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
불황기에 더욱 성장하는 ‘홋카이도 현상’, 코로나19 계기로 일본 시장 석권 중 [한경비즈니스 칼럼=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가구 전문점과 홈센터(생활용품·인테리어 전문 대형마트) 체인인 니토리홀딩스와 DCM홀딩스, 국과 조제약 전문 체인 쓰루하홀딩스와 아인홀딩스, 슈퍼마켓·편의점 체인 아쿠스와 세이코마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최고의 실적을 내는 일본 기업들의 공통점은 모두 홋카이도에서 태어난 유통 기업이라는 점이다.
이 기업들이 코로나19를 계기로 일본을 제패하는 상황에 ‘신(新)홋카이도 현상’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1998년 메릴린치 애널리스트 스즈키 다카유키(현 프리모리서치재팬 대표)가 소비 시장이 척박한 홋카이도에서 살아남은 소매 업체들이 불황기에 더욱 성장하는 기현상에 ‘홋카이도 현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게 시초다.
그는 “홋카이도에서 살아남은 소매 업체는 어디에서도 통한다”며 “홋카이도 현상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예언대로 20여 년 만에 홋카이도 기업은 모두 각 업종에서 일본 최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1998년 매출 348억 엔(약 3634억원), 영업이익 20억 엔이었던 니토리홀딩스는 올해 매출과 영업이익을 7026억 엔과 1329억 엔으로 예상하고 있다. 매출은 20배, 영업이익은 67배 늘었다.
“지옥에서 생존한 기업들”
홋카이도 기업들은 왜 강한가. 경제 전문 평론가 아리모리 다카시는 “지옥에서 생존한 기업들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일본 최북단 섬인 홋카이도는 유통업계의 불모지다. 남한만한 면적(8만3450㎢)에 인구는 부산과 대전을 합친 것보다 조금 많은 528만 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195만 명은 삿포로에 몰려 있다. 연평균 소득은 447만 엔으로 도쿄(620만 엔)의 3분의 2 수준이다.
구매력은 떨어지는데 물류비용은 갑절로 드는 홋카이도에서는 지금도 온라인으로 물건을 주문하면 추가 배송비를 물거나 배송 기간이 길어지는 일이 허다하다. 경제와 인구의 과도한 삿포로 집중과 지방 소멸, 기업 수 감소와 소득 하락 등 일본 지방의 고질병을 모두 앓고 있어 ‘일본의 종합 병동’으로도 불린다. ‘점보 여객기의 꼬리 날개’로도 불린다. 이륙(경기 호황)할 때는 가장 늦게 뜨고 착륙(경기 후퇴기)할 때는 가장 늦어 경기 부양의 수혜를 가장 받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홋카이도의 기업은 창업과 동시에 마른 수건도 쥐어짜는 초고효율 경영을 실현하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문제는 척박한 경영 환경 때문에 도쿄 같이 외주를 맡길 곳도 마땅하지 않다는 점이다.
세이코마트를 창업한 고(故) 아카오 아키히코 회장은 “외주를 맡길 수 없는 홋카이도 소매업자는 자력으로 고도의 상품 공급 조직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홋카이도에서 살아남은 유통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소비자가 요구하는 상품을 지체 없이 공급하는 조직을 갖추게 된 배경이다. DCM홀딩스는 1980년대 매장에서 팔린 양만큼의 상품을 자동으로 보충하는 재고 관리 시스템을 업계 최초로 도입했다. 니토리홀딩스는 의류업계의 패스트 패션(SPA) 방식을 채용해 ‘기획-제조-물류-판매’를 모두 자체 소화하는 일관 공정을 완성했다. 일본에서 로봇을 활용한 무인 물류 창고를 본격적으로 운영한 회사도 니토리홀딩스가 최초다. 제품의 기획 단계부터 생산까지 직접 주도하는 ‘홋카이도 스타일’을 확립한 덕분에 홋카이도 유통 기업들은 품질을 타협하지 않으면서 비용을 극한까지 낮출 수 있게 됐다.
위기를 미리 알아채고 대비하는 위기 탐지 능력도 거친 홋카이도에서 성장한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유전자(DNA)다. 코로나19로 많은 일본 제조 기업들이 중국 공장의 가동 중단으로 생산에 차질을 빚을 때 일찌감치 베트남 등으로 제조 거점을 분산한 니토리홀딩스는 주력 상품을 제때 생산할 수 있었다. 외출 제한으로 감소한 오프라인 점포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40% 늘어난 인터넷 판매로 만회했다. 지난해 주문용 서버의 처리 능력을 늘리고 물류 자회사인 홈로지스틱스를 설립해 온라인 판매에 대비한 덕분이었다. 2018년 강진으로 홋카이도 전역이 정전으로 고통 받았을 때 세이코마트는 대부분 영업을 계속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생활필수품을 공급했다. 자동차에서 전원을 공급받을 수 있는 비상용 전원 키트 설비를 매장에 갖춰 둔 덕분이었다.
