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한의 리스크 관리 ABC]
폭스바겐의 자동 안전벨트를 소개하는 1978년의 매거진 광고. /폭스바겐그룹
폭스바겐의 자동 안전벨트를 소개하는 1978년의 매거진 광고. /폭스바겐그룹
8기통 경찰차를 따돌린 4기통 소형차는 도대체 어떤 차일까. 1991년 3월 심야에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이 로스앤젤레스(LA) 고속도로에서 과속 질주하면서 상당 시간 경찰차를 따돌렸다가 결국 붙잡혀 백인 경찰들 손에 죽을 정도로 뭇매를 맞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경찰의 과잉 진압 논란과 함께 흑백 간 인종 갈등으로 비화돼 1년 후인 1992년 4월 29일 LA 폭동이 벌어졌다. 공무 집행 중 발생한 불가피한 구타였다는 경찰 측의 주장을 LA 부촌의 배심원단이 받아들여 경찰이 무죄라고 평결하자 미국 전역에서 항의 데모가 이어졌고 LA에선 전쟁에 준하는 폭동 사태까지 벌어졌다.

오랫동안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사건이라 로드니 킹이 몰았던 소형차도 덩달아 세간의 관심 대상이 됐는데 바로 A사의 B자동차였다. 1985년 미국 시장 진출 이후 이렇다 할 주목을 끌지 못했던 A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크게 성장했다.
다국적 기업, 전사 리스크 관리(ERM)가 필수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선 자동 안전벨트가 대유행이었다. 많은 운전자가 단지 귀찮아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차를 몰고 다니다 보니 자동차 사고가 빈발하고 사고 손실이 커진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안전벨트 착용은 필수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시동을 거는 순간 운전자 도어 위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안전벨트가 자동으로 가슴을 조여 주는 차가 등장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심지어 교통안전국에서도 자동 안전벨트 장착을 권유하는 캠페인까지 벌였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도 자동 안전벨트가 장착된 자동차는 없다. 왜 그럴까. 자동차 안전벨트는 줄이 두 개다. 가슴 줄 하나와 복부 줄 하나.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운전자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자동 안전벨트는 가슴 쪽은 자동으로 조여 주지만 복부 쪽은 여전히 운전자가 수동으로 매야 했다. 많은 운전자가 귀찮아 복부 벨트 매기를 등한시하다가 자기 신체 사고를 더 많이 냈고 손실 크기도 더 커졌다는 조사가 잇따라 나왔고 결국 자동 안전벨트 시스템은 폐기됐다.

1996년 A사 C자동차를 운전하던 30대 여성이 자동차 충돌 사고로 사망했고 사망 원인으로 자동 안전벨트가 문제였던 것으로 조사됐다. 자동 안전벨트만 믿고 복부 벨트를 하지 않았던 단신의 여성 운전자는 차량 충돌 후 더욱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제조물 책임 소송의 배심원단은 A사에 배상 책임을 물어 950만 달러(약 120억원)를 평결했다.

다국적 기업의 비즈니스 현실은 이렇다. 뜻밖의 횡재를 챙길 수도 있지만 그보다 큰 피해를 볼 가능성도 높다. 그만큼 다국적 기업은 리스크 관리에 더욱 민감해져야 한다. 다국적 기업은 글로벌 차원에서 다양한 정치·경제·사회 리스크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어 문제가 악화될 가능성이 더욱 높은 만큼 비즈니스 전체를 아우르는 전사적 리스크 관리(ERM : Enterprise Risk Management)가 필수다.

ERM은 개별 리스크를 따로따로 관리하는 사일로(silo)식 리스크 관리가 아니라 통합형 리스크 관리의 전형으로, 비즈니스가 당면한 리스크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이다. 포괄적이고 경제적이고 거래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으며 최적의 투자와 수익의 안정성 유지를 통해 기업 가치를 제고할 수 있다. 또한 ERM은 조직의 지배 구조, 준법 윤리 경영과 긴밀하게 연계돼 체계적인 GRC(Governance Risk Compliance)를 구축함으로써 비즈니스 지속 가능 성장의 핵심 전략이 된다.


장동한 건국대 국제무역학과 교수·한국보험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