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가지면 자기중심 사고 확률 높아져…‘의도적 노력’ 통해 갑질 스스로 막아야 [한경비즈니스 칼럼=김한솔 HSG 휴먼솔루션그룹 수석연구원] 갑질. 계약 권리상 쌍방을 의미하는 갑을(甲乙)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갑’이 우월한 신분·지위·직급 등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오만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 저래라 하며 제멋대로 구는 행동을 말하는 용어다. 인터넷 신조어였는데 이제 언론에서도 거의 매일 볼 수 있게 된 표현이다. 그리고 최근 한 항공사로 인해 다시 이슈가 된 단어이기도 하다.
갑질은 꼭 기업 간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 백화점의 진상 고객, 콜센터 직원을 상대로 한 언어폭력도 같은 의미의 갑질이다. 우리는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인 셈이다. 결국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 되는 갑질,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이를 막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사적 자기의식 vs 공적 자기의식
한 가지 실험을 해 보자. 읽던 글을 잠시 멈추고 이마에 알파벳 ‘E’를 써보자. 그리고 주변에 거울이 있다면 자신이 쓴 E가 자기가 보는 방향인지, 상대방의 방향에서 읽을 수 있게 쓰인 것인지 보자.
이는 일본의 심리학자 사카이 고 교수가 인간의 자의식을 연구하면서 수행했던 실험이다. E를 내가 보는 방향에서 썼다면 사적 자기의식이 높은 사람이라는 게 사카이 교수의 설명이다. 남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반대로 상대가 알아볼 수 있게 E를 쓴 사람, 다시 말해 거울에 알파벳 E가 제대로 보였다면 이 사람은 공적 자기의식이 높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위 상황과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실험을 여러 번 해본 결과 재미난 현상이 발견됐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이 없는 사람에 비해 3배 정도 더 많이 ‘자기중심’에서 똑바로 보이는 E를 썼다는 것이다.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사적 자기의식이 높아졌는지, 사적 자기의식이 높은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될 확률이 높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권력을 가지면 남보다 자기중심의 사고를 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증명된 듯하다.
캐나다 맥매스터대의 신경과학자 석빈더 옵하이 교수의 연구 내용도 함께 보자. 옵하이 교수는 전기적 자극을 활용해 권력자와 비권력자의 뇌기능을 비교해 연구했다. 그 결과 “권력이 생기면 뇌에서 공감 능력의 원천이 되는 ‘미러 신경’이 손상을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문제를 해결해 준 덕분에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이 권력을 갖고 난 뒤 오히려 이를 잃게 되는 것이다.
옵하이 교수는 이를 ‘파워 패러독스(power paradox)’라고 정의했다.
두 연구 결과는 권력이 있는 사람이 갑질을 하는 이유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준다. 사람의 의지 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뇌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권력이 생기면 커지는 자기중심적 성향과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리는 뇌의 공감 기능에 따른 문제다.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필요한 게 의도적 노력이다. 억지로라도 상대방의 처지가 돼보는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 자신이 보는 세상 외에도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관점 전환이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관점 전환은 만 4세 이후부터 자연스럽게 생기는 능력이다. 4세 이전엔 숨바꼭질을 할 때 자신이 술래를 보지 못하면 술래도 자기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머리만 숨기고도 다 숨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꿩처럼 말이다. 그러던 아이들이 4세가 지나면서부터 관점 전환, 즉 자신이 보는 세상 말고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권력을 갖게 되면 이 능력이 다시 퇴화한다. 자기 경험이 옳고 자기 판단이 진리라는 생각. 그래서 잘못된 행동이라는 인식 자체를 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갑질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최근 종영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최종회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피부 속까지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 아래 숨겨진 이야기를 알아야 사건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 사회의 갑질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상대는 나름의 이유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갑질을 줄이기 위한 의도적 노력의 시작이다.
◆‘감정설명화법’의 중요성
그러면 갑질을 피하기 위해 자기 요구나 주장을 해서는 안 되는 걸까. 물론 그건 아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가장 기본은 사실만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누군가는 반문한다. ‘당연히 사실을 말하지, 없는 얘기를 지어서 하느냐’고…. 여기에서의 사실은 실제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직원 한 명을 채용하고 싶다. 채용 후보자가 묻는다. “일이 많이 바쁜가요?” 잠시 생각하다 ‘1주일에 한두 번 야근하는 거니까’라는 생각에 당신이 말한다. “그렇게 바쁘지 않아요.” 이 대화는 사실만으로 이뤄진 것일까.
언뜻 보면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사실 기반의 대화가 아니다. 만약 채용 후보자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툭하면 주말 출근을 하던 회사에서 근무한 직원이라면 ‘바쁘지 않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9 투 6’의 삶을 당연시 여기던 곳에서 일하던 직원에겐 야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아주 바쁜 곳’일 수도 있다.
결국 ‘바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주관적 해석이 개입된 말이라는 의미다.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모두가 그렇다고 동의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구성원의 잘못된 행동이나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물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면 “매번 갖고 오는 게 마음에 안 든다”며 무언가를 집어던질 게 아니라 구체적 사실을 얘기해야 한다.
불친절한 서비스에 대해 항의하고 싶을 때도 마찬가지다. “여긴 항상 손님을 무시해요”가 아니라 “기다리라고 해 놓고 10분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어 화가 난다”고 말해야 한다. 10분간 기다린 것, 이게 사실이다.
이를 커뮤니케이션학에선 ‘감정설명화법’이라고 말한다. 상대의 객관적 행동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
◆일방적 의견 대신 기준 제시해야
이에 더해 자기주장을 좀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면 뭐가 뒷받침돼야 할까. 이때 필요한 게 기준이다. 자신의 일방적 의견이 아니라 다른 사례를 언급하며 자기주장과 요구 사항이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릴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제시할 수 있는 기준은 크게 세 가지다. 전례 등을 언급하는 것, 공시된 지표를 이용하는 것, 유사한 다른 상황을 제시해 설득하는 것이다.
업체의 서비스 지연으로 피해를 봤다고 가정해 보자. 갑질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어떡하느냐”는 불만 섞인 항의 멘트가 가장 먼저 떠오를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세련된 방법으로 얘기해 보면 어떨까.
이 상황에서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은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감정적으로 화를 풀고자 하는 것이 아닌 만큼 전례를 활용해 “과거에 어떻게 보상해 줬나요”라고 물을 수 있다. 혹은 공시된 지표를 근거로 “보상은 어떤 법적 근거를 통해 이뤄지죠”라고 확인할 수도 있다. “다른 업체에서 이뤄지는 보상 수준에 대해 알고 있나요”라고 대응할 수도 있다.
갑질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이나 정당한 요구까지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할 말은 하되 옳은 방식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 상대의 ‘행동 변화’로 이어지게끔 하는 것이 목적인 만큼 우선 생각해야 한다.
막무가내로 요구하기 전에 상대의 상황은 자기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기준을 제시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특히 자기에게 권력이 있다면 좀 더 조심해야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당신의 뇌가 갑질의 세계로 당신을 끌고 가고 있을지 모른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82호(2018.07.23 ~ 2018.07.29)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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