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벤처투자를 재개하고 있는 벤처캐피털들이 올 초의 '묻지마 투자'와는 다른 투자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KTB네트워크.‘거품론’ 등으로 극도로 자제되던 벤처투자가 요즘 들어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투자재원이 남아 있는 우량 벤처캐피털 중심으로 다시 투자가 시작되고 있는 것. 이는 ‘이제 거품이 빠질만큼 빠졌다’ ‘바로 지금이 좋은 업체들의 주식을 싼 가격에 인수할 수 있는 기회다’라는 인식이 벤처캐피털 업계에 확산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벤처투자는 2~3년 정도 뒤에 회수할 목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보통이다. 따라서 현재의 코스닥 침체 등에 영향을 받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한미창투 이영민 부장의 말은 투자 재개의 근본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하지만 투자에 다시 나선 벤처캐피털들은 올 초의 ‘묻지마 투자’와는 다른 투자 원칙과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투자 업종은 물론 투자 유형, 투자의사 결정 과정 등이 이전과 확실히 차이가 난다. 달라진 벤처캐피털들의 투자 행태를 하나하나 짚어본다.◆ 구조조정 투자에 나선다퇴출과 회생 등 구조조정은 최근 한국경제 최대의 화두다. 이와 함께 구조조정 투자 열기가 거세다. 그 가운데 벤처캐피털의 양대 산맥인 KTB네트워크와 한국기술투자(KTIC)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동양토탈 와이즈콘트롤 등에 성공적인 구조조정 투자를 마친 KTB네트워크와 대규모 펀드를 결성하고 현대정보기술 아세아조인트 등에 투자했던 KTIC는 최근 거래소 관리종목인 동신제약에 각각 약 33억원의 구조조정 자금을 투자했다. 그동안 코스닥 업체에만 주로 타깃을 맞춰 온 이들이 독자적인 기술력을 갖춘 거래소 업체에까지 눈을 돌린 의미있는 신호탄이었다.구조조정 투자는 대상 기업의 기존 경영실적이 공개돼 있기 때문에 이를 분석해서 비효율적인 요소를 직접 제거해 가면서 투자할 수 있다. 따라서 벤처투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높은 것이 특징. 요즘처럼 앞으로의 상황이 불확실해 장기간 자금을 묶어두기 곤란한 벤처캐피털 입장에선 분명 이점이 있는 투자방식이다. KTB네트워크의 구조조정 투자를 책임지고 있는 김한섭 상무는 “투자재원의 20~30% 가량을 구조조정 투자재원으로 돌려놓고 있다”며 “시장의 불확실성이 가셨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구조조정 투자를 계속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KTB네트워크와 KTIC 외의 다른 구조조정 전문회사와 중소 벤처캐피털들도 장내외 업체의 구주인수 등 구조조정 투자에 적극 나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 특히 이미 공개된 기업에 대한 투자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짜는투자포트폴리오투자의 물꼬는 터졌지만 테헤란밸리의 자금난은 여전히 심각하다. 왜 그럴까. 벤처캐피털들이 닷컴기업은 철저히 외면한 채 제조업체 중심으로 투자를 집행하고 있기 때문이다.“많은 닷컴기업들이 유료화 추진, 조직개편, 수익성 강화 등으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 역부족인 것 같다. 전세계적으로 선발 닷컴기업들마저 고전하고 있는 요즘 상황에서 누가 선뜻 투자하려고 하겠는가.”(이창수 플래티넘기술투자 사장)요즘 벤처 심사역들은 성장성보다는 수익성을 철저히 따진다. 그럴듯한 사업계획보다는 확실한 실적을 우선시한다는 말이다. 자연히 닷컴기업들은 ‘찬밥’ 신세로 전락했고 장기간의 기술개발이 필요한 바이오 업체들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대신 현금 흐름이 좋은 온라인게임이나 실적이 뒷받침되는 정보통신 및 반도체 분야 등의 장비 업체들이 각광받고 있다. 또 지방공단 등에서 소외받던 굴뚝기업들도 좋은 투자 타깃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기존의 사업기반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 첨단 사업에 새롭게 진출하는 제조업체들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물론 성장성보다는 안정성에 무게가 실린 이들에겐 낮은 배수로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장기간의 투자침체로 거품이 많이 빠졌다. 아직까지 높은 배수를 주장하는 업체들도 있지만 코스닥 동종 기업의 현재 PER(주가수익비율)와 비교해 보라고 하면 대개 할 말을 잃는다.”