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위기 후유증 덮친 경제
작년 9월 미국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 위기가 1년을 맞았다. 금융 위기 당시 일본은 미국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었다. ‘잃어버린 10년’의 후유증으로 미국처럼 고도의 파생 금융 상품에 투자하는 ‘위험한 돈놀이’를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나 후폭풍의 피해는 컸다. 금융 위기 후 닥친 실물경제 위기로 세계 최강이라던 도요타자동차가 휘청거렸다. 그때의 상처는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거시경제에 언뜻언뜻 햇살이 비치기도 하지만 여전히 짙은 구름 속에 잠겨 있다. 수출이 회복 기미를 보이면서 생산도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강한 회복세는 나타나지 않는다. 바닥에서 게걸음을 하고 있는 정도다. 일각에선 ‘잃어버린 10년’이 다시 오는 것 아니냐는 비관론도 나온다. 고용 악화가 사상 최악으로 치닫고 물가 하락이 이어지면서 디플레이션 조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지난 8·30 총선(중의원 선거)으로 54년 만에 정권이 바뀐 것도 경제의 불투명성을 높이고 있다. ‘퍼주기 공약’이 모두 이행될 경우 재정 파탄이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경제 현안은 디플레이션 차단이다. 일본은 실업률이 치솟고 있는 가운데 소비자물가는 떨어지고, 성장률은 마이너스인 상황이다. 전형적인 디플레이션의 모습이다. 7월 실업률은 5.7%로 사상 최악을 기록했다.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실업자 수는 359만 명으로 작년 같은 달에 비해 103만 명이 증가했다.여기에 정부가 고용 유지를 위해 기업에 지원하는 고용 유지 지원금을 받는 사람은 7월 현재 243만2500명으로 전월 대비 2.1% 증가했다. 정부의 지원금이 끊기면 잠재적 실업자로 전락할 수 있다. 7월의 소비자물가는 전년 같은 달보다 2.2% 하락, 3개월 연속 떨어졌다. 사상 최대 하락 폭이다.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매출 부진이 지속되자 기업들은 상품 가격을 내리고 있다. 이는 기업의 실적 악화로 연결되면서 성장 둔화를 촉진해 고용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일본 경제의 심장인 수출은 7월 4조8447억 엔으로 작년 동기 대비 36.5% 추락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 발생 전인 작년 3분기 월 평균치인 7조3457억 엔의 65% 수준에 불과하다. 이 같은 현상이 지속되면 일본 경제는 지난 19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으로 다시 추락할 수 있다는 비관론도 나오고 있다.일본 정부는 작년 하반기 이후 4차례의 부양책을 내놓으면서 132조 엔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민간 연구소들은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마이너스 2.8%, 내년은 플러스 0.9%로 전망하고 있다.= 민주당의 집권도 단기적으로는 경제에 변수가 될 수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신임 총리 등 민주당 지도부의 뿌리가 자민당이어서 이념적으로 좌파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장과 수출 위주의 정책 기조를 보여 왔던 자민당에 비해 민주당은 복지 확대를 통한 내수 부양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국민 생활 지원을 통해 가계의 가처분소득을 확대함으로써 내수를 키우고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녀 수당이나 학비 보조, 농업 보조 등을 통해 현금으로 가계를 지원하는 것 외의 성장 전략은 보이지 않는다.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정권 교체의 경제적 영향을 일단 중립적으로 보고 있다. 노무라연구소는 단기적으로는 자민당 정권의 경기 부양책 소멸로 경제성장률이 하락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민주당 공약에 의한 가계 가처분소득 확대로 성장률이 약간 올라갈 것이라고 예측했다.하지만 문제는 복지 공약의 재원이다. 민주당이 제시한 자녀 수당 등의 현금 공약을 모두 합할 경우 내년부터 연간 16조8000억 엔(약 218조 원)이 필요하다. 일본의 연간 방위비와 비슷한 수준이다. 정부 예산 207조 엔(올해 기준)의 8%, GDP의 3.4%에 달하는 천문학적 규모다.민주당은 이를 행정 예산 절감, 대형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중단, 각종 기금 활용 등으로 충당할 예정이다. 그러나 예산 염출(捻出)에 문제가 생겨 국채 발행 등 재정 확대로 귀결될 경우 경제 주름살이 커질 수 있다. 일본의 국가 채무는 올해 기준으로 816조 엔으로 GDP의 174%에 달한다. 내년에는 194%로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선진국 가운데 최악의 수준이다. 이 때문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일본의 국가 채무를 위험 수위로 진단했다.= 작년 가을 세계경제 위기 후 1년이 지났지만 일본의 주요 기업들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한데 이어 올해도 적자 탈출이 어려울 전망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미국 시장의 거품 속에서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렸던 일본 기업들인 만큼 상대적으로 불황의 골도 깊다. 고령층이 많은 시장 특성상 내수 회복도 다른 선진국에 비해 더디다.일본 도요타자동차의 한 간부는 최근 기자에게 “한국의 현대자동차를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 들어 세계 자동차 회사들이 30~40%의 판매 급감으로 고전하고 있지만 현대차는 중국 인도 등 신흥국을 중심으로 약진하고 있다. 그 비결을 연구 중이다.” 전 세계 자동차 회사의 교과서였던 도요타가 후발 주자인 현대차를 역(逆)벤치마킹하겠다는 것이다. 도요타의 위기감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일본 기업들은 이런 위기를 다운사이징으로 대응하고 있다. 미국 등 주력 시장이 줄어든 만큼 과감히 몸집을 줄인다는 전략이다. 도요타는 현재 1000만 대인 자동차 생산 능력 중 10%인 100만 대를 감축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합작 운영하던 캘리포니아 공장(NUMMI)을 내년 3월 아예 폐쇄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도요타가 공장 문을 닫기는 창사 72년 역사상 처음이다.“올해 판매 전망은 668만 대다. 그러니까 300만 대 이상의 과잉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다. 조업 단축 등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는다.” 생산 능력을 줄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란 게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소니도 멕시코에 있는 액정표시장치(LCD) TV 조립 공장을 대만 업체에 팔기로 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이 공장은 미국 시장을 겨냥한 생산 기지다. 미국 TV 시장에서 삼성전자에 밀려 적자만 누적되자 두 손을 들고 철수하기로 한 것이다.일본 기업들의 또 하나 위기 대처법은 인수·합병(M&A)이다. 휴대전화를 만들고 있는 NEC와 히타치 카시오 등 3사는 내년 4월까지 휴대전화 사업을 통합하는 협상을 벌이고 있다. 내수 시장이 포화인 상태에서 수출도 여의치 않자 ‘생존을 위한 합병’을 시도하고 있다.여전히 구조조정에 분주하지만 일본 기업들이 절대 게을리 하지 않는 게 미래 준비다. 세계 최강이라는 환경 기술을 바탕으로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일본 기업은 다른 것은 모두 줄여도 환경 분야 등에 대한 연구·개발(R&D) 투자는 오히려 늘리고 있다.니혼게이자이신문이 주요 253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올해 매출 대비 R&D 투자 비율은 4.3%로 작년에 비해 0.3%포인트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비율은 3년 연속 상승한 것으로 8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