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1월초 노동부 장관실. 당시 진념 장관과 몇몇 기자들이다과를 곁들여 덕담을 나누고 있었다. 특별한 이슈가 없었던탓에 편안한 분위기였다. 진장관은 지나간 해의 번잡한 일상들을 늘어놓는가 하면 새해 노사관계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올해 기자 여러분들이 잘 도와주셔야 우리나라의 노사관계가 발전할 수 있다』는 요지였다.이어 기자들이 장관에게 덕담을 건넬 차례가 됐다. 누군가 『새해는 장관님도 재경원으로 자리를 옮기셔야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을 꺼냈다. 경제기획원 출신으로 사무관시절부터똑똑하기로 이름났던 진장관이었기에, 또 동력자원부 장관을거쳐 노동부장관으로서도 대과없이 업무를 처리해왔기에 누가봐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인사치레였다.그러나 진장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역대 정권치고 호남사람에게 정부 곳간 열쇠를 맡긴 적이 없어요』였다. 다시 말해경상도 정권아래서 호남출신 관료가 메이저 경제부처 장관을지낸적이 드물었고 기대도 하지않는다는 얘기였다. 진장관은전북 전주출신으로 전주고와 서울대 상대를 나왔다. 배석한기자들은 일순 당황했지만 워낙 세태가 그런줄 알고 있었던탓에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그랬던 진장관은 김대중정부 출범이후 막강한 권한을 지닌 기획예산위원장의 자리에 올랐다. 자신의 표현대로 「정부의 곳간」을 맡게된 것이다. 진장관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모를 일이다.김대중 대통령은 새해들어 호남출신의 경찰청장을 돌연 경질하고 후임에 영남출신을 임명했다. 이어 국무회의 석상에서장관들에게 『지역편중 인사가 있는지 점검해보라』는 지시를내렸다. 김대통령은 특히 일부 요직인사가 출신고교 중심의학연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를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같은 지시이후 건설교통부나 노동부는새해 정기인사를 보름이상 미뤄버렸다.◆ 호남편중 인사에 제동과연 그랬다. 사상 처음으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난 뒤, 지역적으로는 영남에서 호남으로 권력이 넘어오고난 뒤 우리 사회의 각분야에서는 호남인맥이 급부상했다.공공연히 MK(목포-광주)인맥이 거론되는가 하면 구정권의 호남차별인사를 근절하려면 호남인사들의 중용이 불가피하다는주장도 제기됐다. 그러나 이같은 경향이 호남편중인사로 흐르면서 도처에서 말썽이 야기됐고, 급기야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문제가 됐다. 이런 측면에서 김대통령이 정부내의 편중인사를 경고하고 나선 것은 시의적절했다는 지적이다.그렇다면 정권교체 뒤 관가의 인사패턴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사실 관료집단만큼 정치바람을 많이 타는 곳도 없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심지어 누가 장관으로 오느냐에 따라 양상이 달라지는 곳이 관가다. 권력 핵심층에 학맥과 인맥, 하다못해 지연이라도 연결시키지 못하면 정부의 핵심요직을 맡을수 없는 것이 그간의 현실이었다. 청와대나 정치권에 든든한빽이 없으면 관료로 장수할 수 없고 이른바 「출세」도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한경 BUSINESS designtimesp=18097>가 최근 재정경제부 외교통상부 산업자원부기획예산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정보통신부 노동부 건설교통부등 8개 경제부처의 본부 국장급(부이사관-이사관) 1백6명을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영남출신 국장들이 38명으로전체의 35.8%를 차지, 가장 많았다. 그러나 호남출신도 27명으로 전체의 25.5%를 차지, 전정권에 비해 상당히 높아진 비율을 보였다. 자민련의 「정치적 후원」을 받고 있는 충청권출신 관료의 약진도 두드러져 17.9%(19명)의 분포비율을 나타냈다.최근 동아일보가 조사한 「정부 3급이상 고위직 출신지역의분포도 변화」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97년 1월 영남출신 정부고위직 인사의 비중은 38.8%였던 반면 호남출신은17.0%에 불과했다. 그러나 99년 1월에 와서는 영남출신의 비율이 35.7%로 줄어들고 호남출신은 24.6%로 증가했다. 물론이같은 양상은 과거 정권의 편파인사를 시정하려는 차원에서진행된 것일 수도 있다. 이는 국민회의측의 주장이기도 하다.과거 경북고를 앞세운 TK(대구-경북)인맥은 박정희에서 노태우정권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을 풍미했고, 경남고를 필두로 한PK(부산-경남)인맥은 김영삼정권 아래서 절정기를 누렸다.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충원된 파워엘리트는 특정고교를 중심으로한 인맥으로 쪼개져 나갔고,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이익집단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겪어왔다.