홋카이도 1등 올라선 뒤 힘 길러 도쿄로
홋카이도 현상을 주도하는 기업의 성장 과정은 서로 닮았다. 먼저 삿포로를 제패해 홋카이도 1등이 된다. 일본의 종합 병동인 이곳에서 1등이 되려면 고효율·저비용 경영을 우직하게 진행하는 것 외에는 왕도가 없다. 홋카이도는 ‘승자 독식’이 유독 두드러지는 지역이다. 만성 불황 상태인 홋카이도의 소비자들은 가격과 서비스에 특히 까다롭고 불황이 심할수록 이미 검증받은 1등 기업에만 몰리기 때문이다.
니토리홀딩스·DCM홀딩스·쓰루하홀딩스 등이 압도적인 1등이 된 것도 1997년 홋카이도 최대 금융 회사인 홋카이도척식은행이 파산해 지역 경제가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였다. 그다음은 홋카이도에서 가장 가까운 본토(혼슈) 지방인 도호쿠 지역에 진출한다. 본토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 가운데 하나인 도호쿠는 대기업이 적고 경쟁도 덜하다. 도쿄와 수도권을 노리는 것은 도호쿠에서 힘을 쌓은 뒤다. 수도권에 진출해서도 지역 1등 기업과의 정면 승부는 피한다. 지역 2등 기업을 인수해 내실을 다지면서 때를 기다린다.
코로나19는 홋카이도 기업들이 기다려 온 바로 그때다. 가격 경쟁력과 물류 효율성을 가진 기업만 살아남는 코로나19 시대의 경쟁 원리는 홋카이도 기업이 20여 년간 갈고닦은 주특기다. 다른 지역의 기업에 지려야 질 수 없다는 게 일본 유통업계의 공통된 인식이다.
니토리 아키오 니토리홀딩스 회장은 “소매 업황이 더욱 나빠지면서 과점화가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홋카이도 기업이 바라는 상황이다. 홋카이도에서 도호쿠로, 다시 수도권으로 조금씩 발을 넓히는 기업들에 기업 인수·합병(M&A)은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다.
1980년 오타니 기이치 사장이 28세의 나이로 창업한 아인홀딩스도 M&A를 중단한 적이 없다. 각 지역 1~2위 업체를 하나둘씩 인수한 결과 아인홀딩스는 5273명의 약제사가 연간 2294만 장의 처방전을 처리하는 일본 최대 조제 약국이 됐다. 지난해 매출은 2926억 엔으로 20년 연속 증가했다. 니토리홀딩스와 DCM홀딩스는 수도권에 거점을 둔 일본 7위 홈센터 시마추를 놓고 M&A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일본을 제패하는 홋카이도 기업의 경영진은 대부분 같은 세대여서 라이벌 의식도 치열하다는 평가다. 홋카이도 최대 편의점인 세이코마트는 ‘홋카이도스러움’을 무기로 홋카이도 현상을 퍼뜨리고 있다. 일본 대형 편의점들이 모두 매출 감소로 고심하고 있지만 세이코마트의 올해 실적은 이미 지난해를 웃돌았다.
비결은 역시 홋카이도 기업의 강점인 물류와 비용 절감이다. 일찌감치 ‘세이코 모델’로 불리는 ‘제조-물류-판매’의 일관 체제를 구축했다. 홋카이도 각지의 식품 제조 기업을 자회사로 두고 철저히 직판을 추구한다. 다른 편의점과 달리 신선식품도 판매하는 ‘식품 슈퍼형 편의점’이어서 홋카이도에서는 세이코마트에서 장을 보는 주부가 많다. 땅이 넓고 인구 밀도는 낮은 홋카이도의 상황에 맞춰 주택가 출점 비율이 높은 것도 이유다. 도심에 점포를 집중시킨 대형 편의점들이 재택근무 확산과 외출 기피로 어려움을 겪는 것과 대조적이다.
홋카이도 JR타워에서 바라본 야경.한국경제신문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8호(2020.12.21 ~ 2020.12.27)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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