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인터뷰 - ‘경영수업’ 나선 조원태 대한항공 상무
드넓은 인천공항 활주로 한쪽 끝에 있는 대한항공 정비격납고. 지난 6월 1일 오전 보잉의 최신예 여객기 B777-300ER (Extended Range)가 모습을 나타냈다. 한 번 주유하면 논스톱으로 1만3742km, 최대 15시간을 날 수 있는 장거리용 최신 모델이다. 대한항공은 갓 도입한 이 신형 항공기에 최고급 ‘명품 좌석’과 업그레이드된 기내 편의시설을 탑재해 이날 첫 공개 행사를 열었다.대한항공이 좌석 등을 전면 교체한 것은 지난 2005년 이후 처음이다. 하지만 데뷔 무대에 선 것은 ‘명품 좌석’만이 아니다. 올 초 여객사업본부장으로 승진하며 본격적인 경영 수업을 시작한 조양호 회장의 외아들 조원태(33) 상무도 이날 처음 언론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보였다.193cm 장신에 잘 빗어 넘긴 머리, 조금은 말라 보이는 호리호리한 몸매. 조 상무는 멀리서도 한눈에 두드러져 보였다. 조 상무가 마이크를 들자 기내에 동승한 수십 명의 기자들은 이 젊은 경영자의 몸짓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숨을 죽였다. 온통 자신에게 쏠린 시선과 팽팽한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조 상무는 침착했다.“B777-300ER는 미국 보잉이 현재 생산하는 장거리용 최신, 최대 기종입니다. 소음이 작고 연료 효율성이 높은 친환경 항공기이기도 하지요. 이걸 들여오면서 최고의 기내 시스템도 함께 도입했습니다. 경기 침체로 어려움이 있지만 고객 만족을 높이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한 겁니다. 앞으로 모든 중장거리 노선에 여러분이 앉아 계신 좌석과 주문형 오디오비디오(AVOD) 시스템이 들어가지요. 대한항공이 추구하는 ‘명품 항공사’로 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조 상무의 간단한 인사에 이어 실무진의 설명이 이어졌다. 새로 선보인 일등석에는 ‘코스모 스위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급 호텔 스위트룸과 같은 안락함을 제공한다는 의미다. 좌석이 180도로 펼쳐지고 칸막이를 올리면 완벽한 독립 공간이 만들어진다. 23인치 모니터를 설치해 영화관처럼 박진감 넘치는 화면을 즐길 수 있다. 비즈니스석(‘프레스티지 슬리퍼’)도 180도 완전 평면으로 펼쳐지는 침대형 좌석을 채택했다. 이코노미석(‘뉴 이코노미’)은 인체 공학적 설계로 의자 두께가 얇아졌으며 좌석을 젖히면 시트가 연동해 밀려나온다.조 상무는 예상외로 질의·응답(Q&A)에도 직접 나섰다.“경기 상황이 어려운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도 그걸 피할 길은 없어요. 하지만 남들이 서있을 때 한발 더 나아가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지요. 최신 기종은 비싸지만 연료 효율성은 훨씬 높아요. 지난해 3분기 국제 유가가 140달러까지 뛰었습니다. 지금은 다소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다시 그런 상황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어요. B777-300ER는 기존 항공기보다 연료 효율성이 10% 높아요. 유가 상승을 고려하면 장기적으로는 경제성이 오히려 더 높다고 볼 수 있어요. 또 경제가 어려운 때일수록 고객들은 싼 항공사를 찾고 기내의 쾌적성이나 서비스를 까다롭게 따지게 마련이지요. 기존 서비스의 유지는 퇴보예요.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일등석과 비즈니스석이 전체 공간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코노미석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코노미석 가격이 오르는 것은 아니에요. 물론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은 인상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지요. 최근 업그레이드 승객, 하이클래스 승객이 많이 늘고 있습니다. 좌석과 기내 시스템 교체는 그런 수요를 잡기 위한 하이엔드 마케팅 전략이에요.”