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직 노조에 반기 든 화이트칼라들
‘인국공 사태’부터 성과급 불만까지 공정성에 대한 누적된 분노가 기폭제
‘블라인드’로 헤쳐 모여 노사 협상 주축으로 떠오른 MZ세대
LG전자 이어 현대차에서도 사무직 노조 설립 이끌어
최근 LG전자에서는 사무직 중심의 노조가 출범했고 현대차그룹에서도 사무직 노조 설립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노동 운동에 소극적이었던 ‘화이트칼라(전문 사무직)’들이 별도 노조 설립으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공장 노동자보다 대체적으로 편한 일터에서 위험하지 않은 일을 한다고 노사 관계에서 배제돼왔던 것이 사실이다.
MZ세대가 주축인 사무직 노조는 기존 생산직 노조와 다른 느슨한 연대를 지향하며 노동 운동에 새로운 지형을 만들고 있다. 사무직 노조의 본격적인 등장으로 노사 관계도 변화의 변곡점을 맞이했다는 분석이다. 이들로 인해 화이트칼라 노조가 기업 전반으로 확산될지 주목된다. 역사상 공정성에 가장 민감한 세대
사무직 노조 설립을 주도하는 주축은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 직원들이다. 상명하복에 익숙한 기성세대와 달리 MZ세대는 소통과 공정성·투명성을 중시하는 특성을 지녔다. 이들은 직장인 익명 애플리케이션(앱) ‘블라인드’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의견을 나누고 소셜 미디어에서 결집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성과급 체계 개선과 사무직 노조 설립 이슈에 대해 MZ세대가 바라보는 공정성에 대한 개념이 기성세대와 현저하게 달라진 괴리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본다.
최근 대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과급 논란과 사무직 노조 설립 움직임은 지난해 뜨거운 이슈였던 ‘인국공(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와 동일한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MZ세대가 절차에 대한 공정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대라는 것은 인국공 사태에서 이미 드러났다. 인국공 사태는 인천국제공항공사가 비정규직인 보안검색원 2000여 명을 청원경찰로 직접 고용한다고 발표하면서 촉발됐다.
기성세대는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고 생각했으나 청년세대는 공정한 절차라고 생각되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정규직이 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청년들은 이들에 대한 채용 절차가 불공정했다며 분노했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기존 정규직과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 교수는 “MZ세대는 1987년 민주화 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을 상징하는 ‘1987 체제’가 간과해 온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다. 기껏 취업하더라도 정치 권력화한 생산직 노조는 일등 시민이고 사무직은 화이트칼라라고 소외되며 이등 시민처럼 대접을 받으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기업들이 당면한 문제인 성과 보상 체계를 전면적으로 손보고 연공서열, 근속 연수가 아닌 합리적인 보상 체계를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한국의 첨단 산업을 이끄는 핵심 인력들이 사보타주(태업)를 한다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며 “사무직들이 ‘죽창’을 들지는 않아도 하나하나가 회사 운영에서 아주 중요한 자원들이기 때문에 개인 협상력은 생산직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불공정에 분노한 MZ세대에게 기업들이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무직 노조 설립은 LG전자에서 먼저 시작됐다. LG전자의 4년 차 연구원인 유준환 씨가 설립한 ‘LG전자 사람중심 사무직 노조’가 3월 31일 공식 출범했다. LG전자에는 한국노총 산하의 생산직 노조(약 1만 명), 민주노총 산하의 서비스지회(약 1500명) 등 2개 노조가 있었지만 사무직 노조가 출범하면서 노조 수가 3개로 늘었다.
LG전자 전체 직원 4만여 명 중 연구·개발·경영 등을 담당하는 사무직의 비율은 4분의 3에 달한다. 기존의 생산직 위주 노조에서는 사무직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어려워 별도의 사무직 중심 노조를 설립한 것이다.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은 3000명을 넘어섰고 연령대는 20·30·40·50대가 10 대 40 대 40 대 10의 비율이다. 전체적으로 HA사업본부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합원 규모는 계속 늘고 있다. 노조에 가입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밴드)에 가입한 회원 수도 8000명이 넘었다.
LG전자 사무직 노조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교섭단위 분리를 신청해 생산직과 별도의 임금 및 단체협상(임단협)을 추진하고 있다. LG전자는 올해 임금 인상률을 9%로 발표했는데 이는 생산직 노조와 합의한 결과를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었다. 사무직 노조는 회사가 주장하는 임금 인상률 9%는 성과 연동 재원 3.5%, 경쟁력 강화 재원 5.5%로 구성되는데 성과 연동 인상분은 고과, 경쟁력 강화 인상분은 연차에 따라 결정돼 개인별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일괄 9% 인상과는 거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사무직 노조 관계자는 “이후 사무직의 임금, 근로 조건 등에 대한 임단협 과정에서는 사무직 노조가 교섭 테이블에 올라 교섭 당사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586 투쟁 답습하지 않겠다는 MZ 사무직들
현대차그룹의 사무직 노동자들도 성과급 불만이 확산되면서 사무직 노조 설립에 속도가 붙는 모양새다. 현대차그룹 내 MZ세대인 8년 차 이하의 매니저(사원·대리)급 직원들을 중심으로 임시집행부를 구성해 ‘HMG 사무연구노조(가칭)’를 만들었고 현재 노조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노조 가입 의사가 있는 직원들로부터 가입 의향서를 제출받고 조합원 가입 범위 등 구체적인 설립 방안을 검토 중인 단계다.
