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부채 30경원…적자 국채 통한 재정정책, 경기 부양 효과 제한

[한상춘의 국제경제 심층 분석]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한 직원이 달러를 정리하고 있다./연합뉴스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한 직원이 달러를 정리하고 있다./연합뉴스
최근 들어 ‘부채의 화폐화(bond monetization)’ 문제를 놓고 나라 안팎에서 논쟁이 뜨겁다. 미국은 조 바이든 정부의 경제 컨트롤 타워인 재닛 옐런 재무장관의 큰 행동 전략(act big)으로, 한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따른 피해 보상 차원에서 재원 마련 방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부채의 화폐화는 재정 당국이 발행한 적자 국채를 중앙은행이 매입해 주는 정책을 말한다. 재원의 원천을 부채로 한다는 점과 시장이 아니라 발권력을 갖고 있는 중앙은행이 나선다는 점에서 모든 정책 여지가 소진됐을 때 마지막으로 동원하는 비전통적인 정책으로, 통화 정책에서는 마이너스 금리와 제로 금리, 양적 완화 등이 해당한다.

모든 정책은 양면성을 갖는다. 의도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부작용이 크게 나타나 오히려 정책 당국이 경제를 망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특히 부채의 화폐화와 같은 비전통적인 정책일수록 ‘정부의 실패’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 비상 국면에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빨리 정상화하는 출구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불붙는 ‘부채의 화폐화’ 논쟁… 한국 경제 ‘잃어버린 20년’ 우려
전 세계 부채, GDP의 3.65배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지난해 말 세계 정부와 기업 그리고 개인이 진 부채는 총 277조 달러, 우리 돈으로 30경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지난해 세계 모든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을 모두 합친 것의 3.65배에 달하는 것으로, 세계인이 앞으로 3년 8개월 동안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털어 넣어야 갚을 수 있는 엄청난 규모다.

세계 부채가 빠르게 늘어난 것은 양적 완화로 돈이 많이 풀린 데다 금리도 제로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낮춰 놓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가 불확실해 투자와 소비가 좀처럼 늘지 않자 조급해진 정책 당국(은행도 가세)이 기업과 가계에 부채(대출)를 권장하는 분위기도 한 몫했다. 현재 돈을 빌려준 사람보다 빌려 간 사람이 큰소리치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것도 이 요인이 크다.

부채의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금융 위기 이전에는 선진국은 공공 부채가 주로 늘어났다. 하지만 금융 위기 이후 신흥국은 가계 부채가 급증하고 있는 점이 우려된다. 세계 부채에서 신흥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금융 위기 전에는 22%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말에는 60%에 근접하고 있다. 불과 13년 만에 3배 가깝게 급증했다.

앞으로 부채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진입해 부채 상환 능력이 떨어진 데다 위기가 계속되고 있어 부채를 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올 들어 미국의 국채 금리가 상승하자 부채가 또 다른 부채를 부르는 ‘나선형 악순환 고리(vicious spiral cycle)’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한 미국 중앙은행(Fed)이 서둘러 국채 금리 안정화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애프터 크라이시스 성격이 짙은 세계 부채가 과도하게 많아지면 가장 우려되는 것은 ‘통화 정책 전달 경로(transmission mechanism : 통화 공급→금리 하락→총수요 증가→경기 부양)’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때 금융과 실물 간 따로 노는 ‘이분법 경제(dichotomy)’에 처해 돈을 푼다고 하더라도 실물 경제에 들어가지 않고 금융권에서만 맴도는 현상이 발생한다.

재정 정책은 시차가 길어진다. 시차는 정책 입안에서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내부(행정) 시차’, 정책 확정 이후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외부(집행) 시차’로 구분된다.

각종 선거 표심에 가장 민감한 부채가 많아지면 내부 시차가 길어지는 폐단이 있다. 확정된 재정 정책도 ‘구축 효과(crowding out effect : 공공 지출 증가가 민간 수요를 위축시키는 현상)’로 경기 부양 효과도 반감된다.

