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중재자 없이 이뤄지는 자동 계약…글로벌 기업의 도전 이어지며 곧 현실화될 것

젊은 천재 개발자의 열정이 확산시킨 ‘스마트 콘트랙트’
[오태민 마이지놈박스 블록체인 연구소장] 암호화폐 거품이 한창이던 2017년은 ‘비트코인은 쇠락할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지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 거품은 이더리움을 비롯한 스마트 콘트랙트 플랫폼들의 약진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특히 이더리움 진영에서는 이더리움의 총가치가 비트코인의 총가치를 앞서는 시점이야말로 블록체인 역사의 진정한 시작점이라며 그 날짜까지 예측하며 환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거품은 꺼졌다.

현재 수천 개가 넘는 암호화폐들 가운데 암호화폐 시가총액 중 비트코인 시가총액의 비율은 대략 50%에 육박한다. 암호화폐의 겨울이라고 불리는 하락기에 비트코인의 비율은 오히려 높아졌다. 만약 암호화폐의 여름이 다시 온다면 이번에는 비트코인과 암호화된 법정화폐와의 경쟁과 논쟁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하다. 스마트 콘트랙트 플랫폼에 대한 열정이 회복될지는 미지수라는 의미다.



현재의 기술로는 실현하기 어려워

스마트 콘트랙트는 아직 블록체인 기술로는 실현하기 어렵다. 10대에 천재 프로그래머라는 명성을 얻은 비탈릭 부테린 이더리움 창립자가 스마트 콘트랙트 플랫폼을 개발했다고 선언했을 때 세계는 놀랐다. 특히 젊은이들이 열렬하게 반응했다.

스마트 콘트랙트라는 생소한 개념을 검색하면 법원과 변호사의 도움 없이 프로그램상에서 계약이 자동으로 이행된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쏟아졌다. 당시 사람들은 매우 복잡하다던 바둑의 최고수인 이세돌 기사를 무참하게 박살냈던 인공지능(AI) 알파고의 위력을 봤다. 그리고 AI의 도약적 발전이 가능했듯이 자동으로 이행되는 계약도 곧 가능할 것이라는 논리에 쉽게 순응했다. 법조인들의 인터넷 카페에서는 스마트 콘트랙트 개념에 충격을 받은 게 역력한 자조적인 글들이 올라왔다. 직업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코더(프로그래머)에게 법을 가르치는 게 빠르고 효율적일까, 아니면 변호사들에게 코딩을 가르치는 게 더 효율적일까’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2018년에서 2019년까지 전개되고 있는 암호화폐의 겨울은 무엇보다 스마트 콘트랙트에 대한 현실 인식과 그에 따라온 대중의 실망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차례 신중하지 못한 발언을 쏟아내던 부테린 창립자는 2018년 가을 ‘블록체인은 한동안 디지털 세계에 머물러야 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스마트 콘트랙트는 부테린 창립자가 만든 개념이 아니다. 법원의 도움 없이 집행되는 계약에 대한 생각은 서구문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스마트 콘트랙트라는 용어도 인터넷 시대에 접어든 1990년대 중반에 이미 나왔다. 비트코인도 스마트 콘트랙트의 난제인 무신용 결제를 지원하는 도구로 발명됐다. 그렇다면 블록체인을 활용하면 무신용 결제만이 아니라 좀 더 복잡한 계약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에 겁 없는 10대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는 코드 자체만으로는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플랫폼, 즉 이더리움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다만 계약이라는 인간 행위가 복잡한 ‘고맥락 소통’에 해당하며 이를 다루는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천재적인 재능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연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함정이었다. 어린 천재 프로그래머가 스마트 콘트랙트를 가능하게 하는 플랫폼이라고 선언했을 때 천재는 아니지만 인문학적 교양과 현장 감각을 쌓은 어른들이 그 한계를 지적해 줬어야 했다. 인간들이 행하는 계약은 가장 단순한 형태라고 하더라도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바둑보다 훨씬 복잡하기 마련이란 것을 어른이라면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토머스 셀링의 ‘맹약의 어려움’ 모형은 스마트 콘트랙트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한 여성이 납치돼 인질이 됐다. 범인은 초범이라 범행을 후회하고 있다. 인질을 풀어주고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하고 싶다. 하지만 여성은 인질범에 대해 이미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사는 곳과 말투, 연령대 그리고 피자 배달을 시키면서 카드를 사용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풀어주면 침묵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지만 인질범은 여자의 맹세를 믿을 수 없다.