노조 결성을 위해 개설한 온라인 커뮤니티(밴드)에는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현대로템·현대글로비스·현대위아 등 계열사 직원 4000여 명이 가입돼 있다. 전체 가입자의 70% 이상이 30대다. 밴드에는 LG전자 사무직 노조를 벤치마킹하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현대차 노사는 2020년 임단협에서 기본급 동결과 성과급 150%,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극복 격려금 120만원에 합의했다. 젊은 사무직들 사이에서는 이번 협상이 전년도 수준(기본급 4만원 인상, 성과급 150%+300만원)에 못 미친다는 불만이 폭발했다.
이들은 현대차 생산직 노조의 주축인 586세대(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임단협에서 정년 연장 합의에 치중하면서 기본급 인상을 요구하는 MZ세대 사무직 노동자들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2020년 코로나19 여파에서도 현대차와 기아는 역대급 매출을 올렸지만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차지부가 기본급 동결에 합의하면서 2020년 현대차 사무직 직원 1명의 평균 월급은 8800만원에 그쳤다. 이는 2019년 9600만원보다 800만원 줄어든 수준이다.
MZ세대는 파업과 농성으로 대표되는 586세대의 투쟁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겠다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과거 1980년대까지는 노조가 저임금 장시간 노동, 작업장 내 비인간적인 대우를 벗어나기 위해 강력하게 투쟁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인 정당성이 있었다. 이런 투쟁 방식이 가져온 긍정적인 효과도 부인할 수 없다. 그때의 강력한 투쟁을 통해 결과적으로 모든 노동자가 노동 존중의 혜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문제가 터져나왔고 시대가 달라진 만큼 투쟁 방식의 변화와 새로운 노사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이 MZ세대의 생각이다. MZ 노조, 노동 운동 새바람 일으킬까
최근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있고 기업에서 연구직·사무직의 비율과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도 MZ세대 사무직 노조 등장의 주요한 배경으로 꼽힌다. 이들을 대변할 새로운 노조의 필요성이 대두했기 때문이다. 586세대의 강성 노조 직원들이 정년 퇴임하고 생산직에도 MZ세대 직원들이 유입되고 있다. 이 때문에 MZ세대 노조는 더이상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파업하기보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로 소통하고 온라인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등 기존 노조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현대차 생산직 노조는 정년퇴직자가 급증하면서 세대별 구성이 바뀌고 있다. 2019년 현대차 노조 구성원 연령대는 30~50세가 46%, 50세 이상은 45%, 30세 미만은 9% 순이었으나 2024년에는 50세 이상은 39%로 줄고 30~50세는 47%, 30세 미만은 15%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강성 투쟁 일변도였던 과거 노조 문화도 민주화 세대의 자리를 1990년대생이 메우면서 변화가 예상된다.
조성재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 연구본부 선임연구위원(박사)은 기술 발전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술과 인간 노동이 맺는 관계 자체가 계속 변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조 박사는 “과거에는 생산직 노동자들의 숙련도가 지금보다 중요했는데 기술이 발달하면서 생산직 노동자들의 탈숙련화(deskilling)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는 현장에서 썼던 기능이나 숙련보다 연구·개발 부문에서 부가 가치가 사전적으로 결정되는 부분이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성과급 불만과 사무직 노조 설립은 단순히 MZ세대여서 불만을 터뜨린 것이 아니라 기업의 가치 창출에 대한 보상 체계가 맞지 않았던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성과 보상 체계에 대한 분명한 기준도 필요하다. MZ세대가 일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변하고 있어 직무 분석이나 직무급에 대한 논의들이 조금 더 활성화될 것이란 분석도 있다.
그렇다면 MZ세대 노조로 대표되는 사무직 노조 결성 움직임이 기업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느슨한 연대를 추구하고 집단화하지 않는 MZ세대 특성 때문에 노조는 만들어도 586세대들의 노동 운동 방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으로 봤다. 조 박사는 “노동 운동은 다른 이익 집단에 비해 연대 정신이나 생산을 직접 담당하는 것 때문에 지난 200년간의 역사에서 큰 지지를 받아왔다”며 “MZ세대 노조는 이념적인 토대가 그 정도로 굳건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이념이나 철학이 없다면 지속성이나 확장 가능성은 조금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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