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 정책으로 엔저=주가 상승 공식 깨져…아시아 지역 IPO 시장에서도 3위 자리 뺏겨

[글로벌 현장]
세계 3위 경제 대국 일본, 흔들리는 금융시장 지위
세계 3위 경제 대국 일본의 금융 시장 지위가 휘청이는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국제 금융 시장에서 안전 자산으로 통용되던 엔화가 세계 증시가 폭락하는 동안 외면받는가 하면 상장(IPO) 시장의 존재감이 한국과 인도보다 약해졌다. 지난 30여 년간 주식 시장에서 통용되던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일본 주가가 상승한다’는 공식이 깨지고 있다.
“진짜 안전 자산은 달러”
지난해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세계적으로 확산하자 주가 폭락과 엔화 가치가 동시에 급락하는가 하면 하반기에는 엔화 가치가 강세를 이어 가는데 닛케이225지수가 30여 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하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올해 들어서도 엔화 가치가 떨어지는데 주가는 정체 국면에 접어들어 투자가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일본의 산업 구조 변화, 미국과 일본의 금리 격차, 코로나19 이후 주요국의 재정·금융 완화 정책이 공식 파괴의 원인이라는 게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분석이다. ‘엔저=일본주 상승’은 일본의 수출 주도형 산업 구조가 만들어 낸 공식이다. 자동차·전자 등 도쿄 증시의 흐름을 주도한 일본 대표 기업들이 수출 기업이었기 때문에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 대금이 늘어나 주가도 올랐다는 설명이다. 이 공식이 처음 깨진 것은 작년 3월이다. ‘코로나19 쇼크’로 세계 주식이 폭락하자 엔화 가치도 따라서 급락했다. 3대 기축 통화인 엔화는 세계 금융 시장이 요동치면 가치가 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공식이 통용되지 않은 것은 투자가들이 “주가 폭락으로 자금 흐름이 경색되면 무역과 금융 거래 결제 자금을 확보하지 못할 수 있다”는 공포에 질려 엔화를 외면하고 최대 기축 통화인 달러를 앞다퉈 사들였기 때문이었다. 금융 시장에서는 ‘유사시에는 달러 매수’라는 20세기의 주식 격언이 회자됐다. 작년 하반기에는 장기간에 걸쳐 엔화 가치가 상승하는 데도 닛케이225지수가 30여 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하는 두 번째 이변이 벌어졌다.

‘엔고=주가 하락’ 공식을 깨뜨린 요인은 미국의 금융 정책으로 분석된다. 미국 중앙은행(Fed)은 코로나19의 여파로 미국 경제가 추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로 금리’ 정책을 장기간에 걸쳐 지속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 때문에 이미 5년째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펼치고 있는 일본과의 금리 격차가 축소됐다.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가 벌어지면 금리가 높은 달러로 자금이 몰려 ‘강달러·엔저’가 진행된다. 거꾸로 금리 차가 좁혀지면서 엔화 가치가 오르고 달러 가치는 떨어졌다.

