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시대」라는 분위기 탓일까. 영화계로 몰려드는 여성들이 부쩍 늘어났다. 아직은 연출이나 촬영 조명 등 제작부서보다는 영화를 기획하고 홍보하는 마케팅 분야 진출이 활발한 편이다.심재명(36) 명필름 이사는 이들 충무로 여성군단에 「우상」이자「꿈」이다. 서울극장 기획실의 말단 사원으로 출발, 지금은 당대최고의 감각을 인정받는 제작자로 우뚝 섰기 때문이다. 한 영화홍보사 직원은 장래희망을 묻는 기자에게 『심이사님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털어놓기도 했다.<코르셋 designtimesp=18109> <접속 designtimesp=18110> <조용한 가족 designtimesp=18111>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designtimesp=18112> 등이 그녀가 만들어 흥행타를 날린 작품들. 지난해에만 25억원을 벌어들였다. 충무로에서는 그녀가 「한국영화계에서 프로듀서란 직종을 개척한 선구자」라는 점도 높게 평가한다.잘 나가는 심재명에게도 「올챙이」시절은 있었다. 고등학생시절그녀는 빽바지입고 디스코장에 다니거나 극장을 기웃거리던 평범한소녀였다. 87년 동덕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처음 택한 직장도출판사였다.그녀의 인생이 바뀐 전기는 우연히 서울극장에 붙은 카피라이터 모집공고를 본 것이었다. 심이사는 『제작현장을 뛰는 연출부 일이었다면 지원할 엄두를 못냈을 거예요. 사무직이었고 좋아하는 영화일도 할수 있겠다싶어 원서를 내봤죠』라며 웃는다.서울극장에서 그녀가 처음 한 일은 홍보용 보도자료나 광고포스터의 선전문구를 쓰는 것이었다. 90년 극동스크린으로 옮겨서도 <미친 사랑의 노래 designtimesp=18115> <사의 찬미 designtimesp=18116> 등을 홍보했다.그리고는 프리랜서로 독립했다. 「이제는 내 이름을 걸고 일을 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첫 일감은 신씨네가 만든<결혼이야기 designtimesp=18117>의 홍보. 이 영화가 시쳇말로 「대박」 터지며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92년엔 명기획을 설립했다. 이즈음 남편 이은 감독을 만났다. 그는장산곶매란 단체에서 <오! 꿈의 나라 designtimesp=18120> <파업전야 designtimesp=18121> 등을 만들었던영화운동가. 제도권 영화로의 진출을 모색하던 남편과 함께 그녀는95년 명기획을 명필름으로 개편, 영화제작에도 뛰어들었다.심재명의 감각과 이은의 추진력이 결합되자 명필름은 단숨에 상업영화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92년 피카디리극장안 5평 남짓한 공간에서 출발한 사무실은 성북동의 대지 2백평, 건평 98평의 운치있는한옥으로 바뀌었다.심이사는 일과 가정을 영화속에서 얻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이지만 그녀는 『특별히 계획을 세우고 성공을 위해 뛰어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저 일이 재미있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느끼는 긴장감이 좋아서 정신없이 달려왔다는 것이다.인터뷰 도중 그녀가 자주 쓴 단어도 「막연히」 「재미있어서」였다.『물론 일이 좋다고만 되는 것은 아니죠. 영화에 대한 안목이 있어야 하고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되고. 무엇보다 영화를 만들어가며쌓이는 경험이 중요한데 시간과의 싸움인 것 같아요.』그녀는 지금도 일주일에 영화 1편, 비디오 3편은 반드시 본다.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대기업이철수후 달라진 영화제작 환경을감안, 명필름의 장기발전계획도 다시 짜고 있다. 하지만 외국의 유명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푸트남이나 제리 부룩하이머처럼 「제작심재명」이란 크레딧으로 좋은 영화를 많이 만들겠다는 그녀의 욕심은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