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무역 갈등은 시작일 뿐” 트럼프의 ‘준비된 패권전쟁’]
- 옛 소련은 ‘오일 전쟁’으로 무너져…첨단산업 등 한국이 반사이익 누릴 수도
전성기 일본도 ‘금융 전쟁’에 무릎… 미·중 패권전쟁 시나리오는?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20세기는 누가 뭐래도 ‘미국의 시대’였다. 반면 21세기의 지배자는 미국이 아닌 중국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에 도전해 오는 신흥 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최근 벌어지는 미·중 무역 전쟁에는 중국이 더 성장하기 전에 확실하게 기선제압할 필요가 있다는 미국의 인식이 깔려 있다. 미국의 과거 패권전쟁 사례를 통해 향후 중국에 대한 핵심 전술을 짚어봤다.

◆ 무역전쟁, 씨앗은 2008년부터 자라기 시작

미국이 중국을 향해 무역 전쟁의 포문을 연 것은 올해지만 그 전쟁의 씨앗은 이미 2008년부터 자라고 있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적개심’과 ‘공포’는 그만큼 뿌리가 깊다.

미국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팍스 아메리카나’로 군림해 왔다. 그런데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반면 중국은 5000년 역사 동안 늘 세계의 중심이었다. 미국이 휘청거리는 사이 중국인의 의식 속에 뿌리 깊이 박힌 ‘중국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여파로 글로벌 금융시장 역시 큰 타격을 받았지만 중국의 높은 성장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당시 중국의 인민은행 총재는 달러화를 대체할 국제통화기금(IMF) 중심의 새로운 글로벌 통화를 제안했고 2016년 10월 위안화는 IMF 특별인출권(SDR) 편입에 성공했다.

달러를 대신해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려는 중국의 야심이 드러나자 미국으로선 중국을 가만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최윤식 아시아미래연구소 소장은 ‘앞으로 5년 미·중 전쟁 시나리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는 2008년 시작된 중국의 기축통화국 도전, 2013년 시진핑 국가주석이 던진 승부수인 일대일로에 맞서 미국이 패권을 강화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아닌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됐어도 미국 우선주의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역시 이번 전쟁으로 상처를 입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미국에 중요한 것은 중국에 치명타를 입혀 쓰러뜨릴 수 있는 ‘공격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의 패권전쟁은 군사 전쟁이 아닌 ‘경제전쟁’으로 나타난다. 중국과의 패권전쟁 역시 무역 전쟁, 통화전쟁, 금융 전쟁의 순서대로 전개될 확률이 높다. 오일과 같은 에너지 또한 전쟁의 주요 무기다. 만약 여기까지 전개됐는데도 불구하고 승자가 가려지지 않는다면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매우 낮다. 이는 과거의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소련, 수출의 3분의 2를 석유에 의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양분됐다.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구소련은 이념적 라이벌이자 경제적 라이벌이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군비경쟁·우주개발 등의 경쟁을 치열하게 펼쳤다.

두 강대국의 팽팽한 경쟁구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1973년 중동전쟁 발발이었다. 1차 오일쇼크로 원유 가격이 4배 이상 뛰었다. 1979년 이란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원유 가격이 다시 상승했다. 10년 동안 원유 가격이 10배 넘게 상승하는 ‘2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의 산유국이었던 소련은 유가 상승으로 반사이익을 얻었다. 군비 증강 등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등 미국의 안보를 위협했다.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1982년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방안을 고심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소련 경제의 생명줄인 ‘석유’를 이용한 공격이었다. 미국은 당시 소련 경제의 최대 약점이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석유는 구소련 수출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었다.

1983년 미국은 국제에너지기구(IEA)를 통해 유럽 국가들이 소련산 천연가스 구매를 줄이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결정적 한 방은 이후에 뒤따랐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밀약을 통해 석유 공급량을 4배 증가시키며 원유 가격의 하락을 유도했다. 여기에 서유럽·일본과 함께 석유 비축유를 방출하면서 가격 하락을 가속화했다. 원유 가격의 하락으로 소련의 석유 수출과 외화보유액이 빠르게 급감했다.

이때부터 미국과 동맹국은 소련의 국가 채무 상환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고 경고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소련의 경제 상황에 불안을 느낀 다른 나라들이 소련에 여신 제공을 꺼리게 될 것이고 소련은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에 소련에 차관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와 함께 달러화의 가치를 평가절하해 소련이 벌어들인 달러의 실질 구매력을 하락시켰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소련은 1992년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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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전쟁 패배 후 일본 ‘잃어버린 20년’ 시작

냉전시대 미국은 소련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진영 국가들의 세력을 확장시키는 데 온힘을 쏟았다. 대만·한국·일본 등이 이 과정에서 득을 본 대표적인 국가들이었다. 특히 일본은 빠르게 미국의 전자제품·철강·반도체·자동차 시장 등을 잠식해 갔다. 미국은 대일본 무역에서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고 미국의 자동차를 비롯한 상당수 제조업체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실업률이 높아졌고 일본을 향한 미국 노동자들의 분노도 커져 갔다.

1974년 미국은 일본을 향해 ‘슈퍼 301조’ 카드를 꺼내들었다. 강제로 일본의 고정환율제를 폐지하고 변동환율제로 바꿔 엔·달러 환율을 360엔에서 260엔으로 낮췄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조치에도 일본의 수출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엔화 절상에 따른 가격 경쟁력 약화를 생산성 향상과 원가절감으로 극복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은 첨단 기술 국가로 성장했지만 미국 경제는 점점 더 나빠졌다. 경기는 침체되는데 물가는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며 미 경제가 위축되기 시작했고 이를 잡기 위한 고금리 정책을 지속하면서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미국의 고금리가 지속되자 해외 자본이 지속적으로 유입됐는데 일본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1985년 일본 외환심의회는 엔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공식화했다. 미국은 결국 일본을 제압하기 위해 ‘통화정책’이라는 칼을 빼들었다.