돈맥경화 심한 한국, ‘혼돈 시대’ 접어들 수도

한국은 7대 취약국으로 분류될 정도로 가계 부채가 유독 많은 국가다. 국제결제은행(BIS)이 가계 부채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신용 갭(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이 호드릭-프레스코트 필터로 구한 장기 추세에서 벗어난 정도)’은 이미 4%포인트가 넘어 주의(2%포인트 미만 ‘보통’, 2~10%포인트 ‘주의’, 10%포인트 이상 ‘경고’) 단계다.

부채를 갚을 능력인 원리금 상환 부담률은 7대 가계 부채 취약국 중에서도 가장 떨어지고 저소득층일수록 더 떨어진다. 가계 부채가 많고 저소득층일수록 부채 상환 능력이 떨어지는 여건에서 국채 금리 상승을 계기로 대출 금리가 올라가면 빈부 격차가 확대된다. 상대소득가설(안도와 모딜리아니)에 따르면 저소득층은 고소득층보다 소비 성향이 높기 때문에 경기까지 둔화될 우려가 높다.

주목해야 할 것은 각국 중앙은행의 기준 금리 인상 여부와 관계없이 각종 대출 금리가 일제히 오르고 있는 점이다. 재정 적자가 심한 국가일수록 대출 금리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점은 재정 지출이 부쩍 증가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영끌’과 ‘빚투’로 주택과 주식을 투자한 젊은 층의 신용 불량자가 갑작스럽게 급증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그 어느 국가보다 금융과 실물 간의 연계성이 떨어져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심한 국가다. 통화 유통 속도와 통화승수와 같은 경제 활력 지표는 사상 최저수준이다. 통화 유통 속도는 일정 기간 동안 한 단위의 통화가 거래를 위해 사용된 횟수를 말한다. 통화 유통 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돈이 잘 유통되지 않아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통화승수는 돈의 총량을 의미하는 통화량을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 통화(고성능 화폐 : high-powered money)로 나눈 수치다. 통화승수는 그 나라 국민들의 현금 보유 성향과 예금 은행에 대한 지급 준비율 등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처럼 기준 금리가 변경되지 않을 때는 현금 보유 성향과 지급 준비율이 작을수록 통화승수는 커진다.

돈맥경화 현상이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요인은 계속된 위기로 경제 주체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기 때문이다. 디레버리지(deleverage : 부채축소·저축증대)에 여념이 없는 가계는 부채를 내서까지 소비할 여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업도 투자를 꺼리게 되지만 금융사의 대출 태도는 오히려 깐깐해진다.

돈맥경화 현상이 장기간 풀리지 않을 경우 금융 시장에서는 ‘역설(paradox)’이나 ‘수수께끼(conundrum)’라는 종전의 경험과 관행 그리고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뉴 노멀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 정책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워진다. 학계를 중심으로 ‘경제학의 혼돈 시대(chaos of economics)’에 접어들었다는 우려가 자주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혼돈 시대에 우리 경제는 유독 위기설에 민감하다. 정책 당국자가 알아둬야 할 것은 대내외 여건이 악화될 때마다 위기설이 판치는 것은 ‘통계 수치상의 위기’가 아니라 정부의 경제 운용 체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 시스템상의 위기’에 연유된다는 점이다. 정책 결정과 책임자는 자신의 이익과 자리를 위한 섣부른 정책을 내놓기보다 경제 시스템을 안정시킬 수 있는 대책 마련에 더 몰두해야 한다.

올 들어 공매도 재개 문제에 이어 섣부른 ‘부채의 화폐화’ 논의는 우리 경제의 혼란과 위기설을 더 키울 가능성이 높다. 뉴 노멀 정책 여건에서는 특정인에 의존하기보다 국민 모두의 집단 지성을 구해 대처해 나가는 ‘시나리오 플래닝’ 기법이 더 효과적이다. 정부·기업·국민 모두가 주연이 되는 ‘M트로이카(Management-troica)’ 체제를 구축해야 할 때다.

한상춘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