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은 문어발의 속사정이다. 경영자가 다른 경로로 이득을 얻기 위해 끼워 넣은 사업체, 이를 위해 만든 지배 체제가 문제일 수 있다. 만들어진 사업 가치를 망가뜨리는 짓을 먼저 바로잡아야지 사업의 구조 자체를 문제 삼지 말라는 얘기다.
‘문어발’은 무죄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1964년생.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경영학 석사. 하버드대 경영학 박사. 삼일회계법인, 대우그룹. 2002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현).



‘문어발’, 한국 재벌을 상징하는 말이다. 잘하지도 못하면서 남 따라 이 사업 저 사업 다 손을 뻗쳐 덩치를 키우더니 ‘나 망하면 나라도 망한다’며 버틴다는 체험적 비판이 담겨 있다. 관련이 낮은 사업으로 다각화하면 성과가 떨어진다는 그럴듯한 연구 성과들도 받쳐주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주요 대기업들은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고 한 회사 안에도 여러 가지 사업들을 같이하고 있다. 돈이 되니까 같이 하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공무원과 학자들이 답답한 소리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정책 당국이 재벌의 탐욕에 밀려 눈감고 있는 것일까.

비관련 다각화를 규제하는 업종 전문화 정책은 표준 산업 분류(SITC) 체계를 기반으로 한다. 비슷한 성격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묶어서 농림어업·제조업·서비스업으로 나누는 식인데, 핵심 역량에 입각한 사업 구조 조정을 주장하는 연구들도 이런 분류에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류에 맞춰 사업을 하라는 얘기는 산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융합이 돈이 되는 세상에 어이가 없는 일이다. 시골 장터의 약장수는 공짜 쇼로 손님을 모아 놓고 약을 팔았다. 의약품 제조와 도소매, 공연 서비스라는 전혀 다른 산업들을 묶은 셈이다. 정보기술(IT)의 발전과 보급으로 전혀 다른 산업에 속한 제품과 서비스가 결합되는 일은 더욱 늘고 있다. 구글이 자동차를 만들고 알리바바가 TV를 만든다는 뉴스를 보면 문어발에 대한 준엄한 비판은 오로지 내수용인지 궁금하다.

경영전략 분야의 최근 연구들은 다양한 사업들을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관련 사업자들에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수원을 하면 꿀벌이 모여들어 옆에 있던 양봉업자가 돈을 버는 외부성(externality)이 발생한다. 영리한 과수원 사장은 직접 양봉을 하거나 미리 땅을 마련해 양봉업자에게 임대한다. 쇼핑몰에 고객이 많이 모이면 서로 수다도 떨고 재미가 있다(네트워크 효과). 나아가 좋은 상점이 모이고 먹을거리·볼거리도 생긴다(교차 네트워크 효과). 쇼핑몰 경영자는 ‘훌륭한’ 입점 업체나 고객을 선별적으로 확보해 네트워크 효과를 만들어 낸다. 통신 업계가 보조금 정책으로 가입자 기반을 확보하면 관련 애플리케이션이나 액세서리 개발에 경제성이 생기고 결국 데이터 사용 요금이 걷히고 이에 따라 단말기 생산 단가가 낮아지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교차 네트워크 효과가 작동하면 다른 산업들이 연결되면서 가치가 만들어진다. 산업 분류표에서 다른 칸이라고 핵심 역량이 맞지 않는다고 우긴다면 침대 길이에 맞춰 키를 줄이라는 얘기다. 한국 대기업들의 문어발 구조는 개발연대 산업정책의 결과물이다. 교차 네트워크 효과로 설명되는 사업들 사이의 시너지 효과가 이 구조를 유지했다면 무작정 업종 전문화만 주장할 수는 없다. 융합과 통섭이 강조되는 세상에서 핵심 역량 운운하는 전문화 논의는 더 군색해진다.

핵심은 문어발의 속사정이다. 경영자가 다른 경로로 이득을 얻기 위해 끼워 넣은 사업체, 이를 위해 만든 지배 체제가 문제일 수 있다. 대주주 일가에 일감을 몰아주는 수취 구조가 대표적인 사례다. 만들어진 사업 가치를 망가뜨리는 짓을 먼저 바로잡아야지 사업의 구조 자체를 문제 삼지 말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