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손님을 끌어모으려면 도쿄역 주변으로 가라’.도쿄에서도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 중의 하나로 꼽히는 도쿄역 일대가 총성없는 전쟁터로 돌변했다. 일본 유수의 명문대학들이 벌이는 학생 유치경쟁 때문이다. 경쟁이라는 단어를 붙였지만 이들 학교의 타깃은 고교생이 아니다.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생활 중인 직장인들이다.도쿄역 일대가 도심 한복판의 또 다른 캠퍼스로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 시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사이타마 대학이 지난 2000년 4월 긴자 쪽으로 향하는 도쿄역 부근에 ‘도쿄스테이션 칼리지’라는 이름으로 대학원 경제학과를 설치한 것이 출발점이다.하지만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일어난 변화는 일본 언론과 대학 관계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진행 속도가 초스피드다. 모여든 대학들의 얼굴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사학의 양대 명문으로 손꼽히는 게이오, 와세다는 물론 서부지역 간사이 지방의 명문 국립대인 교토대도 이름을 내밀고 있다.최근에는 도쿄대와 미국의 하버드대도 이 일대에 거점을 확보했으며 스웨덴의 스톡홀름대도 연구센터를 설치할 계획이다. 이들 대학은 경영대학원이나 비즈니스 과정을 집중 개설, 지적 욕구에 목말라 하면서도 시간이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샐러리맨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이에 따라 도쿄역을 중심으로 한 반경 2~3㎞의 지역은 각 대학들이 운영 중인 위성교실로 지도가 확 바뀌고 있다. 게이오대학의 강좌는 이 대학 특유의 비즈니스 수완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도쿄역의 한 통로와 연결된 빌딩에서 정기적으로 여는 강좌에 게이오대는 ‘마루노우치 시티 캠퍼스’라는 명칭을 붙여놓고 있다. 대학원 과정이 아니고 석사 학위를 주는 것도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저녁에 열리는 강좌는 언제나 만원이다.1회 참가에 5,250엔(250엔은 소비세)을 받지만 강사진들의 프로필이 워낙 화려해서다. 게이오는 첨단과학, 금융, 거시경제 등 각 분야에서 내노라하는 유명 학자와 인사들을 초빙, 강의를 들려주고 있다. 부도를 내고 쓰러진 기업인이 등장, “이렇게 하면 실패하니 절대로 다른 길을 가라”고 일러주는 경우도 있다. 무분별한 확장경영으로 수년 전 도산한 유통그룹 ‘야오한’의 와다 가즈오 회장이 대표적 인물이다.와세다가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 캠퍼스도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다. ‘엑스텐션 센터 핫초보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 위성교실은 비즈니스 강좌 외에도 도쿄의 옛문화와 역사를 가르치는 에도(에도는 도쿄의 옛날 이름)학 등을 개설, 인기를 누리고 있다.100종 이상의 강좌를 개설해 놓고 있는 이 캠퍼스에는 상시 수강인원이 3,000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이타마대학은 석사학위를 딸 수 있는 정규대학원 코스라는 점을 매력으로 내세우고 있다.관료와 벤처 비즈니스업계에서 활약하는 엘리트 인사들을 수시로 외부 강사로 초빙,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이미 텃밭을 굳힌 이들 3개 대학 외에 도쿄대학의 움직임도 비상한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도쿄대학은 도쿄역에서 천황의 황거를 바라보는 장소에 미쓰비시 그룹이 건립 중인 마루빌딩에 둥지를 틀기로 확정했다. 높이 37층의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지어지는 이 건물은 완공시기가 오는 9월로 잡혀 있다. 그러나 지난 3월의 공시지가 발표시 일본에서 가장 비싼 땅 위에 세워진 것으로 공표되는 등 벌써부터 수많은 화제를 뿌리고 있다.도쿄대는 이 빌딩 9층에 경제학부의 ‘서치라이트 오피스’를 개설할 방침이다. 기업들로부터 위탁받은 연구 및 대학원생들의 실습 연구 거점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 학교측 구상이다. 