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챔피언 방식과 실리콘밸리 방식
(일러스트 김호식)

[김도훈 산업연구원 명예연구위원] 한국의 주력 산업들이 성숙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이제 산업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나 느끼고 있는 듯하다. 구조조정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해운·조선 같은 산업들만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다.

한국 수출의 80% 정도를 차지하는 기존 주력 산업들이 모두 그런 위기감을 느끼고 있고 각자 나름대로 미래를 준비하는 다양한 노력을 강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정부든 기업이든 그리고 산업 전문 기관이든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단골 메뉴로 기술 경쟁력 향상을 위한 연구·개발(R&D)에 가일층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해답을 제시하곤 한다. 과연 그것으로 해결될까. 지금까지도 기술 개발과 R&D 방면에서 거의 세계 최고 수준급의 노력을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는 전략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기술 개발과 R&D를 하더라도 어떤 기술을 목표로 하고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 심각히 고려해야 할 시기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산업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려고 할 때 가장 많이 참고했던 케이스는 미국 실리콘밸리 방식과 독일의 히든챔피언 방식이 아닐까 싶다.

시기에 따라 어느 한쪽이 강조되기도 하고 때로는 양쪽을 섞은 전략이 제시되기도 했던 것 같다. 기실 두 케이스는 모두 한국이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을 찾으려는 한국의 산업에 좋은 참고가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두 케이스를 모두 참고하려고 하거나 혹은 섞어도 될 일인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실리콘밸리 방식이 그야말로 세계 모든 곳의 탤런트들을 결합해 새로운 산업을 열어 가는 이른바 ‘협업’ 방식이라면 히든챔피언 방식은 자신이 강점을 가지는 분야의 기술력을 끊임없이 향상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경쟁력을 갖춰 나가려는 이른바 ‘전문화’ 방식이기 때문이다.

과연 한국 산업들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 더 적합할까. 이웃 일본을 보면 아무래도 독일 히든챔피언 방식의 기업들이 새로운 산업 영역을 구축해 나가는 모습이다. 한국의 중견·중소기업들 중에서도 이런 전문화의 길을 걸어 일정 정도의 성공 스토리를 써 가는 케이스가 종종 눈에 띄어 반갑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 산업의 주류를 차지하는 대부분의 대기업들이나 그들과 함께 주력 산업의 경쟁력을 만들어 가는 협력 업체로서의 많은 중소·중견기업들이 이런 방식으로 전문화의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이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적절한 영역에서 적절한 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제품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산업을 키워 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명제가 나오면 각자가 자신들이 맡은 분야에서 적절한 기술력을 갖추기 위해 상당한 수준의 R&D를 추진해 왔고 그것이 지금까지는 잘 맞아떨어져 온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산업을 일궈 온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에 몇 가지 특정 분야에서만 지속적으로 자신의 기술력을 키워 나가는 히든챔피언 방식으로 변신하라고 요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그때 일정 정도의 성공을 거둬 온 한국 산업으로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전문화의 길은 아무래도 적성에 맞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변화의 방식은 협업의 길인 셈이다. 과연 한국 기업들이 이 방식을 쉽게 소화해 낼 수 있을까. 어쩌면 한국의 대기업과 협력 업체인 중소·중견 기업들 사이에 일하는 방식도 협력이라고 부르고 있는 만큼 한국 기업들도 새로운 협업 방식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실리콘밸리 방식의 협업 방식과 한국 기업들의 협력 방식에는 기업들의 개방성에서 결정적 차이를 보인다.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탤런트를 가진 기업들과 협력하려고 애쓰는 데 비해 한국 기업들은 계속 함께 일해 온 협력 업체들과 거의 배타적으로 가족처럼 일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파트너들을 맞아들이는 데 매우 소극적이라는 점에서 실리콘밸리 기업들과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과연 한국 산업들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수확 또한 장기간 지속될 ‘전문화’의 길일까. 아니면 기업 문화를 개방적으로 열어 새로운 파트너들과 새로운 산업을 함께 열어 가는 ‘협업’의 길일까. 두 가지 모두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한국 기업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인 것이다.
히든챔피언 방식과 실리콘밸리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