엔화 가치가 오르는 데도 일본 주식이 상승한 것은 코로나19 사태 및 일본의 산업 구조 변화와 관계가 있다. 외출 제한과 재택근무 등으로 10여 년에 걸쳐 진행될 것으로 예상됐던 디지털화가 1년 남짓 만에 이뤄지면서 시장 주도주가 바뀌었다. 이케다 유노스케 노무라증권 수석 외환전략가는 “엔화 환율에 주가가 좌우되지 않는 하이테크 관련 성장주들이 급등하면서 주가가 올랐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산업 구조가 변했기 때문에 코로나19 이후에도 ‘엔저=주가 상승’ 공식이 유지되기 어렵다고 전망한다. 일본 기업들이 노동력 인구 감소와 경제 구조의 성숙화를 이유로 생산 거점을 해외로 옮긴 결과 일본의 무역 환경이 급변했다. 2015년, 2018년, 2019년 무역 적자가 발생하는 등 무역 수지가 흑자와 적자를 오가고 있다. 2016년 4조 엔 수준이었던 흑자 규모가 지난해는 1조 엔을 밑도는 등 흑자와 적자 폭도 점점 축소되는 추세다. 무역 수지가 엔화 가치에 주는 영향이 줄어드는 한편 수출 기업들이 외환 시장과 주식 시장을 쥐락펴락하던 토양이 사라진 것이다.
일본 IPO 시장 20년 새 6분의 1 토막
한편 아시아 지역 기업공개(IPO) 시장에서 일본 증시는 3위 자리마저 빼앗겼다.금융 정보 회사 리피니티브에 따르면 올들어 4월 14일까지 기업들이 일본 증시에 상장해 조달한 공모 자금은 약 2000억 엔(약 2조538억원)으로 아시아 전체(4조5700억 엔)의 4.6%에 불과했다. 2000년까지만 해도 아시아 공모 자금의 약 30%를 빨아들인 일본 증시는 홍콩과 중국에 이어 3위 시장이었지만 20년 새 비율이 6분의 1로 낮아졌다. 그 사이 비율을 5%까지 늘린 한국과 인도가 일본을 제치고 3위 시장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홍콩과 중국 본토 시장은 올해 아시아 지역 공모 자금의 40%와 30%를 조달해 독주 체제를 갖추고 있다. 올들어 홍콩 증시에는 동영상 애플리케이션 콰이서우 테크놀로지와 중국 최대 검색 엔진 바이두의 2차 상장 등 3000억~5000억 엔 규모의 초대형 IPO가 줄을 이었다.

반면 일본의 올해 증시 최대어인 비저널은 상장 규모가 680억 엔에 불과하다. 주요국 거래소가 국경을 넘나들며 유력 스타트업(신흥 벤처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사활을 걸지만 일본 증시는 쟁탈전에서 소외돼 있는 모습이다.

IPO 1건당 조달 규모도 아시아 평균이 160억 엔인데 반해 일본은 40억~70억 엔에 그쳤다. 건당 조달 규모가 2019년 한국에도 역전 당했다. 벤처캐피털(VC) 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한 점이 일본 IPO 시장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비상장 기업에 투자 자금을 공급해 상장 예비군을 키우는 기능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미국 조사 회사 피치북에 따르면 2020년 일본 VC 투자 금액은 21억 달러(약 2조3352억원)로 중국(593억 달러)의 30분의 1 수준이다. 인도(116억 달러)와 싱가포르(31억 달러)보다 VC의 투자 활동이 저조했다.한국·인도·싱가포르 VC 시장에 미국과 중국의 풍부한 투자 자금이 흘러 들어오는 반면 일본의 VC들에 출자되는 자금은 대부분 일본 국내 자금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국제 표준 회계 기준을 채용한 VC가 적기 때문에 해외 VC와 실적 비교가 어렵다”며 “국내외 기관투자가가 자금을 맡기기 어려운 구조”라고 분석했다.

극도로 보수적인 공모 가격 설정 관행도 일본의 IPO 시장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일본은 투자가들을 대상으로 수요 조사를 실시하더라도 주간사 회사가 사전에 설정한 희망 공모가 범위 내에서 최종 공모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관행이다. 반대로 미국은 수요 예측 조사 결과가 기대 이상이면 최종 공모가를 희망 공모가보다 높게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수요보다 공모 가격을 낮게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올해 일본 증시에 상장한 기업의 주가는 거래 첫날 평균 200% 급등했다. 한국의 70%, 인도의 20%, 홍콩의 10%보다 월등히 높았다.

거래 첫날 주가가 오르면 공모 물량을 배정받은 투자가들에게는 이득이지만 기업과 기존 투자가들에게는 마이너스다. 지난해 일본 증시에 상장한 정보기술(IT) 기업 관계자는 “실제로는 훨씬 많은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스즈키 겐지 히토쓰바시대학원 교수는 2013~2019년 일본 증시에 상장한 기업의 공모가와 상장 후 주가를 비교한 결과 보수적인 공모가 산정 관행으로 인해 기업과 기존 주주들이 평균 20억 엔의 손실을 봤다고 분석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