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선보인 ‘Day - SOKO’, 창고업계 불황 걷어낼 뉴비즈니스로 기대
항구를 끼고 있는 화물창고들의 운명은 한마디로 항구 자체에 달려 있다. 항구를 드나드는 배가 많아지면 거리는 활기로 가득 차고, 창고 역시 화물로 넘쳐나지만 상황이 바뀌면 그림이 싹 달라진다.배가 끊기고 화물이 자취를 감추면 창고는 단숨에 무용지물로 변한다. 보관할 화물이 없어진 창고는 쓸데없이 공간만 차지하며 주변 풍경을 을씨년스럽게 만드는 도시의 흉물이 되기 일쑤다.이 같은 면에서 볼 때 일본의 심장인 도쿄의 바닷가에 군데군데 서 있는 화물창고들은 창고회사 경영자들에게 한결같은 고민거리다. 일본경제가 죽을 쑤고 이에 비례해 도쿄항의 화물취급량이 해마다 내리막길을 걷자 늘어나는 빈 공간을 채울 길이 막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올해 68세의 할머니 사장 기타가와 요코씨가 이끄는 쓰키시마창고는 창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선입견을 버린 새로운 발상으로 주목받고 있는 업체다. ‘기업들을 상대로’ ‘덩치 큰 수출입화물’만 전문으로 취급해 왔던 과거의 영업방식에서 전환, ‘개인’을 대상으로 ‘소규모 짐’ 시장을 적극 파고들면서 창고영업에 새 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것이다.1946년에 설립된 쓰키시마 창고는 자본금 2억엔에 연간매출이 약 80억엔에 달해 창고업계에서 중간 정도를 달리는 회사다. 회사의 역사나 종업원(160여명) 규모에서도 상위에는 들기 어려워 3,800여개사가 버티고 있는 일본의 창고업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기 힘든 업체다.그러나 이 회사가 2000년 8월부터 선보인 최신 짐 보관 서비스 ‘Day-SOKO’는 동종업계는 물론 일본언론과 유통업체들로부터도 창고업계의 불황을 걷어낼 뉴비즈니스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Day-SOKO’ 서비스는 고객으로부터 위탁받은 짐을 1개당 최저 10엔을 받고 보관해준다. 짐에 따라 보관료도 다양하며, 단 1개라도 맡아준다. 고객이 원하기만 하면 보관기간은 단 하루가 될 수도 있다.고객은 인터넷을 통해 신청하고 짐을 가져가라고 주문해 놓으면 된다. 짐 운송을 회사측에 맡기기 싫다면 자신이 직접 갖다 주거나 택배회사를 통해 보내도 된다. 찾을 때도 마찬가지다. 보관료는 귤을 담는 종이상자 크기의 것이 1일 10엔, 골프백은 20엔이다. 두 사람이 걸터앉을 정도의 소파는 190엔을 받고 있다. 부피로 요금을 결정하는 방식이다.스미다강과 도쿄만의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잡은 연면적 2,000평 규모의 이 회사 창고는 이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언제나 1,500~2,000개씩의 ‘Day-SOKO’ 짐이 들어차 있다.많을 경우는 1만개에 육박할 때도 있다. 종이상자에 들어 있는 것은 ‘잡지’ ‘서류’ 등의 설명을 기재해 쌓아놓는 한편 냉장고, 자전거 등은 창고 바닥에 나란히 늘어놓고 있다.이용고객이 늘어나고 소리 소문 없이 단골이 생겨나면서 맡겨지는 짐도 부쩍 다양해지고 있다. 시골에서 올라오는 부모의 잠잘 공간이 없다면서 집에서 쓰던 소파를 맡긴 독신자가 있는가 하면 버릴 수는 없지만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다며 졸업앨범을 보내오는 사람도 있다. 개인을 메인 타깃으로 시작한 서비스이지만 벤처 등의 중소기업과 소호(SOHO)사업자들로 고객층이 다양해지고 있다.따라서 회사측은 “박리다매식의 장사법이라 아직 별 수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한 번 이용한 고객은 반드시 다시 찾는다”며 밝은 앞날을 자신하고 있다. 주거공간이 협소한 도시인들의 잠재적 불만을 간파해 이들의 가려운 구석을 긁어준 것이 빈 공간을 살리고 신종 수익원으로 뿌리내린 소득을 가져다준 것이다.회사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기타가와 요코 사장은 원래 기업인이 아니었다. 교풍이 점잖기로 유명한 가톨릭계의 세이신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얼마 안 있어 결혼한 후 가사에만 전념한 주부였다.