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대기업 구조조정에 헤드헌팅 시장 '큰 장'
공급은 많은데 수요는 없어

헤드헌팅 시장이 술렁이고 있다. 삼성·현대자동차·롯데·두산 등 내로라하는 국내 대기업들이 대규모 임원 인사를 단행하며 조직 개편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바람은 2016년 초까지 이어져 2000명이 넘는 대기업 임원이 헤드헌팅 시장에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그야말로 헤드헌팅 시장에 큰 장이 섰지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공급은 많은데 수요가 턱없이 부족하다. 대기업을 나와 갈 곳을 잃어버린 고급 인력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술렁이는 헤드헌팅 시장을 살펴봤다.
'삼성' 출신 임원도 갈 곳이 없다
#. 고민중(가명) 부장은 삼성그룹 계열사에 1988년 입사해 임원 승진을 코앞에 둔 ‘삼성맨’이다. 평생직장이라는 마음으로 27년을 일했지만 임원 승진은 쉽지 않고 해마다 진행되는 구조조정 바람과 희망퇴직의 압박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 최근 진행된 대규모 인사에서는 신변에 변화가 없었지만 언제 또 칼바람이 불지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요즘 같아서는 임원 승진을 하더라도 좋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임원으로 승진해도 얼마나 버틸지 가늠조차 안 되고 버틸 만큼 버티다가 회사를 나가면 재취업도 마땅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삼성 출신을 선호하던 중견기업들의 사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다. 주변에는 이미 헤드헌터(고급 인력을 전문적으로 스카우트하는 사람 또는 회사)들과 교류하며 컨설팅을 받고 임직원들이 많다. 고 부장도 이번 주말 지인에게 소개 받은 헤드헌터를 만나볼 계획이다.

삼성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맨·롯데맨·두산맨 등 국내 주요 대기업에 몸담고 있는 직장인들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잇달은 대기업들의 구조조정에 따른 후폭풍이다. 해마다 연말이면 기업들이 구조조정 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2016년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삼성그룹은 2015년 12월 정기 인사에서 약 500명이 넘는 임원이 퇴임했다. 1~2년밖에 안 된 임원도 상당수 옷을 벗었다. 다른 대기업들의 상황도 비슷하다. 현대차·LG·롯데·두산 등 주요 그룹들의 연말 정기 임원 인사에서 상당수 임원들이 퇴직했다. 업계에서는 2016년까지 2000명 이상의 대기업 임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중견기업 가도 억대 연봉은 ‘옛말’

예전 그 어느 때보다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던 만큼 헤드헌팅 시장에는 ‘큰 장’이 섰다. 헤드헌터들에게는 평소 연락조차 하기 힘들었던 대기업 임원들의 문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하지만 헤드헌터들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많은 공급을 수용할 만큼 수요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 인력의 최대 수요자는 중견기업이다. 그동안 대기업에서 나온 인력들은 동종 업계의 중견기업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구조였다. 이들 중견기업의 사정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2015년 중소기업 정기 신용 위험 평가 결과 구조조정 대상 기업은 175개로 전년 대비 50개 기업이 증가했다. C등급(워크아웃 대상)과 D등급(법정 관리 대상)은 전년 대비 각각 16개, 34개 늘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개, 비제조업은 21개 늘었다. 전자부품·기계장비·자동차·식료품·운수업을 중심으로 증가했다. 대기업 고급 인력들이 갈 길을 잃어버린 이유다. 이영미 커리어케어 전무는 “중견기업 상황이 좋지 못하다 보니 추천해 줄 만한 곳이 마땅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중견기업의 사정이 좋지 않은 가운데 고급 인력의 눈높이가 여전히 높다는 것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전 직장에서 받던 처우를 그대로 이어 가려는 일부 대기업 출신 임원들의 성향이 중견기업들에 부담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헤드헌팅 업계에 따르면 특정 ‘패키지’를 요구하는 대기업 임원들도 많았다. 패키지에는 고액 연봉, 차량 지원, 사무실 지원, 비서 등 인력 지원 등이 포함된다. 이 전무는 “임원 초년 연봉으로 4억~5억 원을 받았던 대기업 임원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지만 중견기업에서는 1억 원도 부담스러운 연봉인 것이 사실”이라며 “조금 더 ‘헝그리’해져야만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렇다면 창업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장기간 이어지고 있는 경기 침체 속에서 창업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권강수 부동산창업정보원 이사는 “오랜 시간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십분 살릴 수 있는 컨설팅 업체 등은 염두에 둘 만하지만 평범한 치킨집이나 편의점 창업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일련의 분위기 속에서 일각에서는 창업을 하려면 임원 승진보다 그전에 희망퇴직을 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최근 창업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았다는 한 대기업 간부는 “창업을 하려면 목돈이 필요한데 임원을 하다가 경질당하면 퇴직금이 없다”면서 “차라리 임원을 달기 전 희망퇴직을 하면 퇴직금과 위로금을 포함해 많게는 4억~5억 원의 목돈이 생기는데, 이 돈으로 창업하는 게 나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굳이 임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선배들의 생각은 후배들에게 ‘대기업이라고 평생직장이 아니다’는 인식을 심어 주고 있다. 바늘구멍을 뚫고 어렵게 대기업에 취업한 뒤 한시름 놓을까 했던 사원·대리급을 비롯해 한창 업무에 집중해야 할 과·차장들도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다른 회사로 이직을 준비하며 틈틈이 자기 계발을 하거나 아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직원들도 늘고 있다. 2011년 A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한 33세의 김모 씨는 “대기업에서는 오랜 노력 끝에 ‘별(임원)’을 따더라도 2년도 채 안 돼 경질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늦기 전에 대기업 출신이라는 간판을 들고 나가 다른 평생직장으로 이직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공감대가 직원들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평판 조회가 재취업 성패 좌우

