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등 3040 정상, 10대 때 밑바닥에서부터 정치 자생력 키워
‘꽃가마 태우기식’ 한국과 달라
[한경비즈니스 = 홍영식 대기자] 정치권이 ‘40대 기수론’을 놓고 시끄럽다. 김종인 전 미래통합당 총선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1970년대에 출생하고 비전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국가적 지도자로 부상했으면 한다”면서 야권 유력 대선 주자로 꼽히는 홍준표 무소속 당선자와 유승민 통합당 의원,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등에 대해선 “지난 대선에서 검증이 다 끝났다”고 한 게 발단이 됐다.
김 전 위원장의 ‘1970년대생 경제 전문가’가 누구를 염두에 둔 발언인지를 놓고 정치권에선 뒷말이 무성했다. 김세연(1972년생) 통합당 의원과 홍정욱(1970년생) 전 한나라당 의원 등이 그 대상으로 지목되면서 정치권을 달궜다.
40대 기수론은 총선에서 압승한 더불어민주당보다 참패한 통합당 내에서 회자되고 있다. 통합당이 시대 변화와 흐름을 읽지 못해 유권자들의 외면을 받은 게 참패 원인이고 이 때문에 세대교체를 통해 노후한 당 이미지를 쇄신하는 등 판을 바꾸지 않고서는 2년 뒤 대선도 가망이 없을 것이라는 게 40대 기수론이 대두되는 배경이다. 하태경 통합당 의원은 “한 언론사 여론 조사에서 국민의 74%가 통합당에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답했다”며 “우리 당은 과감한 쇄신과 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 ‘40대 기수론’에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최근 여론 조사를 보면 30~40대의 통합당에 대한 부정적인 기류가 뚜렷하다는 점도 40대 기수론에 힘을 싣고 있다. 한국갤럽이 4월 28~29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정당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95% 신뢰 수준에 표본 오차 ±3.1%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에 따르면 30~40대의 통합당 지지율은 각각 12%에 불과했다. 통합당의 전체 지지율 19%보다 7%포인트 낮았다.
◆“통합당, 시대 변화 능동 대처 위해 세대교체 필요”
시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논란이 되는 것은 차기 대선에 내세울 만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준비된 후보가 있느냐는 것이다. 일각에선 김 전 위원장이 그렇게 말한 배경에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다른 정치인도 아닌 대선 주자라면 자생력을 갖춰 경쟁에서 이겨 능력을 입증하는 게 중요한데 ‘꽃가마’를 태워와 인큐베이터에서 길러진 주자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세대교체 대상으로 거론된 홍 당선자는 “대선 주자는 밑바닥부터 올라가야 한다. 정치판은 스스로 크는 것”이라며 “대한민국을 이끌 만한 능력과 자질이 되는지 살펴보는 게 우선인데 30대, 40대가 그만한 정치적 역량이 있는 세대는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또 “40대를 내세워 개혁으로 포장하고 결국은 본인(김 전 위원장)이 해먹겠다는 것”이라며 “노욕이고 어처구니없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김영우 통합당 의원도 “차기 나라의 지도자는 경제 전문가여야 하고 40대여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며 “한국에 필요한 지도자는 진영과 세력의 보스가 아니라 실력과 인격을 갖춘 정치 전문가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해진 통합당 당선자는 “(김 전 위원장의 머릿속에) 누군가 있다는 이야기”라고 했다. ‘4·15 총선’에서 서울 광진갑에 출마해 낙선한 김병민(38) 통합당 후보는 언론 인터뷰에서 “판을 바꾸기 위해서는 확실한 혁신이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김 전 위원장의 40대 기수론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라면서도 “나이가 젊다는 이유만으로 앞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젊은 정치인 스스로 어떤 정치를 펴야 할지 처절하게 고민부터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는 쪽은 수년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세대교체 바람을 꼽는다. 유럽이 두드러졌다. 48개국 가운데 절반 가까운 23개국 정상이 3040세대다. 2017년 39세에 국가 정상이 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해 초 세계 최연소 정부 수반이 된 세바스티안 쿠르츠(34) 오스트리아 총리, 산나 마린(35) 핀란드 총리, 페드로 산체스(48) 스페인 총리, 소피 윌메스(45) 벨기에 총리, 메테 프레데릭센(43) 덴마크 총리, 리오 버라드커(41) 아일랜드 총리, 자비에 베텔(47) 룩셈부르크 총리, 카트린 야콥스도티르(46) 아이슬란드 총리, 유리 라타스(42) 에스토니아 총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2) 우크라이나 대통령 등이다.
유럽 외에도 3040세대 정상이 많다. 쥐스탱 트뤼도(49) 캐나다 총리, 저신다 아던(40) 뉴질랜드 총리, 나입 부켈레(39) 엘살바도르 대통령, 카를로스 알바라도(40) 코스타리카 대통령, 아프리카의 젊은 지도자로 떠오른 아비 아흐메드(44) 에티오피아 총리 등이 있다.
◆“젊은 정상들, 스스로 ‘깃발’ 들고 검증 받은 준비된 리더” 그러나 이들 정상들과 한국의 정치 상황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도 적지 않다. 유럽 등 외국의 3040 정부 수반들은 대부분 10~20대부터 정당에 가입해 밑바닥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지방 의원에서 출발해 경력을 쌓은 뒤 중앙 정치 무대에 데뷔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다. 남이 아닌 자기 스스로 ‘깃발’을 들고 능력을 검증 받은 뒤 지도자로 성장해 나갔다는 것이다. 나이는 30~40대이지만 정치 경력이 20년 안팎인 ‘준비된 리더’들이다.
20대 초반에 정당 활동을 시작한 마린 핀란드 총리는 시의원과 시의회 의장 등을 거쳐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도 20대 초반에 국민당 청년조직 대표를 시작으로 빈 시의회 의원을 지낸 뒤 27세에 외교부 장관에 발탁됐다. 베텔 룩셈부르크 총리는 26세에 지방 의원에 당선돼 정치 경험을 차곡차곡 쌓은 뒤 38세에 룩셈부르크 시장, 40세에 당 대표를 거쳐 정부 수반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 내에서 김영삼·김대중·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를 기치로 내세우며 바람을 일으켰다. 신민당 당수였던 유진산이 ‘구상유취(口尙乳臭 :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난다)’라고 폄훼했고 이 세 사람은 결국 대권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세대교체 열기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당시 40대 기수론이 바람을 몰고 온 것은 기존 정치인들이 아닌 세 사람 스스로 뚫은 정치적 개척의 결과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4세에 장택상 전 국무총리 비서로 정계에 발을 내디딘 뒤 차곡차곡 정치 경력을 쌓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5세에 청년 사업가로 이름을 올린 뒤 30세에 정계에 진출해 네 번째 도전 끝에 국회의원이 됐다. 그런 점에서 다른 정치인도 아닌 대권을 겨냥한다면 현재 통합당에서 제기되는 ‘꽃가마 태우기’, ‘인큐베이팅’ 식의 40대 기수론으론 안 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다만 청년 정치 지망생들이 정치권에 발을 디디기에는 높은 진입 장벽을 낮춰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선거에 임박해 스펙만 보고 청년 인재라는 이름으로 외부에서 수혈해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며 꽃길을 걷게 하는 식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밑바닥 정치부터 도전하는 길을 넓혀 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는 게 급선무라는 얘기다. 선거 기탁금을 낮추거나 없애는 등 돈 안 드는 정치 제도를 만들 필요도 있다. ysho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76호(2020.05.09 ~ 2020.05.1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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