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가 바뀌고 있다

오랫동안 사랑 받는 기업엔 나름의 이미지가 쌓이게 마련이다. ‘애플’은 창조나 혁신이 떠오르고 ‘유한양행’은 각종 사회 공헌 활동이 떠오르는 식이다. 그렇다면 ‘롯데그룹’은 어떨까. 많은 이들이 롯데라는 브랜드에서 ‘보수적인 경영’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무차입 경영을 금과옥조처럼 지켜왔고 유통·제과나 음료 등 식품·레저·석유화학·금융 등 4대 사업이 모두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화취실(去華就實)’이라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좌우명답게 롯데는 국내 영업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적 투자 성향의 기업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롯데의 변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업의 디엔에이(DNA)가 바뀌고 있다. 공격적인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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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공격적인 M&A 기업

지난해 롯데쇼핑은 유통 업계에 나온 대형 매물 2건을 모두 손에 넣었다. 1월에 편의점 바이더웨이를 2700억 원에 인수했고 2월에는 GS리테일의 백화점과 마트 부문을 1조3000억 원에 인수했다.

이어 7월에는 호남석유화학이 말레이시아의 석유화학 회사인 ‘타이탄’을 1조5000억 원에 인수했고, 같은 달 롯데홈쇼핑은 중국의 홈쇼핑 업체인 ‘럭키파이’를 1500억 원에 사들였다. 인수 금액이 200억 원 이상인 대형 M&A가 2010년 한 해에만 11건이나 이뤄졌다.

롯데의 광폭 M&A 행보가 작년 한 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최근 2년간 롯데는 4조 원의 자금을 M&A에 쏟아 부으며 유통·식품 업계의 주요 매물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2009년 1월 소주 ‘처음처럼’을 생산하는 ‘두산주류BG’를 5030억 원에 인수한 게 대표적이다. 12월에는 7300억 원을 들여 중국에 65개의 점포를 가진 대형 마트 체인 ‘타임스’를 인수했고, 같은 달 AK면세점 인수에는 800억 원을 썼다.

롯데의 공격적 M&A는 글로벌 금융 위기로 유동성 위기를 겪었던 2008년 이후 오히려 더 두드러졌다. 많은 기업들이 투자를 망설이던 이 시기에 롯데는 2008년 8월 벨기에 초콜릿 회사 ‘길리안’ 인수를 시작으로 2009년까지 8건의 굵직한 M&A를 성사시켰다. 2008년 10월 인도네시아의 대형 마트 ‘마르코’ 점포 19개를 3900억 원에 사들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롯데의 변신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다. 보수적 투자 색채를 탈피하며 성장 일로에 나선 그룹의 변화는 지난 2월 새롭게 취임한 신동빈 회장의 2세 경영 시대와 맥을 같이한다.

신 회장은 지난 2002년 9월에 이뤄진 동양카드 인수 때부터 그룹의 M&A 전반에 깊숙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2004년 들어 정책본부장을 맡으면서부터는 본부 내 국제실을 운용하며 더욱 적극적인 M&A에 나섰다.

2004년 11월 KP케미칼을 1785억 원에 인수한 것, 2006년 롯데쇼핑의 상장을 진두지휘한 것 역시 신 회장의 활약이었다. 2004년 이후를 살펴보면 인수 자금 1000억 원이 넘는 대형 딜만 16건에 이를 정도다. 보수적이고 안전 지향적인 기업이라는 평가가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기업 M&A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롯데의 힘은 풍부한 ‘현금 유동성’에서 나온다. 그룹의 대표 기업인 롯데쇼핑은 국내 소매 유통의 최고 강자다. “수많은 점포에서 매일 들어오는 거액의 현금 덕분에 단기적으로 자금이 부족할 일은 거의 없다”는 게 그룹 관계자의 말. 최근 몇 년 간 소매 유통업 부문의 성장세가 지속되면서 현금 유동성은 더욱 강화됐다.

2006년 이뤄진 롯데쇼핑 상장은 거액의 투자비용 마련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한국과 런던 증시 동시 상장으로 단번에 확보한 자금만 3조5000억 원에 달했다. 그룹의 재무구조가 전반적으로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 역시 M&A 실탄 마련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계열사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룹 내 계열사 부채비율은 대체로 50% 전후에 불과하다. 그만큼 추가 자금 마련에 힘을 쏟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롯데의 변신’은 비단 기업 M&A 자체에만 그치지 않는다. ‘무차입’ 경영으로 대표되는 롯데의 자금 운용 역시 M&A와 함께 획기적인 변화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2009년 3월 비전 선포식을 통해 롯데그룹을 ‘아시아 톱10’에 올려놓겠다고 발표했다. 2018년까지 그룹 총매출을 200조 원으로 늘리겠다는 것. 현재의 매출 수준을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4배로 성장시키겠다는 야심이다.

회사채 발행, 인수 금융 적극 활용

확고한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한 국내 기업과 성장을 통한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 가운데 후자를 선택한 롯데는 기본적인 자금 조달 방식 역시 변화를 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돈이 많은 기업이지만 대형 거래가 많아지면서 자체 잉여금만으로는 거래를 성사시키기 어려워진 영향이라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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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자기자본 위주로 이뤄졌던 롯데의 M&A는 2006년 들어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은행권의 인수 금융을 이용하거나 회사채를 발행해 직접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롯데그룹의 회사채 발행액은 2006년 800억 원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 2007년 1500억 원, 2008년 1조1700억 원, 2009년에는 2조5500억 원으로 늘었다.

2010년에는 2조7000억 원(금융사 제외)으로 국내 전체 기업집단 회사채 발행 순위에서 건수와 금액 모두 3위에 올랐다. 롯데쇼핑이 2010년 GS백화점과 마트 인수를 위해 발행한 4000억 원의 원화 표시 채권이 대표적이다.

2010년 1월 바이더웨이를 인수한 코리아세븐도 총 인수 금액 2740억 원 중 1000억 원을 회사채로 조달했다. 이 밖에 호남석유화학의 타이탄 인수 대금도 3000억 원의 원화 채권과 3억5000만 달러의 외표채 발행으로 자금을 마련했다. 롯데삼강은 작년 10월 파스퇴르유업을 인수했는데, 총 인수 금액 600억 원 중 절반이 훌쩍 넘는 400억 원을 회사채를 통해 조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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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기업 색깔과 다른 공격적 M&A 행보가 이어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 롯데만의 원칙도 읽을 수 있다. 핵심은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다. 아무리 탐이 나는 매물이라도 기존 사업과 전혀 무관한 기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

또 시너지 효과와 가격을 견줬을 때 인수 대금이 적정선을 넘었다는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도 역시 롯데의 M&A 원칙 중 하나다. 최근 본격화된 대한통운 인수전 역시 물류 기업을 확보할 경우 유통뿐만 아니라 호남석유화학 등 수출 기업과의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라는 판단 아래 추진되고 있다.

왕성한 식욕으로 기업 사냥에 나선 롯데의 체질 변화는 역시 신 회장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회사채 발행을 늘리고 인수 금융을 적극 활용하는 것도 과거 노무라증권에서 금융맨으로 일한 바 있는 신 회장의 재무 감각과 투자 전략 때문이라는 게 업계 안팎의 시선이다.
[롯데 3배 성장의 비밀] ‘통큰’ 기업 인수 통해 ‘큰손’ 변신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