전문가들은 이 같은 공감대가 자칫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직에 신경을 쓰다보면 업무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좋지 않은 평가로 이어져 추후 이직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기업에서 쏟아져 나온 경쟁자가 많다는 점도 이직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요인으로 꼽혔다.

이정선 커리어케어 전무는 “신입보다 경력을 선호하고 기왕이면 대기업 경력이면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경력이라면 한 회사에서 4년 정도 몸담으며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며 “성과는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 등에서 결과물을 내놓는 것을 말하지만 회사별·직무별로 평가 지표가 다른 만큼 평판 조회에서 ‘그 사람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는 나와야 한다”고 소개했다. 평판 조회는 헤드헌팅 시장에서 비중이 커지고 항목이다. 수치로 표시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평판 조회를 통해 평가 받는데, 이는 재취업 여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눈에 보이는 성과도 중요하지만 그룹 내에서 ‘리더십 있는 사람’,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전략·기획 전문가 수요는 늘어

현재 헤드헌팅 시장의 모습을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시기와 비교하는 시선도 있다. 당시 수많은 고급 인력들이 채용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는 점에서는 현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후 나타나는 양상에는 차이가 있다.

먼저 IMF 시절, 대기업에서 나온 인재들이 국내시장에 벤처 붐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오히려 채용 시장은 호황을 이뤘다. 금융 위기 때도 급감하는 경기로 인해 채용 시장이 얼어붙었지만 이는 금융 산업에 국한된 얘기였다. 다른 산업 부문에 대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고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 심리로 단기간에 채용 수요가 정상화되기도 했다.

당시 기업들의 구조조정은 IMF와 금융 위기에 따른 후속 조치였지만 최근 단행되고 있는 기업들의 구조조정은 사뭇 다르다. 장기적인 불황을 인지한 기업들이 선제 대응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상시 희망퇴직을 적용하는가 하면 구조조정 대상 직급도 점점 확대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2015년 하반기에 계열사 합병 등으로 몸집 줄이기에 나선 대기업들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구조조정은 장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인력 시장의 패러다임이 급격히 변하고 있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시점이다.

일부 대기업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사무직보다 기술 전문직이 유리하다’며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신조어까지 퍼뜨리고 있다. 전문직은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한 직업’을 뜻한다. 산업 현장에서는 전문성을 가진 인재를 선호하는 만큼 일반 사무직보다 전문직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대형 건설사에 근무하는 한 간부는 “한 상무님은 홍보 경력을 살려 언론사 광고팀으로 이동했고 기술력을 내세워 정년이 지난 후 회사와 3년 더 계약을 연장한 현장 소장도 더러 있다”면서 “필요한 사람을 찾아 회사에서 먼저 발 벗고 나서기도 하는데, 확실히 기술직이 강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전문직’이 아닌 ‘전문성’이다. 전략 전문가, 기획 전문가 등 통상 전문직이라고 불리지 않더라도 남보다 뛰어난 전문성만 보유하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요즘처럼 어려운 상황일수록 업종과 분야를 불문하고 전략·기획 전문가에 대한 채용 수요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고 강조한다.

심양희 브레인202 대표는 “대기업 임직원들의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솟아날 구멍은 있기 마련”이라며 “아직 근무 중인 임직원들에게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고 퇴임한 임원들도 자신을 돌아볼 전화위복의 시간이 마련됐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김병화 기자 kb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