도쿄대는 게이오대처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공개강좌 및 세미나도 열 계획으로 있어 수강생 확보 경쟁도 새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거시경제를 중시해온 이 대학 경제학부는 국립대학의 성격을 감안, 기업들의 위탁연구를 원칙적으로 회피해 왔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교육개혁과 국가재정 건전화 계획에 따라 살림살이가 합리화와 책임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자 수익확보에도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다카하시 노부오 교수는“마루빌딩에 들어설 연구거점을 발판으로 앞으로 산업계와 보다 긴밀한 접촉을 가지겠다”고 밝혀 도쿄대의 구상이 어디를 지향하는지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마루빌딩에는 하버드대와 스톡홀름대도 같은 시기에 거점을 설치키로 돼 있어 이들의 행보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하버드대는 일본 리서치센터를 설립, 일본의 구조개혁과 불량채권 처리에 따른 금융계 변화 등 최신자료 수집과 연구활동을 진행할 방침이다. 교수요원이 상주하지 않고 강의도 없지만 경제계와의 공동세미나 및 일본 대학들과의 연구를 위한 최전방 거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하버드대는 일본 경제가 흔들리면서 일본 기업들의 미국시장 철수가 잇따르자 정확한 자료수집, 연구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도쿄 진출을 결정했다. 스톡홀름대는 지난 1997년 일본에 사무소를 개설한 데 이어 마루빌딩 입주를 계기로 연구, 기업정보 수집 활동을 대폭 강화할 방침이다.도쿄역에 포진한 대학들이라고 모두 도쿄에 본교를 둔 것은 아니다. 노벨상 수상자를 일본에서 가장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교토대학은 도쿄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데이코쿠 호텔 내에 거점을 마련해 놓고 있다.2001년 6월 문을 연 이곳을 통해 교토대는 도쿄 일대에 대한 정보발신 및 기업들과의 제휴, 연락업무를 기민하게 처리해 나가고 있다. 또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공개강좌 개설도 추진 중이다.도쿄역 일대의 샐러리맨을 겨냥하는 대학들이 몽땅 비즈니스 계통은 아니다. 직장인들의 정서를 풍요롭게 해주고, 문화적 욕구를 채워줄 예술 부문의 위성교실도 자리잡고 있다.교토조형예술대학은 일본 동북부지방의 도호쿠예술공과대와 손잡고 도쿄 캠퍼스를 운영하고 있다. 도쿄역 인근의 니혼바시 일대에 2001년 4월 설치된 두 대학의 공동 위성교실은 ‘서부’와 ‘동북부’지역의 학교가 힘을 합쳤다는 점에서 개설 초부터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일본 대학들의 도쿄역 밀집은 일차적으로 재정난에 배경을 두고 있다. 대학의 ‘손님’인 학생들의 수가 절대인구 감소로 해마다 줄고 있는 상황에서 재정난을 타개할 비상구를 대학원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직장인들의 욕구에 맞는 교과과정을 집중적으로 개발, 직장인 대학원생을 크게 늘리지 않는 한 다른 곳에서는 수입이 늘어날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는 계산이다. 신규 수입원 확보에 매달리다 보니 대학원생 확보와 유료강좌 개설에 팔을 걷어 붙이게 되고, 이러다 보니 샐러리맨 밀집지역인 도쿄역 일대가 물이 좋은 곳으로 꼽히게 된 셈이다.도쿄역 일대는 금융기관 밀집 지역인 ‘오테마치’와 황거 앞의 ‘마루노우치’를 끼고 있어 고소득 화이트 칼라의 메카로 불릴 정도다. 미쓰비시그룹의 각 계열사가 빽빽이 들어찬 마루노우치 일대의 경우 4,100여개 기업, 24만여명의 임직원이 근무하고 있다.도쿄역 부근으로 향하는 일본 대학들의 행렬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시가현 시가대 경제학과의 아리마 도시오 교수는 “대학들이 직장인을 한 명이라도 더 유치하려면 도심 캠퍼스를 내는 것이 효과가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는 “기업 자체의 수요도 왕성할 뿐 아니라 정보, 돈, 인재가 모인 도쿄는 최적의 여건을 갖고 있다”면서 “도쿄 심장부를 향한 대학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yangsd@hankyung. 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