이 아니다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몰아내고 친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미국은 1961년 4월 1400명의 반(反)카스트로 쿠바 추방자들로 구성된 무장 군인들을 쿠바 남부의 해안 피그만으로 침투시켰다. 하지만 여러 위험 요인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실행된 이 작전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12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거나 체포됐고 미국은 포로들의 몸값으로 5000만 달러 상당의 식량과 의약품을 지불해야만 했다. 일명 ‘피그만 침공 사건’으로 알려진 이 일화는 미국 역사상 가장 쓰라린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이 결정에 참여한 자문위원들은 미국 안에서도 핵심 브레인이랄 수 있는 저명한 학자와 합리적 의사 결정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문위원들은 여러 가지 대안에 대해 충분한 검토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만장일치의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이의 제기를 최대한 억제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손을 들고 반대 의견을 내놓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수직적 조직 체계, 권위주의적 조직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면 엄격한 위계질서에 바탕을 둔 상명하복과 만장일치에 대한 암묵적 압력 때문에 상사의 의견과 배치되는 의견을 말한다는 것은 금기 사항에 가깝고 결연한 각오가 있지 않으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빠르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고 실행력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자칫 모든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집단 사고에 빠질 수도 있다. 조직 문화를 경직시켜 구성원들의 자율과 창의를 억제할 우려도 있다. 만장일치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놓친 것은 없는지,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조직에서 내 편 네 편을 구분하는 이른바 ‘라인’은 조직을 병들게 하는 주요 요인으로 꼽히지만 그 어느 기업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사내 라인 문화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인사나 승진 기회에서 불이익을 받는 사례들도 많다고 한다.

개인의 불안 심리가 라인 문화 만들어
한국 기업이든 서구 기업이든 라인·파벌 문화는 존재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서구의 기업보다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의 기업에서 라인 문화가 더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라인 문화는 조직 규모와 상관없이 고향이나 출신 학교 등을 중심으로 최고 연장자부터 막내까지 다양한 집단을 형성한다. 라인 문화는 왜 만들어지는 것일까. 조직에서 파워를 가지고 싶고 소외되고 싶지 않은 개인들의 심리가 만나 라인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세력화를 통해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는 집단의 심리와 소속감을 가지고 싶어 하는 개인의 심리가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라인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라인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라인에 있는 사람들을 서로 편애하고 극단적으로는 불공평한 분배(평가·승진·보상 등)를 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집단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 때문에 라인 문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라인 문화의 폐해를 지적하면서도 라인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 라인에 들어가기 위해 로비를 펼치기도 한다. 특히 라인에 있는 사람들이 승승장구하거나 회사에서의 입지가 강해질수록 이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하지만 기업이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문제로 라인 문화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작용이 크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조직의 시너지 창출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주축 라인이 변할 때마다 반대 라인이 숙청되면서 결국 조직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맞기도 한다.

국내 기업의 전통적인 강점 중 하나는 ‘응집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럿이 하나가 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 문화가 한국 기업의 고성장 비결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했었다.

여전히 이러한 문화는 유효하겠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상당히 퇴색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직장인들이 응집력에 악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냉소주의를 꼽는다. 조직의 냉소주의는 과거의 경험 때문에 조직에 대해 부정적인 정서를 갖는 것을 의미하는데, 구성원들 사이에 바이러스처럼 퍼지게 되면 조직에 대한 몰입이나 자발성을 저하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냉소주의가 발생하는 단계는 크게 세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조직에 대한 기대의 형성이다. 둘째, 이러한 기대가 충족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배신감이나 환멸감의 순환으로 냉소주의가 생성되고 고착된다.