일본 황실의 미치코 황후가 기타가와 사장의 동급생이었다. 주부시절 유화 그리기로 시간을 달랬던 그녀는 취미삼아 영어교재 판매원과 여론조사원 등의 일을 잠시 하기도 했다. 그러나 40대 중반이 되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의와 함께 일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밀려왔다.쓰키시마 창고의 창업자인 부친의 뒤를 이어 사장자리를 맡고 있던 남편과 상의, 정보전산부서를 담당하는 일로 회사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남편이 92년 폐암으로 쓰러지자 사장자리를 맡게 됐다. 지난 93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종업원과 그들의 가정을 명실상부하게 책임지는 최고경영자로 회사의 전면에 나섰다.개인·소량·인터넷 승리의 3법칙일본언론은 일본 창고업계의 새 이정표를 제시한 ‘Day-SOKO’가 여성경영자인 기타가와 사장 특유의 섬세함과 빠른 두뇌회전에서 나온 작품이라며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단순히 덩치 큰 화물만 넣고 빼는 것으로 생각해 온 창고를 누구나 쉽게 찾고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한 보관장소로 인식을 바꾼 것이야말로 기타가와 사장의 큰 공로라는 것이다.기타가와 사장은 박리다매식의 보관서비스를 시작할 때 3가지 요소를 가장 집중적으로 고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녀는 경제가 내리막길을 달릴수록 기업 물건에 목을 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판단하고 ‘개인’ 주변에서 잠재수요를 캐기로 했다.또 개인고객을 찾아나서려면 덩치 큰 화물보다 잔짐이 많을 것이라고 믿고 이를 저렴한 가격에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염두에 둔 것이 인터넷이었다. 가격거품을 빼고 이용고객들에게도 염가,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인터넷 활용은 필수적이라는 게 당시 기타가와 사장의 판단이었다.인터넷으로 회원등록을 받고 보관신청, 물건인도 등을 지정한다면 불필요한 관리비용은 그다지 많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녀의 확신이었다. 개인, 소량, 인터넷을 승리의 3법칙으로 삼은 셈이었다.‘Day-SOKO’ 서비스는 유통업계로부터도 러브콜의 대상이 됐다. 일본 최대의 유통그룹 이토요카도는 이 서비스의 장래성을 밝게 보고 올 여름부터 쓰키시마와 손잡고 중개사업에 나서기로 했다.일본 전국에 깔린 이토요카도그룹의 슈퍼마켓과 편의점 영업망을 통해 짐 보관 신청을 대신 받아주기로 한 것이다. 따라서 창고, 유통업계는 온라인에서만 고객확보에 나섰던 종전과 달리 편의점, 슈퍼마켓 등의 매장에서도 신규고객을 만나게 될 경우 ‘Day-SOKO’ 서비스는 급성장 궤도로 올라설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기타가와 사장은 짐 보관 서비스가 대중화에 성공할 경우 쓰키시마 창고가 일본인 가정의 벽장 역할을 대신할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계절이 맞지 않아 사용하지 않는 이불과 잡동사니로 가득 찬 벽장을 자신의 회사 창고로 대체한다면 고객들은 더욱 쾌적한 공간활용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게 기타가와 사장의 자신감이다.이불과 입지 않는 옷을 비롯한 생활도구는 ‘Day-SOKO’에 맡긴 후 좁은 공간을 한 뼘이라도 늘려 쓰도록 한다면 서민들의 라이프스타일에도 혁명적 변화가 생겨날 것이라고 그녀는 보고 있다.“쓰지 않고 버리게 된 것을 재활용해야 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사업도 (쓸모없어진 창고 공간을 이용한) 재활용이나 마찬가지입니다.”기타가와 사장은 “장사가 안될 것 같다고 제쳐둔 것들도 이제는 돈벌이가 될 만한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집안 살림 등으로) 여성들이 불편을 겪는 분야야말로 새로운 비즈니스의 기회가 많이 숨겨져 있는 곳”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