“여객사업본부로 오기 전에 자재부에서 구매담당으로 2년 반 정도 일했지요. 그때 시작한 게 이번에 들여온 좌석이에요. 회장님께서 직접 주도해 추진하신 것입니다. 기존 좌석은 있는 것을 그대로 사서 쓰는 ‘기성복’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반면 이번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주문해 설계한 ‘맞춤옷’이지요. 아직 경영을 하는 자리는 아니고 한 사업본부의 본부장으로서 어려운 시기에 같이 일하는 임직원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리드하는 역할만 하려고 합니다.”“많은 사람이 ‘명품 항공사’라고 하면 아랍에미레이트항공이나 싱가포르항공을 떠올리는데, 역시 우리의 경쟁 상대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특정 항공사를 따라하는 벤치마킹이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것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조 상무의 답변에선 강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는 기자들의 질문이 잠시 끊기자 “새로운 일등석을 빨리 보고 싶으신가봐요”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여유까지 보였다. 언론사와 첫 데뷔 무대를 잔뜩 긴장한 채 지켜보던 대한항공 홍보팀원들의 표정도 그제야 환하게 펴졌다.조 상무는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을 함께 돌아보며 기자들의 개별적인 질문에도 스스럼없이 답했다. 조 상무는 좌석당 가격이 2억5000만 원인 일등석을 소개하며 “이 좌석 하나가 벤츠 S600 가격과 맞먹는다. 일등석이 8개 있으니까 이 비행기에 벤츠 S600 8대를 싣고 간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고 설명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조 상무는 180도 완전 평면으로 펼쳐지는 신형 비즈니스석 조작 버튼을 직접 누르며 편리성을 강조했다.“지금은 약간 아래쪽으로 기운 것 같지만 실제 비행할 때는 머리를 들고 날기 때문에 편안한 수평 상태가 됩니다. 기존 비즈니스석은 ‘완전 평면’이 아니라 약간 경사가 있어 자꾸 미끄러져 내린다는 고객 불만이 많았어요. 좌석 간격을 더 넓혀 이제는 타사 일등석 못지않게 안락해졌어요.”조 상무는 좌석을 설계할 때 자신이 모델 역할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193cm의 장신이라 자신에게 맞으면 고객 99%에 맞는다는 것이다.“요즘 가장 큰 이슈는 환승 수요예요. 국내 항공사 1분기 실적은 환승 수요를 얼마나 잡았는지에 따라 엇갈렸어요. 대한항공은 경기 불황, 원화 약세로 국내 항공 수요는 줄었지만 미주에서 인천을 거쳐 중국 일본 동남아로 향하는 환승 수요를 잡아 큰 타격을 받지 않았어요. 미국 항공사들은 아시아 항공사들에 비해 경쟁력이 낮아 가능성이 충분한 시장입니다. 명품 전략은 최고를 원하는 환승 고객을 잡기 위한 거예요. 특히 상용 수요가 주 타깃이지요.”“대한항공이 속해있는 국제항공동맹 스카이팀 항공기는 대부분 타 봤어요. 다른 항공사를 탈 때는 이코노미보다 비즈니스를 이용해요. 항공사의 진짜 경쟁력은 일등석이나 비즈니스에서 나타납니다. 이코노미는 거의 서비스 차이가 없어요. 아랍에미레이트항공과 싱가포르항공도 타 봤지만 나라별 특성이 어쩔 수없이 반영돼 있어요. 한국인의 욕구에 가장 잘 맞춘 곳이 바로 대한항공이죠.”조 상무는 요즘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이나 에어버스의 화두는 연료 효율성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들은 항공기 무게 1톤을 줄이는데 수백만 달러의 연구·개발비를 쓰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며 “그런데 (아랍에미레이트항공이나 싱가포르항공 등) 일부 항공사들은 수백kg짜리 좌석을 써 그런 노력을 수포로 돌린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의 차세대 좌석 도입을 은근히 돋보이게 하는 설명이다.인천공항=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