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1일, 경기도 반월 공단에는 여전히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한산하던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공단본부와 은행 등 지원시설이 몰려 있는 공단 인근의 중국집, 칼국수집 등 서민형 음식점들은 모두 점심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건너편 상가에서 복집을 운영하는 김모씨 가게는 사정이 정반대. 김씨는 “작년 하반기 이래 매상이 계속 떨어져 하루 매상이 10만원도 안되는 날이 부지기수”라며 한숨을 쉬었다. 같은 건물 일식당의 사정도 비슷했다. 반월공단 입주 직원들의 주머니 사정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사정이 나쁘기는 반월공단 입주업체들도 마찬가지다. 공단에서 만난 기업인들은 올 경기에 대해 다소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다.반월공단내 반도체 부품 제작사인 에쎌텍의 정승민 이사는 “다들 설 이후 조금씩 회복되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는 품고 있었지만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다”며 “올해 매출을 크게 늘려 잡은 업체들을 공단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을 볼때 경기회복에 비관적이다”라고 나름대로 분석했다.“1월 수주량 제로, 뭘 먹고 사나” 한숨반월공단내 염색업체인 B사의 경우 수출과 내수시장 비율이 각각 50% 정도씩 됐으나 하반기들어 수출길이 막히고 내수시장까지 얼어붙은데다 금융기관에서 빌린 자금이 만기가 되어 연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이것마저 거절당해 운영자금 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인천시 남동공단내 전자부품 생산업체인 P전자는 대기업 협력업체로 올해 정책자금도 지원받았으나 지난해 하반기 이후 내수가 위축되면서 모기업의 주문량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물품대금은 3개월 어음으로 결제한뒤 만기가 도래하면 다시 1개월짜리 어음으로 교환해줘 자금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경기도 안산시 시화공단내에 위치한 태림포장공업 조병한 전무도 비슷한 분위기를 전했다. 포장재로 쓰이는 골판지 제작업계 1위인 이 회사는 공단내 대표적인 우량기업 중 하나지만 매출이나 수주량은 작년부터 주춤해져 기대치를 밑돌고 있다. 올해 매출 목표도 10%만 상향조정했을 따름이다. 골판지 매출은 순전히 국내 시장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 더구나 전자, 섬유, 농산물 등 전업종에서 포장재로 사용하는 골판지 주문은 매출과 거의 동시에 이뤄지기 때문에 시차 없이 경기를 즉각 반영한다고 보아도 좋다는게 조전무의 설명이다.PC부품 제조업체인 동인엔지니어링 서동일 사장은 “작년 12월과 올 1월이 제일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특히 1월에는 수주량이 거의 0에 가까웠다”고 하소연했다. 서사장은 2월에도 지난해 11월 수주량의 40% 가량밖에 회복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한국산업단지공단 서부지역본부에 따르면 반월·시화공단의 공장가동률은 지난해 11월 82.2%, 12월 81.5%로 지난해 1/4분기 이후 계속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반월 공단본부 현황통계 담당 김형규씨는 “지난 1월 공장 가동률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인천지역 어음부도율 한달새 5배 증가또 통계청에 따르면 반월·시화 남동공단 등 경기지방의 어음 부도율은 지난해 10월 0.23%, 11월 0.20%로 전년 0.16%보다 여전히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안산지역의 공단뿐 아니라 대우자동차 정상화가 지지부진하면서 여전히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남동공단은 말할 것도 없는 상황이다. 인천지역의 어음부도율은 지난해 10월 0.24%에서 11월 1.05%로 무려 5배나 뛰었다.공단사정이 이 지경이다 보니 기업들의 자금수요마저 없는 형국이다.기업들이 생산·설비투자를 하지않고 있으며 이에따라 운전자금 소요도 줄어드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은행 반월지점은 약 7백여개의 중소기업과 거래하는데, 지난 한달 동안 투자 목적의 대출은 3건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기업은행 반월지점 대부계 윤목현 과장은 “구매나 투자 대출 상담은 거의 없고, 운전자금 대출도 매우 적다”고 말했다. 매출이 늘어야 구매 비용등 운전 자금이 필요할 텐데 지난해부터 계속 매출이 계속 하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은행측의 설명이다. 공단본부쪽에서는 “일부 기업들은 IMF를 겪으며 자체 구조조정을 완료한 상태로 올 하반기 경기전망을 미리 예견하고 있던 터라 돈의 씀씀이를 줄이고 투자도 되도록이면 감축시키며 경기가 좋아지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귀띔했다.특히 영세기업들은 대기업의 부도여파로 중견기업들이 앞다퉈 수주와 투자를 줄이는데다 금융기관들마저 대출과 어음할인을 기피, 하루하루를 견디기가 어려운 상태다. 지방공단내에는 수출은 줄고 내수시장의 침체까지 이어지면서 공장 창고마다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는 실정이다. 경기가 바닥을 치고 상승곡선을 타기시작했다는 최근 일련의 정부 발표를 무색하게 하는 대목이다.한편 신국환 산업자원부장관은 지난달 28일 남동공단을 관리하고 있는 한국산업단지 경인지역본부를 들러 대우자동차 부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우 협력업체 및 관련 기업체 대표들과 간담회를 갖고 최근 생산활동 등에 대한 애로사항을 청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