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서영의 명품 이야기-루이 비통④]


12년간 매출 55배 늘리고 LVMH그룹 탄생…
잇단 경영권 다툼 패배, 패션 제국 무대에서 내려와
[명품 이야기]루이 비통, 재도약 이룬 사위 라카미에...아르노에게 경영권 뺏겨
[명품 이야기]루이 비통, 재도약 이룬 사위 라카미에...아르노에게 경영권 뺏겨
[한경비즈니스 칼럼=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루이 비통은 창업자의 손자 가스통 루이 비통이 1970년 사망한 뒤 성장세가 둔화됐다. 하지만 잠재력까지 둔화되지는 않았다. 루이 비통의 잠재력에 대한 연구를 실시한 결과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가스통 루이 비통의 아들들은 “회사를 다른 사람들 손에 넘길 수 없다”며 발 벗고 나섰다. 역할을 분담했다. 장남 앙리 루이는 파리 매장과 판매 총괄, 막내 클로드는 루이 비통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아니에르 공방과 제품 생산 라인을 관리했다.


그러다 루이 비통은 1977년부터 1989년 사이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1977년 1100만 유로(약 145억5000만원)에 불과하던 연매출이 1989년 6억 유로(약 7939억원)로 12년 만에 약 55배 늘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형제 간 역할을 분담하던 경영 방식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가스통 루이 비통의 딸 오딜 비통과 그의 남편, 즉 가스통 루이 비통의 사위인 앙리 라카미에가 메종(파리의 오트 쿠튀르 점포) 활성화의 주역으로 떠올랐고 가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다. 특히 라카미에는 루이 비통 경영의 중심축이 됐다. 아들들이 대를 이어 온 루이 비통의 전통에서 전문 경영인 시대를 연 것이다.
[명품 이야기]루이 비통, 재도약 이룬 사위 라카미에...아르노에게 경영권 뺏겨
[명품 이야기]루이 비통, 재도약 이룬 사위 라카미에...아르노에게 경영권 뺏겨
런던 매장, 오드리 헵번·조안 콜린스·상류층 몰려와


앙리 라카미에는 루이 비통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 ‘제2 창업자’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루이 비통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1912년 루이 비통의 고향인 프랑스 쥐라에서 태어난 그는 철강 회사를 차려 운영하면서 돈을 벌었다. 이미 자신만의 경영 방식을 갈고닦은 터에 1977년 65세에 처가 소유의 루이 비통 회장직에 올랐다. 그는 12년간 루이 비통을 이끌면서 두 곳에 불과하던 직영 매장을 140개로 늘렸다. 공장 현대화와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루이 비통을 세계적인 명품 그룹으로 변모시켰다.


철강 회사를 경영하며 국제적인 사업 마인드를 갖춘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취임하자마자 루이 비통의 세계 시장 진출을 적극 추진했다. 사장에 임명된 앙드레 사코도 라카미에와 함께 루이 비통의 재도약을 이끈 주역이다. 그는 라카미에를 도와 루이 비통이 국제 무대로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우선 일본을 루이 비통 글로벌화의 전진 기지로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면서 ‘이머징 마켓’으로 떠올랐고 세계적인 기업들이 몰려왔다. 라카미에와 사코는 1978년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 독점 매장을 열었다. 도쿄 번화가 긴자에도 루이 비통 메종이 들어섰다. 일본 내 매출이 증가하자 4년 후 일본 지사를 현지 법인으로 승격시켰다.


일본 진출 성공을 바탕으로 루이 비통은 1979년 홍콩·싱가포르·괌·인도네시아·태국·대만에도 진출했다. 1981년엔 세계적 경제와 소비 중심인 미국 뉴욕 57번가에 루이 비통의 간판을 걸었다. 샬룹그룹과 손잡고 중동 지역에도 손을 뻗었다. 패션 산업의 본거지인 파리 몽테뉴가 54번지에도 매장을 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루이 비통 매장이 없던 유럽 국가들에 잇따라 진출했다. 루이 비통은 한 단계 한 단계 세계를 지배해 나갔다.


영국 런던의 올드 본드 스트리트에 문을 연 매장은 당대 유명 연예인과 최상류층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서 이름을 날렸다.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로렌 바콜, 조안 콜린스 등이 단골손님이었다. 요르단의 누르 왕비, 브루나이의 술탄 등 왕족들도 이곳을 자주 이용했다.


1984년부터 11년 동안 런던 매장 부지점장을 지낸 존 데이비스는 “토요일 오후만 되면 올드 본드 스트리트에 포르쉐와 페라리가 범퍼까지 닿을 정도로 빽빽이 들어섰다”며 “이 차를 타고 온 손님들은 한 번에 2000~3000파운드(약 290만~432만원)어치의 물건을 사 갔다. 이들은 그다음 주 토요일에 또 매장을 찾았다”고 회상했다.


루이 비통은 이런 국제화 전략의 성공을 바탕으로 1984년 뉴욕 주식 시장에 상장했고 성장세는 더욱 가팔랐다. 루이 비통의 재도약 성공의 요인으로 강박 관념을 가질 정도의 품질에 대한 애착, 능동적인 홍보 전략, 오페라음악예술재단을 통한 창작 활동 지원을 비롯해 사회 공헌 강화와 적극적인 메세나(기업들의 문화 예술 지원) 활동 등이 꼽힌다.


1987년 모에 헤네시와 합병해 LVMH 탄생


1987년 루이 비통의 역사에 또 한 번의 계기가 찾아왔다. 라카미에는 루이비통과 주류 회사인 모에 헤네시의 합병을 성사시켰다. 이 합병으로 LVMH(루이 비통 모에 헤네시)그룹이 탄생했다. 1988년엔 지방시(Givenchy) 패션을 인수해 규모를 더 키웠다. 하지만 라카미에는 모에 헤네시 출신의 알랭 슈발리에 회장과의 경영권 다툼에서 밀려 합병 3년 뒤인 1990년 LVMH그룹 경영진에서 물러났다.


루이 비통 역사에서 이때 등장한 또 한 명의 인물이 베르나르 아르노다. 크리스찬 디올을 경영하던 그는 세계적 명품 제국의 꿈을 갖고 있었다. 그는 LVMH를 인수 대상으로 정하고 라카미에와 손잡고 은밀하게 지분을 매집했다. 아르노는 슈발리에 회장을 몰아내고 지분을 더 늘려 나갔다. 이후 동지였던 아르노와 라카미에는 LVMH그룹의 지배권을 놓고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였다. 프랑스 법원은 1990년 4월 아르노의 손을 들어주면서 78세의 라카미에는 LVMH 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에 따라 루이 비통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아르노가 LVMH그룹 회장에 오를 당시의 나이는 40세. 럭셔리 산업의 새 성장 모델을 갖추고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다국적 기업으로의 변혁을 예고한 것이다.
[명품 이야기]루이 비통, 재도약 이룬 사위 라카미에...아르노에게 경영권 뺏겨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8호(2020.12.21 ~ 2020.12.2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