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 컬러 재킷· 2.55백, 샤넬의 상징적 아이템으로…1971년 87세 나이로 패션 거장 잠들다

[명품 이야기] 샤넬⑦
망명 뒤 복귀 패션쇼, ‘대반전’…코코 샤넬, 마지막 불꽃 태우다
연합군이 파리를 탈환한 뒤 코코 샤넬은 1944년 9월부터 독일인 연인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와 함께 스위스 망명 생활에 들어갔다. 생활비는 넉넉했다. 샤넬 넘버 파이브(N°5) 판매로 얻은 수익금을 스위스 은행에 예탁해 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스위스의 호화 호텔을 전전했다.

당시 세계 패션계에 등장한 새로운 사조는 ‘뉴룩(New Look)’이었다. 샤넬도 스위스 신문에 새로 등장한 이 단어를 접했다. 뉴룩은 세계 패션계에 선풍을 일으켰다. 재킷은 가는 허리선을 강조했고 스커트는 폭 넓은 플레어 스타일이 뉴룩의 특징이었다. 이런 스타일이 뉴룩이 된 것은 미국 패션 전문지 하퍼스 바자 편집장이 크리스티안 디오르의 패션쇼를 보고 “이츠 어 뉴룩(It’s a New Look)”이라고 말한 게 계기가 됐다.

파리의 패션이 유능한 한 디자이너 덕분에 전쟁의 상흔을 딛고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뉴룩 스타일은 시대가 요구하는 취향과 맞아떨어졌다. 당시 크리스티안 디오르는 마흔두 살이었다. 그가 만든 뉴룩은 참혹한 전쟁을 거친 유럽에 낙천주의라는 새 사조를 열었다. 여성들은 중성적이고 단순한 스타일의 패션에서 벗어나 다시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싶어했다. 폭이 15m나 되는 플레어 스커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엄청난 양의 옷감이 소요되는 것은 물론이었다.
망명 뒤 복귀 패션쇼, ‘대반전’…코코 샤넬, 마지막 불꽃 태우다
패션 여왕 귀환, “샤넬 죽지 않았음을 보여 주겠다”

샤넬은 약 9년간의 스위스 망명을 끝내고 1953년 파리로 돌아왔다. 일흔 살의 패션 여왕의 귀환은 당연히 화제가 됐다. 샤넬이 파리로 돌아오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샤넬 향수 회사를 함께 만든 베르트하이머와 휴전이 이뤄졌다. 샤넬이 수년 전부터 향수 회사 지분을 요구했고 베르트하이머 형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베르트하이머는 1952년 샤넬이 머무르고 있는 스위스 로잔으로 찾아왔다. 샤넬이 컴백해 새 패션 컬렉션으로 이목을 끌면 향수 사업도 더 잘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컴백 컬렉션에 필요한 비용 중 절반을 향수 광고비에서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비교적 관대한 제언이었다 .

샤넬이 파리로 귀환한 또 다른 이유는 ‘샤넬 패션’이 죽지 않았음을 다시 보여 주겠다는 굳은 의지 때문이었다. 샤넬은 돌아오자마자 피가로·프랑수아·파리마치·엘르·헤럴드 트리뷴 등 프랑스와 미국 유수의 언론·패션지와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성공적이었다. 세계가 다시 샤넬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들은 독일군의 파리 점령 시 샤넬의 나치 협력 등 정치적인 이야기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샤넬의 패션과 인생 철학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고 다뤘다. 패션계 복귀의 터전이 마련됐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 다시 의욕이 불타올랐다. 과거 샤넬이 아끼던 직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10년 안에 해내자”며 협조를 요청했다. 샤넬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즐겁게 할 수 있게 되면서 마치 두 번째 청춘을 맞은 듯했다.

샤넬은 스위스에서 무위로 지낸 9년간의 오랜 갈증을 다시 채울 기세로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패션 일에 뛰어들었다. 샤넬은 의상 130점으로 1954년 2월 5일 복귀 패션쇼를 열었다. 그는 이날을 자신의 패션이 다시 태어나는 날로 여겼다. 이날을 택한 것은 5가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5를 좋아하는 것은 샤넬 넘버 파이브 작명에서도 확인된다.

이날 쇼에서도 샤넬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패션쇼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배경 음악도 깔지 않았다. 고요함 속에서 모델들은 각기 번호표를 달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이날 패션쇼에 대해 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난처한 침묵’이라는 혹평도 붙었다. 언론들은 ‘대실패(영국 데일리 익스프레스)’, ‘우울한 회고전(프랑스 오로르)’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1925년이었다면 감동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시대의 조류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평가였다.

샤넬은 패배감에 젖었다. 파리 리츠호텔 스위트룸으로 돌아오기 전 직원들에게 “나는 감각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토로했다. 밤새워 뒤척이며 포기라는 단어까지 생각했다. 복귀 패션쇼에서 팔린 옷은 10벌에 불과했다. 설상가상으로 샤넬은 손가락 관절염에 시달렸다. 샤넬 향수의 주가도 급락했다.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샤넬은 베르트하이머 형제에게 “나는 계속해야 해요.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해요”라고 말했다. 베르타하이머는 “당신 말이 맞다”고 화답했다.
망명 뒤 복귀 패션쇼, ‘대반전’…코코 샤넬, 마지막 불꽃 태우다
주식 양도, 마지막까지 패션 창조 작업에 열정 쏟아

1955년 반전이 일어났다. 새로운 샤넬 룩의 특장점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유명한 ‘투 컬러 재킷’이 단적인 예다. 이는 단추 구멍과 주머니 단의 가장자리에 장식 처리한 것이다. 황금고리로 연결된 허리띠, 가죽 사이에 들어간 황금 체인이 달린 누비 가죽 가방들, 베이지색에 검정 레이스가 달린 투 컬러 펌프스 등이 전 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2.55백은 샤넬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됐다. 2.55는 1955년 2월 가방을 선보인 데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에서부터 새로운 샤넬 룩에 대한 찬사가 시작됐다. 샤넬은 미국 백화점 체인 소유주인 스탠리 나이만 마르쿠스로부터 금세기 최고 패션 디자이너 상이라는 패션 오스카상을 받기도 했다.

샤넬은 자신의 인생에서 다시 한 번 중요한 결정을 한다. 1954년 자신이 오트퀴트르를 베르트하이머에게 양도한 것이다. 자신은 패션 창조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샤넬 향수와 샤넬 양품점이 합병돼 ‘샤넬 주식회사’로 새로 탄생했다. 물론 샤넬이 생활하는 데 충분한 돈을 받았다. 샤넬은 향수 판매에서 자신의 지분 몫을 받는 것과 함께 리츠호텔 스위트룸 사용비, 운전사 고용비, 전화비, 그 밖의 사적 용도로 쓰는 비용 전부를 받았다. 스위스에서 관리되는 자신의 재산 이외에 죽을 때까지 충분히 쓰고도 남을 상당한 양의 월급도 받았다.

샤넬은 1971년 1월 10일 예정된 봄·여름 오트쿠튀르 쇼를 시작하기 며칠 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37년간 머무르던 리츠호텔 스위트룸에서다. 그는 사망하기 전 “끊임없이 패션을 창조해 왔다. 왜냐하면 현재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겼다. 20세기 세계 패션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은 세상을 떠났지만 샤넬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