이러한 냉소주의는 급격한 혁신을 추구하는 조직에서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경영층이 직접 나서 한 단계 도약을 위한 혁신을 부르짖지만 실행이나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혁신을 달성한 이후 기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냉소주의가 싹틀 수 있다.
최강 기업도 떠는 조직 심리의 함정
원칙 잃을 때 냉소주의 확산
냉소주의를 타파하고 조직 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조직이 정한 원칙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원칙에 따라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조직의 리더들이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 명쾌한 시각을 갖고 이에 대한 공감대를 구성원들과 형성해야 한다. 공감대 형성을 위해 리더들은 구성원들에게 조직의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부정적인 정보를 숨기거나 보기 좋게 꾸며서는 안 된다. 그리고 리더들은 정립된 전략 방향 및 원칙들을 일관성 있게 실행해 나가야 한다. 구성원들은 어려운 시기라도 진실을 말하고 정립된 원칙들을 일관적으로 지켜 나가는 조직을 위해 일하고 싶어 한다.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을 도울 것인가. 이것을 결정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성격이라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시간 등이 있다. 또 한 가지는 자신 이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여부다. 한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목격자가 많을수록 다른 사람을 덜 도와준다고 한다. 도움을 준다고 하더라도 실제 행동을 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더 길다고 한다. ‘자신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하겠지’라는 심리가 작용한 때문이 클 것이다.

회사에서도 이런 상황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업무일수록 많은 사람들이 ‘나만 아니면 돼’라는 식으로 산 너머 불구경하듯 행동한다. 또한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해야 할 때 누군가는 눈치만 보면서 자신의 노력을 게을리 하는 무임승차자도 있다. 이처럼 혼자서 일할 때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일할 때 자신의 노력을 줄이는 현상을 ‘사회적 태만(Social loafing)’이라고 부른다.
최강 기업도 떠는 조직 심리의 함정
왜 조직은 사회적 태만에 빠질까. 실제로 심리학자인 막스 링겔만이 밧줄을 당기는 실험을 한 결과 혼자서 밧줄을 당길 때 투입하는 힘을 100이라고 가정할 때 두 명이 함께 당길 때에는 각자 93%만의 노력을, 세 명이 당길 때에는 85%, 8명이 당길 때에는 50%만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직 생활에서 태만이 발생하는 현상은 팀 전체의 성과만 평가될 뿐 개개인의 노력이 평가되거나 모니터링 되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다. 각 개인에게 명확하게 역할과 책임을 부여하지 않거나 역할을 분담하게 하더라도 그것을 평가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 내 몫을 채워 주겠지’, ‘팀의 성과는 팀장에게만 영향이 있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노력을 평가받지 못하는 일에는 소홀히 하고 그 대신 자신의 성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에만 몰입하는 경향이 발생한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 팀의 목표 달성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도 태만이 발생할 수 있다. ‘내가 없어도 잘될 거야’라는 식의 자기 존재감 상실만큼 업무 수행 동기를 떨어뜨리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의 태만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팀에서 개인의 노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책임감이 분산되지 않도록 목표 설정에 기초한 성과 관리가 뒷받침돼야 한다. 책임과 역할에 대한 정확한 평가도 놓쳐서는 안 될 포인트다.

이를 위해 동료 등 피평가자 주변의 시각을 평가에 포함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하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한 개인의 조직성과 기여도에 대한 다양하고 자세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하고 기여한 만큼의 보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구성원들은 자신의 노력을 공정하게 인정받을 때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기 마련이다.

개인의 심리는 일대일 면담, 코칭 등을 통해 관리하는 것이 오히려 쉬울 수 있지만 조직 내에 형성된 심리는 한 번 굳어지면 쉽게 바꾸기 어려운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조직의 리더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구성원들의 행동, 서로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관찰 등을 통해 조직의 심리 상태가 조직의 성과나 건강에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모니터링해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최근 부쩍 긴박해지고 어려워진 대내외 환경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조직의 축소나 확대, 인력 재편 등 여러 가지 방안들을 실행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조직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줄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범상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bscho@lgeri.com
최강 기업도 떠는 조직 심리의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