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연말대상처럼 공동 수상도 아니건만, 이상한 셈법이다. 최근 금융권의 퇴직연금 성적표(수익률)가 발표되자마자 은행 여기저기서 너도 나도 1등이란 현수막(?)을 내걸었다.
알고 보니 ‘국어 1등’, ‘수학 1등’, ‘학기 말 1등’, ‘2015년 1등’처럼 저마다 다른 기준을 내세운 것. 퇴직연금 시장에서 나날이 영향력을 높여 가는 은행권의 과열 경쟁이 빚은 소극(笑劇)이다.

DC형 7년 은행권 1위 국민은행…전체 10위
2·3위 우리·신한은행, 전체 20·21위에 그쳐
[Financial business] ‘대격돌’ 퇴직연금 시중은행 성적표
‘마지막 블루오션’으로 꼽히는 퇴직연금 시장에서 은행권이 자존심을 건 불꽃 경쟁을 펼치다 보니 ‘1위’ 주장이 난무한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 잘할까.

퇴직연금의 경우 확정급여형(DB형), 확정기여형(DC형), 개인형퇴직연금제도(IRP) 등 유형도 다양하고, 수익률도 1년, 5년, 7년은 물론 분기별로도 공시되므로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 헷갈리기 쉽다. 다만 퇴직연금은 20~30년 이상 지속적으로 운용해야 할 장기 투자의 특성상 1년 등 단기 수익률보다 5년, 7년 등 장기 수익률이 중시된다.

금융감독원의 금융통합조합시스템 ‘금융상품 한눈에’(http://finlife.fss.or.kr/)에서 근로자가 운용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DC형 7년 수익률(원리금 비보장형, 2015년 말 기준)을 살펴보면, 은행권 14개 사업자(옛 하나은행, 옛 외환은행 각각 공시) 가운데 최고 수익률을 기록한 것은 KB국민은행(6.59%)이었다. 다음으로 우리은행(6.12%). 신한은행(6.04%), (옛)외환은행(5.9%), NH농협은행(5.79%) 순이었다. 5년 수익률 역시 KB국민은행(3.44%)이 업계 1위를 차지했다. 이외 KDB산업은행(3.1%), (옛)외환은행(3.04%)이 3% 이상의 양호한 수익률을 거뒀다.

IRP형 7년 수익률(원리금 비보장형)에서 은행권에서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곳도 KB국민은행(6.79%)으로, 2위 (옛)외환은행(6.61%)을 0.18%포인트 앞질렀다. 이어 KDB산업은행(6.17%), (옛)하나은행(6.11%), 신한은행(6.06%), 광주은행(5.94%), 우리은행(5.92), NH농협은행(5.52%) 순이었다.

그러나 시야를 넓히면 상황이 달라진다. 퇴직연금은 은행 외에도 증권사, 생명보험사, 손해보험사 등 50개에 육박하는 금융 회사들이 진검승부를 벌이는 전장이다. 대상을 전체 퇴직연금 사업자로 넓혀보면 증권사와 생보사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DC형 7년 수익률(원리금 비보장형, 2015년 말 기준)에서 최고 수익률을 기록한 곳은 한국투자증권(7.61%). 2위와 3위는 각각 교보생명(7.59%)과 NH투자증권(7.38%)이 차지했다. 상위 10위 안에는 KB국민은행(6.59%)이 간신히 마지막으로 랭크됐다. 은행권 2·3위인 우리은행(6.12%)과 신한은행(6.04%)은 전체 20위와 21위에 머물렀고, (옛)외환은행(5.9%)은 22위, NH농협은행(5.79%)은 25위에 그쳤다.

전체 수익률 1위인 한국투자증권과 은행권 수익률
1위인 KB국민은행과의 격차만 해도 무려 1.02%포인트다. 이를 7년 누적 수익률로 보면 한국투자증권의 DC형(원리금 비보장형)은 53.27%의 수익률을 올린 데 반해 KB국민은행의 경우 46.13%로 격차가 7% 넘게 벌어진다.

IRP형 7년 수익률(원리금 비보장형) 부문에서도 은행권은 생보사와 증권사에 밀렸다. 한화생명(9.14%), 삼성생명(7.84%)이 1, 2위의 영예를 안았고, NH투자증권(7.49%)과 대우증권(6.82%)이 3, 4위를 이었다. 은행권 1위인 KB국민은행은 5위(6.79%)에 그쳤다.

김병덕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기본적으로 은행은 안정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퇴직금을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증식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수익률 제고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장기 투자 상품의 특성상 예·적금이나 국공채 위주로 지나치게 안전성을 추구하기보다 위험자산 반영을 통한 수익성 개선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 지난해 당국은 DC형, IRP의 총 위험자산 보유 한도를 기존 40%에서 70%로 상향 조정했다.

中企 87.2% 은행권 쏠림, ‘거래관계’ 영향 커
수익률과는 별개로 적립금 규모 면에서 은행권은 ‘절대 강자’다. 2015년 말 도입 이래 10년 만에 120조 원을 돌파한 퇴직연금 적립금의 절반 이상(63조 원)을 은행권이 굴린다. 도입 초기 ‘터줏대감’으로 불리던 생보사의 점유율은 은행권의 절반 수준(25.1%)에 불과하다.

미래도 장밋빛이다. 지난해 9월 기준 퇴직연금 사업장 가입률은 16.7%로 전체 사업장(175만2503곳) 중 29만2821곳만 퇴직연금을 도입했다. 대기업의 퇴직연금 도입률은 81.2%나 되지만 30~300인 중소기업 도입률은 49.2%, 30인 미만 소기업은 15.3%에 불과한 것이다. 올해부터 300인 이상 사업체의 퇴직연금 가입 의무화가 시행되고 단계적으로 의무 가입 대상이 확대되면서 퇴직연금 유치전은 한층 뜨거워질 전망이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는 2024년 퇴직연금 시장이 43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주목할 점은 중소기업 규모가 작아질수록 은행을 사업자로 선정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 300인 미만 기업 10곳 중 9곳(87.2%)이 퇴직연금 사업자로 은행을 선택했다. 앞으로 중소기업의 퇴직연금 의무 가입이 확대될 경우 은행의 지배력 강화가 쉽게 예상되는 대목이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의 300인 미만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퇴직연금 도입 기업 중 절반(51.7%) 이상이 퇴직연금 사업자를 선정할 때 ‘기존 거래관계’의 영향을 받았다고 답했으며 ‘매우 영향을 받았다’는 비중은 은행이 다른 업권에 비해 3배 정도 컸다.

김혜령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거래관계에 의존해 퇴직연금 사업자를 선정하면 더 나은 역량을 갖춘 사업자를 활용할 기회를 잃어 제도 운영의 질이 떨어지고 근로자의 노후 자금 마련에 차질을 줄 수 있다”며 “중소기업이 거래관계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더 나은 역량을 가진 퇴직연금 사업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했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대표는 “중소기업들은 대출 등 기존 거래관계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는 ‘을’의 처지이지만, 기업들 스스로도 퇴직연금 사업자 선정 시 근로자의 노후 대비를 중시해 운용력이 탁월한 사업자를 우선 고려하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Financial business] ‘대격돌’ 퇴직연금 시중은행 성적표
배현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