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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가가 연일 급등하고 있다. 리비아 민주화 시위가 부족 간 내전(內戰) 양상으로 격화되면서 원유 수급 불안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의 대표 원유인 두바이유가 2008년 3월 이후 처음으로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고 미국의 대표 주자인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도 장중 한때 100달러를 넘어서기도 했다.
WTI, ‘기준 유종’ 자리 빼앗겨
더욱이 영국 북해에서 생산되는 ‘유럽 대표’ 브렌트유는 전자거래에서 한때 119.79달러(2월 24일)까지 치솟는 등 고공 행진을 보여 전 세계 원유 시장을 술렁이게 했다.

글로벌 경제에 패닉 현상을 일으켰던 2008년 7월의 147.50달러(WTI 기준)로 직행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일본 노무라홀딩스는 아예 배럴당 220달러까지 갈 수 있다는 극단적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원유 시장에서는 고삐 풀린 가격 외에도 주목하는 게 한 가지 더 있다는 점이다. 바로 WTI·브렌트유·두바이유 등 주요 유종 간 가격차, 즉 스프레드(spread)다. 이 중에서도 브렌트유와 WTI의 가격차가 더욱 관심이다.

유종별 가격 스프레드 벌어져

유황 함량이 적고 실제 원유 함량이 높아 최고급 유종으로 평가되는 WTI는 브렌트유나 두바이유보다 1~2달러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게 보통이었다. 가격차가 10달러 이상 벌어지는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WTI는 2009년께부터 브렌트유보다 가격이 싼 ‘가격 역전’을 한두 번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최근 들어선 ‘한수 아래’인 두바이유보다 낮은 이른바 ‘WTI의 굴욕’을 당하고 있다.

미국에서 100% 소비되는 WTI의 약세가 국제 원유 시장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상당수 투자자들이 매년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WTI에 베팅하기 때문이다. WTI는 주요 에너지 다소비국과 에너지 관련 기업들이 리스크 분산 차원에서 투자하는 대표적 헤지 상품이기도 하다.

원유 값 폭등과 같은 에너지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나름대로 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유종에 선투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의외의 가격 역전이 벌어진 것일까.

무엇보다 브렌트유 몸값이 최근 들어 유독 많이 올랐다. 튀니지와 이집트 등에서 시작한 북아프리카 민주화 운동이 석유밭인 리비아를 거쳐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주요 산유국으로 더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투자자들이 브렌트유 등 유럽산 원유 선물을 사재기하기 때문이다.

리비아 한 곳만 해도 하루 165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있는데, 생산이 완전 중단되면 단기간에 전 세계 하루 원유 생산량의 1.7%가량이 유통시장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게 문제다.

이와 반대로 WTI의 수요는 미국의 오랜 경기 침체로 그다지 늘고 있지 않는 형편이다. 반면 미국 노스다코타 지역 유전에서 파이프라인을 통해 WTI 주요 저장소인 오클라호마 주 쿠싱 저장소로 들어오는 원유는 지난 2년간 2배가량 늘어났다.

쿠싱 원유 저장소의 WTI 재고량 증감은 늘 WTI 국제 가격에 민감한 변수로 작용해 왔다. 여기에 하루 15만5000배럴 정도의 캐나다산 원유가 추가로 들어올 예정이다. 원유가 쪼그라든 경제에 비해 넘쳐나는 것이다.

미국 경제의 약세가 결국 ‘원유의 황태자’로 군림하던 WTI의 무기력으로 전이됐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업계에선 WTI 가 현재로선 유가 거래의 기준이 되는 기준 유종(benchmarking oil)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라고 지적한다.

사실 WTI는 미국 내에서만 사용된다는 독특한 특성 때문에 이전부터 벤치마킹 유종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미국 수급 현황에 따라 들쑥날쑥 변동성이 큰 만큼 다른 유종의 원유 거래에 보편적인 가격 기준으로 쓰기 곤란하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이 때문에 2008년 사우디아라비아는 서방국가와의 원유 거래에서 가격 기준으로 삼던 WTI를 가격 변동성이 크다는 이유로 지표 원유 리스트에서 제외했다.

이관우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