(서학수 마일스톤벤처투자 사장)◆ 듀 딜리전스(Due Diligence·충분한 실사) 강화투자심사 과정이 철저해진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많은 투자자산이 묶여있고 조합결성 등으로 신규 재원도 마련하기 힘들어진 요즘 상황에선 벤처캐피털들은 ‘확신’이 서지 않으면 투자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전처럼 사업계획서만 보거나 경영진들을 회사로 불러 프리젠테이션을 듣고 투자를 결정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실제 생산 현장을 찾아가서 꼼꼼히 기술력을 분석하고 매출 전망을 추론하는 과정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로 통한다.“일주일에 3~4일을 현지 답사로 보내는 심사역들이 많아졌다”는 드림벤처캐피탈 이태영 이사는 “한 차례 혼이 난 심사역들이 이제 ‘듀 딜리전스’라는 실리콘밸리식 투자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설명했다.투자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몇몇 기관들이 컨소시엄을 만들어 조금씩 금액을 나눠 투자하는 것도 하나의 트렌드다. “이전엔 좋은 업체를 발굴하면 다른 벤처캐피털들에 빼앗기지 않고 단독으로 거액을 투자하려는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리스크를 나누기 위해 컨소시엄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삼성물산 골든게이트팀 문영우 부장은 말했다.이같은 현상은 1년 뒤 회수할 수 있는 업체와 2~3년 뒤 혹은 5~6년 뒤 회수할 수 있는 업체에 골고루 나눠 투자하는 포트폴리오 투자관행이 정착되고 있다는 것도 함께 암시한다. 같은 위험회피 맥락에서 신주인수외에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 인수방식을 병행해 투자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인터뷰 / 이준호 한국기술투자 구조조정사업부 팀장“불평등 규제 완화돼야 투자 활기”“벤처투자 패턴이 1년 전과는 확실히 많이 달라졌어요. 시행착오를 거쳐 선진 벤처투자 문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직 보완할 점이 많습니다.”한국기술투자(KTIC) 구조조정사업부 이준호 팀장은 말한다. 서울대 자연대 및 환경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장기신용은행과 주택은행에서 여신심사와 기업분석을 맡다 지난해 KTIC로 자리를 옮겼다. 일반 여신과 벤처투자 구조조정투자 등을 모두 해 본 그는 “한 차례 벤처투자 빙하기를 거쳐 조금씩 투자가 시작되고 있지만 본격적인 열기가 살아나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설명한다.“M&A나 A&D, 구조조정 투자 등이 활발해진다는 건 그만큼 투자기법의 선진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불확실한 시장상황과 규제 등이 적극적인 벤처투자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대표적인 것이 벤처캐피털이 투자한 기업의 지분매각을 제한하는 코스닥위원회의 기준 등이라고. “초기에 투자한 벤처캐피털의 지분은 못 팔게 하고 등록 바로 전에 주식을 사들인 증권사나 투신사의 매각을 허용하는 것은 분명 형평성에 어긋납니다. 씨앗을 뿌린 농부는 곡식을 못 팔고 수확기에 밭떼기로 산 도매상은 팔아도 된다는 격이죠.”오히려 불평등한 지분매각 제한은 나쁜 의도로 역이용될 경우 정상적인 주가형성에 큰 방해가 될 소지가 있고 벤처캐피털이 재투자 재원을 확보하는 선순환을 저해하는 측면도 강해 재검토돼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아울러 환경분야 전문 심사역으로 유명한 그는 “코스닥이 뜨면서 벤처투자가 열기를 뿜고 반대로 코스닥이 가라앉으면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지금 상황은 이해하기 힘들다”며 “이런 현상은 투자의 전문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결과”라고 분석했다.“경기가 어떻게 되든 기업가치만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면 투자를 못 할 이유가 없죠. 오히려 요즘 같은 때가 정말 기회입니다. 실제 활황기에 투자한 업체들의 평균수익률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난해 대박을 터뜨린 업체들은 외환위기가 시작되던 시절에 투자한 업체들이 대부분이었지요.”닷컴기업들이 철저히 소외받고 있는 현실에 대해선 “수익성을 문제로 무조건 외면하는 건 문제가 있다. 이 보다는 등록취소 요건의 강화 등을 통해 건전한 기업을 선별하고 이들이 기술개발을 통해 장기적인 수익을 추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구체적인 수익모델을 내건 옥션 네오위즈 네이버컴 등이 여전히 선전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는 것. 벤처캐피털들이 닷컴기업에 ‘묻지마 투자’로 몰렸다 다시 제조업체로 썰물 빠지듯 몰려가는 냄비 두껑식 투자문화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