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겉도는 퇴직연금 200조]
-‘기금형 퇴직연금’ 법안 자동 폐기 위기
-‘디폴트 옵션’ 도입도 첩첩산중 [한경비즈니스=최은석 기자] 최근 정기 예·적금보다 낮은 연 1%대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개선하기 위해 ‘디폴트 옵션’과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제도가 시행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국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대 국회 처리 여부 불투명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172조1000억원이다. 이 중 노동자가 근속 기간 매월 급여의 일정 비율(8.33%)로 납입한 연금을 직접 금융회사(퇴직연금 사업자)에 맡겨 운용하고 그 성과에 따라 연금액을 수령하는 ‘확정 기여형(DC형)’이 46조4000억원(26.9%)을 차지한다.
하지만 DC형 가입자의 91.4%는 상품 가입 후 적립금에 대한 운용 지시 변경을 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다. 디폴트 옵션과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추진하는 배경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퇴직연금을 특정 연금 사업자에게 모두 맡기는 대신 전문 위탁 기관과 계약해 운용하는 방식이다.
사업장 내 노사·전문가로 구성된 별도의 기금운용위원회(수탁 법인 이사회)를 설립해 투자를 결정하도록 하는 제도다. 매년 성과를 평가하고 같은 업종 내 사업장끼리 연합하면 연금기금처럼 ‘큰손’이 되는 만큼 운용사 간 수익률 경쟁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게 도입 취지다.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법안은 정부 입법으로 지난해 4월 발의됐다. 하지만 이 법안은 20대 마지막 정기국회가 열리고 있는 지금까지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내년 2월 임시국회 때까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면 해당 법안은 내년 5월 20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된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장은 “국회에서도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 등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주52시간 근무제 확대 등 노동계의 더 큰 이슈들이 퇴직연금 관련 논의를 가로막고 있어 진척이 더딘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안으로 제시되는 디폴트 옵션 도입도 ‘산 넘어 산’이다.
디폴트 옵션은 더불어민주당 내 자본시장특별위원회가 주도한 제도다. 퇴직연금 운용에 관심이 없거나 바쁜 노동자가 일정 기간 적립금을 방치할 때 금융사가 가입자 성향에 맞춰 알아서 운용에 개입해 적립금을 굴려주는 형태다.
DC형 퇴직연금 가입자가 사실상 운용을 방치해 정기예금 금리보다 못한 연 1% 안팎의 수익률에 허덕이는 현실을 바꿔 보자는 게 취지였다.
금융 투자업계에서는 디폴트 옵션을 도입하면 중·장기적으로 연 3~6%포인트의 수익률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가 미국과 호주 사례를 통해 디폴트 옵션 도입 유무에 따른 수익률을 단순 계산한 결과 연 6.4%포인트 차이가 났다. 디폴트 옵션이 정착된 호주의 최근 5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9%에 달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디폴트 옵션 도입으로 퇴직금 원금에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노동계의 우려를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여당 특위안에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고용부는 여당 특위안 대신 노사 합의로 원금이 보장되는 ‘확정 급여형(DB형)’ 퇴직연금을 디폴트 옵션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에 대해 금융 투자업계에서는 정부 안대로라면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게 없다고 본다. 퇴직연금에 가입한 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예금으로 자동 운용되는 현재와 다를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은 디폴트 옵션으로 ‘생애 주기형 펀드(TDF)’, ‘자산 균형 펀드(BF)’, ‘맞춤형 자산 관리(MA)’, ‘채권 투자형(CPF)’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이 중 주식형을 선택하는 비율이 60%에 달한다.
호주는 디폴트 옵션을 주식 혼합형 상품으로 통합 운용 중이다. 회사가 노동자 임금의 9%를 적립하고 노동자는 이를 원하는 펀드에 투자해 은퇴할 때까지 운용하도록 하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퇴직연금 수익률이 낮은 가장 큰 원인은 DB형에 투자하는 비율이 여전히 높은 데 있다”며 “수익률을 끌어올리려면 DC형에 디폴트 옵션을 도입하는 방안이 필수”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수익률 연동 수수료’ 팔 걷어
한편 매년 커지고 있는 퇴직연금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금융사들의 자구책 도입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은행과 은행 계열 금융그룹을 중심으로 이른바 ‘수익률 연동 수수료’ 도입 경쟁이 한창이다.
신한금융그룹은 지난 6월 개인형 퇴직연금(IRP) 수수료를 최대 70% 인하하는 등 퇴직연금 수수료 체계를 전면 개편했다. 가입자 계좌에서 수익이 나지 않으면 1년 단위로 해당 연도 운용·자산관리 수수료를 면제해 준다.
하나금융그룹도 같은 달 사회 초년생(만 19~34세)에게 수수료를 70% 감면해 주는 방안을 발표했다. 퇴직연금을 만 55세 이후 연금으로 수령하면 수수료를 최대 80%까지 아낄 수 있다. NH농협은행도 지난 7월부터 사회적 기업 노동자의 수수료를 깎아 주고 있다.
우리은행도 지난 10월 7일부터 사회적 기업, 사회복지 법인, 아이돌봄 서비스, 어린이집, 유치원 등의 법인을 대상으로 퇴직연금 수수료를 최대 50% 감면해 주고 있다. 사회 초년생과 연금 수령자 등 개인 고객 수수료도 최대 70% 인하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고령화와 저금리·저성장의 영향으로 퇴직연금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며 “금융사들이 퇴직연금 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저마다 수익률 개선 방안을 내놓는 등 관련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용어 설명]
▶기금형 퇴직연금
퇴직연금을 특정 연금 사업자에게 모두 맡기는 대신 전문 위탁 기관과 계약하고 운용하는 방식이다. 노·사·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기금운용위원회에서 퇴직연금 운용 방향 등을 결정한다.
▶디폴트 옵션
퇴직연금 가입자가 일정 기간 별도 지시를 하지 않아도 사업자가 퇴직연금 자산을 알아서 굴려주는 제도다. 안정형·중립형·공격형 등 퇴직연금 사업자가 마련한 투자 상품 가운데 노사가 미리 결정한 방법으로 운용한다.
▶수익률 연동 수수료
퇴직연금 사업자가 가입자 계좌에서 수익이 나지 않으면 1년 단위로 해당 연도 운용·자산 관리 수수료를 면제해 주는 방안이다.
choie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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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48호(2019.10.28 ~ 2019.11.0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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