인질범은 여자의 맹세를 믿지 않는 게 합리적이므로 이 사건은 비극으로 치달을 운명이다. 인질과 인질범 모두에게 좋은 합의점이 나오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약속에 묶을 수 있어야 하고 풀 수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간단히 생각하면 이더리움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엄청난 액수의 코인을 담은 지갑을 만든다. 누구의 코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코인이 누구의 것이 되는지가 핵심이다. 인질범이 감옥에 들어가면 그 지갑은 자동적으로 인질범만 열 수 있는 비밀 지갑에 들어간다. 만약 일정 기간 동안 인질범이 투옥되지 않는다면 그 지갑은 자동으로 인질이었던 여성의 것이 된다. 감옥은 특수한 곳이므로 감옥에 들어가는 신호만 찾는다면 이더리움은 이 계약을 작동시킬 수 있다. 인질과 인질범은 맹세를 지키는 쪽이 이익을 본다는 것을 인지하므로 인질범은 인질을 풀어준다.

하지만 부테린 창립자가 블록체인이 디지털에 머물러야 한다고 뒤늦게 고백한 이유는 감옥에 갇히는 신호를 정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 만큼 성숙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이 온라인 세계에서 발생하는 게임이라면 이 계약은 양측이 의도한 대로 작동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여성은 법원의 도움을 받아 인질범을 가두고도 감옥에 갇힌 신호를 차단할 수 있으며 여성이 약속을 지킨 덕에 자유를 누리고 있는 인질범도 감옥에 갇혔다는 거짓 신호를 만들어 이익을 취할 수 있다. 결국 이런 분쟁이 발생하면 법원이나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상대의 기만을 응징해야 한다.

권위 있는 중재자의 도움, 더 나아가 사람의 개입 없이 이행되는 이상적인 스마트 콘트랙트는 실현 불가능하다. 가능하다면 그건 매우 특수한 경우이며 그마저도 이상을 조금씩 포기할 때다. 그래서 법원과 변호사들은 안심해도 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블록체인이 불러일으킨 스마트 콘트랙트에 대한 열정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더리움이 스마트 콘트랙트를 가능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이더리움에 자극받은 글로벌 기업들이 ‘맹약의 어려움’을 부분적으로 보완하는 생태계를 구축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블록체인 기반의 스마트 콘트랙트를 계약의 하나로 인정한다는 입법이 미국의 여러 주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도 스마트 콘트랙트의 이상에서 보면 견디기 어려운 모순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머지않은 미래에 인류는 산업화된 스마트 콘트랙트를 활용하면서 그것이 스마트 콘트랙트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돋보기] 스마트 콘트랙트와 데이터 정량화의 난제

석유 수입업자가 계약을 체결하려면 무게와 등급이 중요한 조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간단한 계약을 자동으로 이행하려면 엄청난 분량의 조건들이 코드로 삽입돼야 한다. 즉 양 당사자가 모두 동의하는 명백한 계약을 만들려면 모든 맥락이 표현돼야 할 뿐만 아니라 수치화돼야 한다.

스마트 콘트랙트가 현실화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데이터의 정량화 문제다. 시인들은 모든 것이 수치화되는 시대에 대해 유감을 표하곤 하지만 근대화는 정량화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반드시 정량화돼야 하는 주식회사의 기업 가치라는 화폐적 수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별 의미가 없는 경우가 흔하다.

사과 하나에 사과 하나를 더하면 사과 두 개지만 사과 한 개에 오렌지 한 개를 더하면 수치로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사과 두 개마저 물류 시스템에서는 복잡한 개념이다. 사과의 무게와 상태, 품종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물도 다른 사물과 정량적으로 비교되기 어려울 만큼 질적인 개별성을 갖지만 정량화는 질이 같다고 전제할 때 가능하다. 사람이라면 표현되지 않은 맥락도 고려할 수 있지만 컴퓨터 코드는 해석의 여지없이 모두 표현해 넣어줘야만 분쟁의 소지를 남기지 않는 계약을 집행할 수 있다.



글=오태민 마이지놈박스 블록체인 연구소장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1호(2019.04.22 ~ 2019.04.28)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