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기생충 열풍’의 숨은 주역, CJ] - ‘한국의 식품회사’에서 ‘글로벌 문화 기업’으로 탈바꿈
[한경비즈니스=이현주 기자] “영화 ‘기생충’은 전 세계에 한국 영화의 위상과 가치를 알리고 문화로 국격을 높였다. ‘기생충’과 같이 최고로 잘 만들면 세계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
‘문화 보국’의 꿈…K컬처 열풍 주도한 이재현 CJ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지난해 7월 CJ ENM 업무 보고에서 ‘기생충’에 대해 남다른 소회를 밝혔다. 이 회장은 “국격을 높인 영화”라고 치켜세우며 “지난 25년간의 투자가 헛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생충’은 100년의 역사를 맞이한 한국 영화계뿐만 아니라 1995년 영화를 시작으로 문화 사업에 뛰어든 CJ에도 상징적인 작품이 됐다. CJ가 20년 넘게 적자를 감수하면서 영화 투자를 지속해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회장의 ‘문화 보국’ 꿈이 있다.

드림웍스 투자에서 시작된 ‘문화의 산업화’
1995년 3월 이 회장(당시 제일제당 상무)은 누나인 이미경 CJ 부회장(당시 이사)과 함께 로스앤젤레스(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스티븐 스필버그, 월트디즈니 만화 영화를 총지휘했던 제프리 카젠버그, 음반업계의 거장 데이비드 게펜이 함께 만든 ‘드림웍스SKG’의 투자 계약을 성사시키러 떠난 길이었다.

“이제는 문화야. 그게 우리의 미래야. 단순히 영화 유통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멀티플렉스도 짓고 영화도 직접 만들고 음악도 하고 케이블 채널도 만들 거야. 아시아의 할리우드가 되자는 거지.”

할리우드의 거물들과 협상을 앞두고 이 회장은 누나 이 부회장에게 ‘문화의 산업화’라는 자신의 꿈을 펼쳐 놓았다. 당시 CJ는 삼성그룹에서 분리된 직후였다. 30대의 젊은 경영인이었던 이 회장은 전통적인 내수 식품 회사인 제일제당을 토대로 사업 다각화를 구상했고 식품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문화 사업에서 답을 찾았다.

드림웍스 투자는 이후 CJ그룹이 식품 회사라는 오랜 틀을 벗어던지고 글로벌 문화 기업으로 탈바꿈하는 초석이 됐다. CJ는 제일제당 연간 매출의 20%가 넘는 규모의 3억 달러(약 3564억원)를 미국 제작사 드림웍스 설립에 투자했다. 대주주로서 배당금 외에 아시아 지역의 판권을 보유하는 조건이었다. 경영진의 반대는 거셌다. 하지만 이 회장은 ‘문화가 미래’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밀어붙였다. 그 이후 CJ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만 7조5000억원 이상을 투자해 왔다.

한국 영화 산업 역사에서 국내 대기업들이 영상 사업에 뛰어든 시점은 1980년대 말부터다. 1990년대 들어 한국 영화 제작과 극장 대관 사업을 시작했다. CJ는 후발 주자로 시작해 1997년 외환 위기 시절 대기업 영상 사업이 하나둘 해체되는 틈새를 치고 나갔다. 영화뿐만 아니라 방송·음악 등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문화 선두 기업이 되기에 이른다.

영화로 문화 사업을 시작한 CJ는 특히 1997년 ‘인샬라’ 이후 지금까지 300편이 넘는 한국 영화에 투자해 왔다. 국내에는 생소하던 ‘투자 배급사’로 역할을 새롭게 다지며 한국 영화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얻는다. 한국 영화계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형 프로젝트에도 과감히 투자했다.

CJ는 드림웍스를 통해 콘텐츠 제작과 유통 역량을 키운 뒤 궁극적으로 우리 정서에 맞는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겠다는 꿈, 멀티플렉스를 통해 영화 관람 문화를 바꾸겠다는 꿈, 문화 상품을 앞세워 세계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꿈을 향해 한 발짝씩 발걸음을 내디뎠다.

무엇보다 400억원의 제작비가 들어갔던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기획 단계부터 전 세계 상영을 염두에 둔 작품으로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알려진다. CJ의 전격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시도조차 어려웠을 글로벌 프로젝트였다.

국내 영화 산업 관계자는 “CJ가 1995년 영화 사업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장르, 신선한 소재의 한국 영화에 꾸준히 투자하면서 질적·양적 성장에 기여해 왔다”고 분석했다.

