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퇴직 임원들에게 경험과 지식 전파할 수 있는 ‘기회의 장’ 만들어야 [한경비즈니스 칼럼=김용우 IGM세계경영연구원 교수] 회사에서 만들어지는 무형 자산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산전수전 다 겪은 임원들의 경험이다. 이 경험이 온전하게 회사의 경쟁력으로 쌓이지 않거나 나아가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쓰이지 않는다면 너무 큰 손실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대졸 신입 사원이 임원으로 승진하는 데 평균 22년이 걸리고 신입 사원 1000명 중 단 7명만이 임원으로 승진한다. 22년 이상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크고 작은 성공 경험을 쌓은 1% 미만의 인재가 임원이라는 의미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살아 있는 경험만큼 소중한 자산이 또 있을까.
경험 전수가 쉽지 않은 ‘냉혹한 현실’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1910년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한 유명한 연설이 있다.
“경기장의 관람석에 앉아 강한 선수가 비틀거린다고 지적하거나 어떤 선수가 이러저러하게 하면 더 낫겠다고 훈수나 두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사람은 경기장에 서 있는 투사입니다. 그는 얼굴에 먼지와 땀과 피를 잔뜩 묻혀 가며 용감하게 싸웁니다. 실책을 범하기도 하고 거듭 한계에 부닥치기도 합니다. (중략) 그는 위대한 열정이 무엇이고 위대한 헌신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는 가치 있는 목표를 위해 온몸을 던집니다. 잘될 경우 그는 큰 성취감을 맛봅니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그는 용기 있는 실패를 하는 겁니다.”
경기장에서 온몸을 던지며 위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가치 있는 목표를 이루고자 싸워 온 사람은 다름 아닌 22년 넘게 현장을 누비고 1%의 인재로 선발된 임원이다. 이들의 경험이 후배들에게 전수되고 나아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돼야 한다. 관람석에 앉아 비평하는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의 임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할 기회는 많지 않은 듯하다. 한국CXO연구소가 한국의 100대 상장사 퇴직 임원 388명을 조사한 결과 임원을 달고 난 후 1~3년 사이 퇴직하는 이들이 39.7%(154명)로 가장 많았다. 그리고 55세 이하가 61.9%(240명)였다. 임원으로서 짧은 기간에 퇴직하고 100세 시대에 비교적 이른 나이에 퇴직하는 것이다.
그러면 퇴직한 임원은 자신의 경험을 나눌 준비가 돼 있을까. 대기업 임원들이 비자발적 퇴직 이후 겪는 심리적 어려움에 대한 질적 연구(중앙대 심리학과 구자복·정태연)에 보면 퇴직 초기 심리적 공황, 정서적 공황 등 준비돼 있지 않은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임원은 성과로 말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단기 성과에 집중하게 된다. 따라서 본인을 이을 후임자를 양성하거나 직원들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를 실행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결국 경기장에서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인 채 싸우다가 어느 날 갑자기 경기장을 떠나게 된다. 임원이라면 누구나 비장의 무기, 이른바 ‘한 방’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스스로가 잘 모른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경기장에서 나와 관람석에 앉을 기회가 있어야 한다. 경기장에 있는 후배들에게 20여 년간 쌓은 경험과 임원으로서 겪은 판단과 결정의 이야기, 성공과 실패의 살아 있는 이야기를 할 기회 말이다.
이래야 임원이 투사로서 쌓은 암묵지(暗默知 : 학습과 경험을 통해 개인에게 체화돼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식)를 눈에 보이는 형식지(形式知 : 문서나 매뉴얼처럼 외부에 표출돼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로 전환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에서 가장 소중한 무형 자산이 온전하게 쌓이지 않고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퇴직 후에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쓰이지 않고 묻힐 수 있다. 이는 소속 회사는 물론이고 국가적인 엄청난 손실이다.
암묵지를 형식지로 전환하는 방법 찾아야
그렇다고 무턱대고 경험을 전수할 기회를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과거의 경험을 영웅담처럼 들려주는 것은 자칫 ‘꼰대’라는 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더욱이 과거의 경험은 좋은 것만 선택적으로 남은 왜곡된 기억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과거의 경험은 자산이면서 동시에 함정이라고 한다. 어떻게 이를 해결하면 좋을까.
임원은 학습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학습력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 배운 것을 실행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적용했기에 임원이 됐다. 따라서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온전하게 나누는 법을 배울 기회만 있으면 된다.
성공과 실패의 살아 있는 이야기에 누구나 공감하고 납득할 수 있는 논리를 세우고 새로운 시선을 더하는 법을 학습하면 경험을 보다 더 온전하게 전수할 수 있다. 가령 성공 가능성이 낮은 일을 동료들과 함께 온 힘을 다해 성공시킨 사례가 있다고 하자.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보다 “동료들이 함께하는 열정과 헌신은 남다른 힘을 발휘합니다(Point). 왜냐하면 동료들 간에 신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Reason). 내가 겪은 여러 사례가 있습니다. 요즘은 다양한 기술의 발전으로 더 쉽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Example : 직접 겪은 사례와 요즘의 트렌드를 연결). 함께하는 열정과 헌신은 우리 조직을 완전히 바꿀 것입니다(Point).”
어떤가. 맥킨지식 보고 기법이라고 알려진 ‘PREP’를 활용했다. 이런 식으로 경험을 전달하면 이론으로 무장한 협업 분야의 전문가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전달력과 이후의 실행력을 높일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켈러의 학습 동기 이론인 ‘ARCS’ 모델을 적용할 수도 있다. 예전에 경험한 사례를 영상으로 보여주고(Attention : 주의 집중), 바로 여러분의 선배들이 경험한 이야기들 들려주고(Relevance : 관련성), 지금과 같은 디지털 시대의 변화 속에서 우리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Confidence : 자신감),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Satisfaction : 만족감)고 격려하며 함께 경험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밖에 임원이 가진 무형자산인 암묵지를 형식지로 전환하는 기법은 많다. 임원들에게 학습할 기회와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세상의 빠른 변화를 수시로 배우고 이를 경험에 더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면 임원의 소중한 경험이 후배들에게 온전하게 전수되고 회사를 살리는 경쟁력으로 쌓인다. 이런 과정은 퇴직 후에도 본인의 경험과 지식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의미 있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세상을 살리는 큰 힘이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관점을 수용하는 생각의 전환이다. 가령 20년 이상 차이가 나는 후배 직원들로부터 임원인, 혹은 퇴직 임원인 당신의 이야기에 냉정한 피드백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자. ‘이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직원들이 뭘 안다고’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온전하게 경험이 전수되지 않는다. 필자의 경험상 임원과 퇴직 임원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꼭 넘어야 할 산이다.
미국 유타 주에는 ‘판도(Pando)’라고 불리는 거대한 사시나무 군락이 있다. 무려 8만 년 동안 하나의 뿌리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끊임없이 뻗어 나온 4만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판도는 라틴어로 ‘나는 뻗어나간다’는 의미다. 20년 이상 경기장에서 온몸을 던지며 위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가치 있는 목표를 이루고자 싸워 온 1%의 인재가 된 경험과 임원으로서 판단하고 결정한 살아 있는 경험이 판도처럼 끊임없이 뻗어나갈 수 있다면 최고의 무형 자산으로서 임원의 경험이 회사를 살리고 나아가 세상을 살리는 큰 힘이 될 것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9호(2020.12.28 ~ 2021.01.0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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