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배터리 셀 아닌 보호 시스템 등 문제로 판명

-8월부터 ‘안전인증제’ 시행
다시 기지개 켜는 ESS업계…화재 원인 조사 일단락
[한경비즈니스=최은석 기자] 에너지 저장 장치(ESS) 화재와 관련해 배터리 제조사 등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정부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배터리업계가 한숨을 돌리게 됐다. 하지만 정부가 안전 강화 대책을 내놓으면서 전력 변환 장치(PCS) 제조사 등의 타격이 불가피해졌다는 우려도 나온다.

ESS는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력을 배터리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설비다. 2017년 8월 2일 전북 고창 바닷가의 컨테이너에 설치된 ESS가 처음 폭발한 이후 지난 5월까지 총 23건의 화재가 이어졌다.
다시 기지개 켜는 ESS업계…화재 원인 조사 일단락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12월 27일 학계·연구소·시험인증기관 등 전문가 19명으로 구성된 ‘민·관 합동 ESS 화재 사고 원인조사위원회’를 꾸리고 원인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위는 전체 ESS 화재를 유형화한 뒤 분석했다. 한국산업기술시험원 등 9개 공공기관의 전문 인력 90여 명도 76개의 실증 작업을 별도로 벌였다. 조사위는 정부세종청사에서 6월 11일 그간의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다시 기지개 켜는 ESS업계…화재 원인 조사 일단락
◆“배터리 결함, 화재의 직접 원인 아냐”

조사위는 이날 배터리 셀 결함이 화재의 직접적 원인은 아닌 것으로 조사됐다고 발표했다. 대신 ‘전기적 충격에 대한 배터리 보호 시스템 부재’, ‘부품 간 통합 관리 체계 부재’, ‘수분·먼지 등에 대한 운영 관리 미흡’, ‘설치 시 결선 등에 대한 부주의’ 등 네 가지를 화재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들 원인 중 조사위가 공개한 가장 주요한 화재 이유는 배터리 보호 시스템의 부재다. 전류와 전압이 한꺼번에 흐르는 전기 충격이 가해졌을 때 배터리 보호 체계(랙 퓨즈)가 단락 전류를 차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절연 성능이 저하된 직류 접촉기가 폭발하면 순식간에 불이 붙을 수 있다는 게 조사위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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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관리 체계의 부재도 화재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제조사가 각기 다른 배터리관리장치(BMS)·에너지관리장치(EMS)·전력변환장치(PCS) 등을 유기적으로 운영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최초 불꽃이 튀었을 때 전체 시스템으로 불이 확산하는 것을 막기 어려웠다는 분석이다.

부실한 운영 관리도 문제가 됐다. 산과 바닷가에 설치된 ESS는 큰 일교차에 따른 결로와 먼지 등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이었지만 상주 관리인을 두는 곳이 거의 없었다. ESS 설비 내부의 전선을 잘못 잇는 등 설치 과정의 오·결선도 화재 원인으로 지목됐다.

조사위는 화재 원인으로 추정된 특정 배터리 업체의 셀 결함 의혹에 대해 “일부 셀에서 결함이 발견됐지만 이를 모사한 시험에서 배터리 자체 발화로 이어지지 않아 개별 업체에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조사위 관계자는 “국내산 배터리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80%에 달하는 가운데 화재가 유독 국내에서만 발생한 것은 배터리 셀이 아닌 보호 시스템 등에 문제가 있었다는 게 조사위의 결론”이라고 강조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화재 원인을 토대로 안전조치를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화재 재발 방지 대책도 내놓았다. 먼저 ESS용 대용량 배터리와 PCS를 안전 관리 의무 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ESS용 배터리 등은 오는 8월부터 정부의 ‘안전 인증’을 받아야 한다.

설치 기준도 새로 마련됐다. 건물 안에 ESS를 설치할 때는 용량이 총 600kWh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야외에 설치할 때는 화재 발생 시 주변 확산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별도 전용 건물 안에 두도록 했다.

배터리 보호 시스템 등에 대한 규정도 정했다. 누전 차단 장치, 과전압 보호 장치, 과전류 보호 장치 등 전기적 충격에 대한 배터리 보호 장치 설치를 의무화했다. 과전압·과전류에 따른 온도 상승 등 이상 징후가 탐지되면 비상 정지되는 시스템도 갖추도록 했다. 또한 사고 시 원인 규명을 위해 배터리 상태 등 ESS 운전 기록을 안전한 곳에 별도로 보관하도록 규정했다.

ESS에 대한 법정 점검 주기도 기존 4년에서 1~2년으로 단축한다. 화재 발생 시 즉시 진압할 수 있는 특수 소화약제를 비치하는 등 ESS 설비를 특정 소방 대상물로 지정한다.

기존 사업장은 새 안전 기준을 100% 소급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 방화벽 설치, 이격 거리 확보 등 추가 조치를 적용한 뒤 재가동하도록 했다. 가동 중단 권고에 따라 경제적 피해를 본 사업장에는 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가중치를 6개월 연장하는 등 보상해 줄 방침이다.

◆“기준 강화에 따른 수익성 악화” 목소리도

ESS업계는 정부의 발표로 하반기부터 사업을 재개할 수 있게 됐다.

ESS 관련 업계는 배터리 제조사인 삼성SDI와 LG화학을 비롯해 PCS 제조사(효성중공업·LS산전), 시공사(KT·LG CNS) 등으로 분류된다. 전기공사를 담당하는 영세 업체까지 합하면 관련 업체가 200여 곳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ESS 시장은 ‘탈원전 선언’ 이후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을 위한 정부의 지원 정책을 통해 2017년부터 급격히 확대됐다. 2016년 207MWh였던 ESS 설치 용량(신규 기준)은 2017년 723MWh, 지난해 3632MWh로 급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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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업계는 지난해 말 화재 원인 조사가 시작된 이후 신규 발주가 ‘올스톱’되면서 어려움을 겪어 왔다. 하지만 정부의 이번 발표로 시름을 다소 덜게 됐다. 당장 배터리 제조사들은 올 상반기 공장 가동 중단에 따른 충당금과 매출 감소에 따른 실적 악화를 하반기부터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장정훈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정부의 이번 발표로 시장의 불확실성이 해소되면서 지난해 글로벌 ESS 시장 출하 1, 2위를 기록한 삼성SDI와 LG화학은 당장 하반기부터 국내 수주 물량의 회복과 함께 전반적인 실적 개선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박강호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삼성SDI의 올 하반기 글로벌 ESS 매출은 5818억원으로, 화재 조사로 주춤했던 상반기(3496억원) 대비 66% 증가할 전망”이라며 “국내에서의 우려가 해소된 만큼 수출 물량도 큰 폭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백영찬 KB증권 애널리스트는 “LG화학의 지난해 ESS 매출은 8500억원으로 이 중 국내 매출이 약 3000억원을 차지했지만 올 상반기에는 국내 매출액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하반기에는 관련 국내 매출이 정상화함과 동시에 올 1분기 반영된 ESS 화재 관련 충당금 약 1100억원에 대한 일부 환입도 가능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다만 ESS업계 전반에서 정부의 안전 강화 대책에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각종 인증 절차와 설치 기준 강화가 전반적인 비용 증가로 연결돼 수익성이 나빠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업계 관계자는 “새로운 산업이 안착하는 과정에서 안전 기준 등을 강화하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정부가 화재 원인을 사업장과 시공사, PCS 제조사의 관리 부실 등으로만 결론 내린 점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다시 기지개 켜는 ESS업계…화재 원인 조사 일단락
choies@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0호(2019.06.24 ~ 2019.06.3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