1985년 9월 미국·영국·프랑스 재무장관이 플라자호텔에 모여 일본을 압박할 방안을 마련했다. 일본의 엔화의 화폐가치를 평가절상해 국제 무역수지의 불균형을 해소하기로 했다. 이른바 ‘플라자 합의’다. 일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합의문에 서명하지 않으면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돼 무역 보복 등의 제재를 당할 수 있었다. 일본의 엔화는 1주일 만에 달러화 대비 약 8.3% 절상됐다. 그 후에도 엔화는 계속 평가절상돼 1995년 달러당 100엔 밑으로 하락했다. 미국 제품의 수출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높아졌고 일본에 지고 있던 미국의 달러 채무 부담도 사라졌다.

1987년 10월 뉴욕 증시가 폭락하자 미국은 일본에 금리 인하를 요구했다. 일본이 금리를 낮추면 투자자들은 일본 엔화를 빌려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미국의 주식과 부동산 시장에 투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서는 손해가 큰 거래였지만 최대 수출국이자 기축통화국인 미국을 거스를 수 없었다. 낮은 금리에 대규모로 풀린 자금이 일본의 증시와 부동산에 흘러들어 갔고 일본 자산시장에는 대형 버블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패권을 노리는 일본을 주저앉힌 결정적인 무기는 다름 아닌 ‘금융 전쟁’이었다. 일본의 주식시장이 한창 상승기에 있을 때 미국 월가의 투자가들은 ‘일본 증시가 하락한다’에 베팅하는 상품을 준비했다. 일본 투자자들로서는 닛케이지수가 하락하면 손해겠지만 상승하면 미국 투자자들로부터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상품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동시에 미국에서도 닛케이지수가 폭락하면 큰돈을 버는 새로운 상품이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 이 상품이 인기를 끈 지 한 달 만에 일본 증시는 완전히 무너졌다. 오랫동안 저금리를 바탕으로 대출됐던 자금이 주식시장에 유입돼 생긴 버블이 꺼졌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이 무너지며 부동산 시장도 함께 붕괴됐다. 자산 폭락, 엔고, 수출 경쟁력 하락이 이어지며 일본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공장을 해외로 이전했고 산업공동화 현상이 심화됐다. ‘잃어버린 20년’의 시작이었다.

◆30년 만의 대박 기회?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은 이제 막 시작됐다. 이 싸움의 승패는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지만 이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한국도 그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도 미·중 전쟁이 한국에 미칠 여파에 대해 다양한 전망을 쏟아내는 중이다.

최윤식 소장은 “이 전쟁으로 한국의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의 경제전쟁의 최종 목표는 중국이지만 미국이 진두지휘하는 무역 전쟁, 통화전쟁, 금융 전쟁은 한국에도 직격탄이 된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의 보호무역주의 협공 속에 제2차 제조업 공동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높게 고려해야 한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도 감소하고 있다. 그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대비해야 한다”며 “사회적으로 분배 구조를 재조정하는 한편 기업을 보호하는 정책도 함께 실시했던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책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30년 만에 한 번 오는 대박의 기회라는 의견도 있다. 김장섭 JD부자연구소 소장은 “과거의 사례로 봤을 때 미국은 중국의 금융시장 개방까지 이 전쟁을 밀어붙일 것”이라며 “그렇게 된다면 중국은 일본과 비슷한 길을 걸을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승부가 기울어진 싸움에서 한국이 ‘베팅’해야 하는 쪽은 중국보다 미국이라는 의견이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이 장기전이 되더라도 ‘자기 파괴적 무역 전쟁’의 가능성은 낮다는 의견도 있다. 유승민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거시적 흐름으로 볼 때 미국이 중국에 대해 일방적 태도를 고집하기는 과거에 비해 쉽지 않다”며 “미국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견제와 균형을 잡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도 대결 구도를 지속하기보다 협상이 유리하다. 과거 일본의 굴욕적인 결과를 이미 학습한 상태에서 미국과 장기적 출혈경쟁을 벌이는 것은 이제 막 장기집권 체제를 연 시진핑 주석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다.

첨단 산업의 헤게모니를 차지할 가능성은 미국이 조금 더 높지만 ‘무역 분쟁’이 글로벌 교역에 심각한 위축을 초래하거나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으로 번질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 이렇게 되면 한국 또한 부정적인 영향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김예은 IBK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미국의 무역 분쟁 상대는 결국 중국”이라며 “한국이 단기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과거의 사례에서도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가 흔들린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국내 대중 수출 가운데 중간재 수출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수출 지역이 이전보다 다변화되면서 전반적인 글로벌 경기 흐름에 더 영향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중 무역 분쟁이 한국에 유리한 측면도 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은 기본적으로 지식재산권과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한 패권경쟁이다. 오히려 한국으로서는 중국과의 기술 경쟁에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특히 ‘중국 제조 2025’에 포함된 산업군 대부분이 한국이 중국에 경쟁력 측면에서 쫓기고 있던 부분임을 감안하면 한국으로서는 이번 무역 전쟁으로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된 셈이다.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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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97호(2018.11.05 ~ 2018.11.1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