특히 영남인맥은 지난 수십년간 제한된 자원과 정보를 독점했다. 정치권과 관료집단에 이어 정부산하단체 및 민간금융기관과 기업들에도 영남위주의 인사관행이 깊은 뿌리를 내렸다.이 과정에서 호남인맥은 적지않은 불이익을 받았고, 정부내요직에서 배제되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존재했다. (진념장관처럼)그러나 정권이 「다른 지역」으로 넘어간 뒤 사정은 달라졌다. TK와 PK인사들은 약세를 면치못했다. 『같은 값이면 호남출신을 중용하는게 장관들의 생리가 돼버렸다』는게 모부처총무과장의 실토다. 호남출신이 많은 국민회의의 국회의원들에게 인사청탁이 많이 몰리는 것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빼어닮았다는 전언이다.그러나 한편으로 정부는 인사에 있어서 꽤나 균형감각을 유지하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종전 「경상도」정권처럼 정부내 요직을 독식하는 것만은 피하고 있다. 호남출신의 편중인사가문제시되긴 하지만 아직도 절대적으로 영남출신이 많은 실정이다. 또 누구보다도 「지역차별」과 「지역감정」의 피해를많이 입었던 김대통령이 공정한 인사에 상당한 신경을 기울인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어쨌든 경제부처 주요국장들을 출신고별로 분류해보면 경기고가 13명으로 가장 많고 그 뒤를 경북고(8명) 서울고(6명) 대전고(5명) 부산고(5명) 전주고(5명)등이 잇고 있다. 광주고와광주일고 출신도 각각 4명씩 포진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때와비교하면 경기고 출신이 맹위를 떨치는 양상은 비슷하지만 호남소재 고교출신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출신 대학별로는 서울대출신이 전체의 절반인 53명에 달하고 연세대(7명) 성균관대(6명) 한양대(6명) 고려대(5명) 육군사관학교(5명)등의 순으로 나타났다.부처별로는 재정경제부의 경우 충청권 인맥의 부상이 눈에 띈다. 본부 국장 19명중 6명이나 포진하고 있으며 이규성장관의고교(대전고)후배도 2명이 포함돼 있다. 이는 국민회의와 공동정권을 수립한 자민련이 경제부처의 인사에 상당한 입김을행사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영남과 호남출신은 각각 7명과5명으로 비교적 균형을 맞추고 있다. 97년말 구 재정경제원시절, 호남출신 국장이 단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상당히 대조적이다. 산업자원부는 정치인 출신인 박태영장관의 취임이후 호남세의 약진이 두드러진다는 평이다.건설교통부도 호남출신 국장(6명)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영남(8명)에 비해 전혀 밀리지 않는 양상이다. 노동부는 전통적으로 호남세가 드셌지만 지금은 영남출신(4명)이 오히려 1명더 많다. 또 금융감독위원회는 상근 국장급이상 간부 8명중호남이 4명으로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산하기관인 금융감독원의 경우도 임원 12명중 호남출신이 4명에 달하고 있다.그러다보니 영남출신 관료들의 불만이 작지는 않다. 『얼핏영-호남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경제부처내 호남출신 관료들의 숫자는 영남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다. 재경부의 경우 웬만큼 자격을 갖춘 호남인사들은 벌써 요직을 꿰차고 앉았다. 청와대 경제비서실을 보더라도 마찬가지다』(경북고출신 재경부 관료)라는 얘기는 분명히 설득력을갖고 있다.또 아무리 정실인사의 부당함을 역설하더라도 정서적으로 가까운 사람에게 점수를 더 주는 관행도 무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특히 그동안 영남정권(?)치하에서 핍박(?)을 받은 사람들간에 형성돼 있는 강한 동질성은 쉽게 허물기 어려운 것이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관료 발굴 중요이렇게 보면 현정부도 특정지역 출신의 약진에 지연과 정실이개입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만은 없는 현실이다. 지금까지는 정권교체에 따른 부산물로 너그럽게(?) 이해돼왔지만지속될 경우는 상당한 부작용이 예상된다는 지적이다. 더욱이특정지역 출신들이 「위에서 끌어주고 밑에서 밀어주는」 관계를 은연중에 맺고 배타적 영역을 형성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관료의 발굴은 요원하다는 것이다.누구나 능력과 전문성, 청렴성과 헌신성을 인사의 잣대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인사가 만사(萬事)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 망사(亡事)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경험적으로 알고있다. 지금껏 합리적인 인사관리의 방법을 몰라서 못한 것이아니다. 문제는 정부의 의지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관료의 자질이다. 『인사라는 용어 뒤에 「태풍」이 붙지않는날이 왔으면 좋겠다. 인사뒤의 뒤숭숭한 뒷얘기들도 듣기 싫다』는 건설교통부 젊은 사무관의 하소연을 더 이상 흘려들을수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