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치오 가쿠 지음/김승욱 옮김/작가정신/2000년/1만8천원/626쪽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는 ‘미래’는 구체적·과학적 실체이기보다는 하나의 막연한 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컴퓨터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 환경오염이나 핵으로 춥고 긴 겨울을 맞는 인류, 철통같은 정보기관이 사회를 장악한 숨막히는 세상 등등. 현대인들에게 이같은 미래상을 제시한 것은 다름아닌 영화다. 요즘처럼 영화가 대중적인 오락이 되기 전에는 과학소설 SF가 이 역할을 맡고 있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designtimesp=19812>나 쥘 베르느의 <해저 2만리 designtimesp=19813>같은 책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와 놀랍도록 유사한 세계를 18세기 사람들에게 묘사해주었다.이와 같이 그간 미래에 대한 예측을 담당했던 것은 저술가 언론인 사회학자 소설가 등이었는데, 그들은 ‘기술을 창조하는’ 이들이 아니라 ‘기술의 소비자들’ 이었다.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이자 이론물리학자인 미치오 가쿠 교수가 지은 <비전 2003 designtimesp=19816>은 이런 점에서 확연히 구별되는, 실증적인 미래예측서다. 그는 물리학자들이 미래의 윤곽을 예측하는데 다른 어느 집단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신의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세계적인 과학자 1백50명을 인터뷰해 이 책을 썼다.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월터 길버트 하버드대 교수, <코스모스 designtimesp=19819>라는 저서로 유명한 코넬대 행성연구소장 칼 세이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스티브 와인버그, 마이클 더투조스 MIT 컴퓨터 공학연구소장 등 그야말로 ‘저명한’ 과학자들이 이 인터뷰 명단에 들어 있다.저자는 “21세기를 이끌어갈 3대 과학기술은 양자공학, 컴퓨터 공학, 생명공학이다. 이 세 첨단분야의 혁명 없이는 어떤 기업도 국가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들이 정보 생명 물질이라는 현대과학의 핵심분야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원저는 1997년에 처음 출간됐다. 약삭빠른 이들은 최근 컴퓨터관련주와 바이오주가 차례로 각광 받은 사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그러나 가쿠 교수가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세 분야의 유기적 결합이다. 지난 세기들과 달리 21세기에는 세 분야의 결합이 상승효과를 일으켜 변화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생명공학에 뛰어든 생물학자들은 한때 유전자의 비밀을 풀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컴퓨터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유전자 서열을 푸는 작업을 할 수 있게 됐다. 컴퓨터혁명이 생명공학의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 저자는 이런 예를 들면서 세 분야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저자가 예측한대로 변화의 속도는 믿기 어려울 만큼 빨라져, 책이 나온지 3년이 지난 지금 컴퓨터에 관한 내용은 상당 부분이 이미 옛 얘기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 게놈 프로젝트, 암 등 불치병 치료 가능성, 유전자 조작과 우주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주제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교양과학서로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