실패의 경험이 쌓여 더욱 값진 ‘기생충 매직’
CJ의 문화 사업은 항상 순탄치만은 않았다. CJ가 문화 사업에 뛰어든 시기에 외환 위기가 찾아왔고 국가적 위기 속에 기업이 적자 내는 사업을 이어 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영화 사업에 진출했던 삼성과 대우가 모두 철수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CJ의 계속된 투자에도 성과는 더뎠다. 각 부문이 CJ E&M으로 통합된 2011년 이후 실적을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2013년은 영업이익률이 3.4%로 매우 낮은 편이다. 음악 사업 부문은 1500억원의 손실을 봤다. 게임 사업 부문이 넷마블로 분할된 2014년에는 아예 적자로 돌아섰다. 방송·영화·음악 등의 콘텐츠 부문은 문화 사업에 첫발을 디딘 1995년부터 2014년까지 약 20년간 적자를 면하지 못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장이 문화 사업에 강한 집념을 보이는 이유는 할아버지인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평소 가르침 때문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은 앞서 언급한 CJ ENM 업무 보고 자리에서 “‘문화가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선대 회장님의 철학에 따라 국격을 높이기 위해 20여 년간 어려움 속에서도 문화 산업에 투자했다”며 “한국 젊은이들의 끼와 열정을 믿고 선택했던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쌓인 역량이 오늘날 CJ ENM의 콘텐츠가 사랑받을 수 있게 된 자양분이 됐다. 방송 부문에선 ‘응답하라 1998’, ‘도깨비’, ‘삼시세끼’ 등 대표 콘텐츠들이 연이어 탄생하기 시작했다. 1760만 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명량’은 개봉 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영화 관객 수 순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CJ그룹 관계자는 “문화 산업이 미래의 한국을 이끌 것으로 예견하며 25년간 문화 사업에 지속 투자해 온 이재현 회장의 의지가 K컬처 열풍의 토대가 됐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CJ의 최종 지향점은 글로벌 넘버원 생활 문화 기업”이라고 자주 말해 왔다. 이병철 창업자에서부터 내려온 ‘사업보국’은 CJ의 첫째 창업 이념이다. 이병철 창업자의 ‘사업보국’은 전쟁 후 폐허에서 국가 경제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재현 회장의 ‘사업보국’은 첨예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문화를 통해 전 세계인에게 한국을 심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 경제를 이끌고 더 나아가 국격을 높인다는 의미다.

CJ의 문화 사업 비전은 처음부터 ‘글로벌’을 향해 있었다. 이 회장은 “세계인이 매년 2~3편의 한국 영화를 보고 매월 1~2번 한국 음식을 먹고 매주 1~2편의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매일 1~2곡의 한국 음악을 들으며 일상생활 속에서 한국 문화를 즐기게 하는 것이 CJ의 목표”라고 문화 사업에 대한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기생충’을 계기로 CJ는 그 꿈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됐다. 김익상 서일대 영화학과 교수는 “CJ 문화 사업의 빛과 그림자가 있지만 특히 ‘스튜디오형 제작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고 ‘영화 산업의 판’을 키운 것에 대해서는 박수 칠 만하다”며 “이는 막강한 오너십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실패도 많았지만 ‘기생충’이 이번에 오스카상을 수상한다면 일거에 만회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 보국’의 꿈…K컬처 열풍 주도한 이재현 CJ그룹 회장

[돋보기]
젊은 창작자들의 산실 CJ 문화재단

CJ그룹은 문화 콘텐츠 산업을 선도하는 기업답게 사회 공헌 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특히 문화예술 분야의 역량 있는 신인을 발굴해 한류 기반의 문화 산업 발전에 기여한다는 목표 아래 전문 창작자를 발굴, 육성하고 있다.

CJ문화재단은 2006년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설립한 재단이다. 이 회장은 평소 “젊은 신인 예술인들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대한민국 문화 콘텐츠의 기반을 다지고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창작 콘텐츠가 한류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CJ문화재단은 2009년 ‘CJ아지트 광흥창’을 개관하며 대중문화 신인 창작자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이어 2010년부터 튠업·스테이지업·스토리업 등 본격적인 창작자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점차 규모를 확대해 2017년부터 매년 약 50억~60억원을 신인 창작자 지원에 투자하고 있다.

신인 뮤지션 지원 프로그램 ‘튠업’은 온·오프라인 심사를 거쳐 선정된 신인들에게 음반 제작비와 홍보 마케팅을 지원하고 국내외 뮤직 페스티벌에 개설되는 튠업스테이지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 지난해까지 멜로망스·아이엠낫·아도이·카더가든·술탄오브더디스코·로큰롤라디오·아시안체어샷·죠지 등 50팀 139명의 뮤지션을 발굴해 46개의 정규 음반 제작을 지원했다. 2017년부터는 매년 튠업 뮤지션 한 팀 이상을 선정해 1500석 이상 규모의 대형 공연도 개최하고 있다.

‘스테이지업’은 뮤지컬 부문 신인 창작자를 선발해 창작 지원금, 전문가 멘토링 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105명의 신인 창작자와 58개 작품 개발을 지원해 왔다.

영화 부문 지원 프로그램 ‘스토리업’은 2010년부터 영화 스토리텔러들의 장편 영화 시나리오 집필을 돕다가 2018년부터 청년 감독들의 단편 영화 제작을 지원하고 있다. 제2·제3의 봉준호 감독이 지속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영화 창작 생태계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의지다.



[‘기생충 열풍’의 숨은 주역, CJ 커버스토리 기사 인덱스]
-영화 '기생충', 아카데미 역사에 이변을 쓰다
-할리우드 정복한 영화 ‘기생충’…25년 CJ 문화 사업 ‘결실’
-‘문화 보국’의 꿈…K컬처 열풍 주도한 이재현 CJ그룹 회장
-2009년부터 해외 직배·현지 제작…할리우드에서도 주도권
-넷플릭스도 탐내는 ‘콘텐츠 경쟁력’…프랑스판 ‘꽃할배’, 태국판 ‘너목보’ 인기몰이
-100만 한류 팬 열광시킨 ‘케이콘’…관람객 67%가 미래 소비층 ‘Z세대’
-‘디즈니에서 애플·넷플릭스까지’…불붙은 글로벌 문화 콘텐츠 전쟁
charis@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62호(2020.02.03 ~ 2020.02.09)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