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 바이든과 민주당도 ‘손절’…차기 주지사 선거전 달아올라

[글로벌 현장]
성추행 및 성희롱 발언 의혹이 사실로 확인된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가 지난 8월 10일 자진 사퇴했다. /연합뉴스
성추행 및 성희롱 발언 의혹이 사실로 확인된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가 지난 8월 10일 자진 사퇴했다. /연합뉴스
미국 50개 주 가운데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가장 많은 부자 동네 뉴욕 주. 요즘 이곳은 주지사 문제로 초유의 혼란을 겪고 있다. 10년 넘게 뉴욕 주 살림을 책임져 온 앤드루 쿠오모(64) 주지사가 탄핵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사퇴해서다.

쿠오모 주지사의 리더십은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위협이 다시 불거졌던 올해 초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방역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뉴욕 주 내 장기 요양 시설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망자 통계를 고의로 누락했다는 의혹이 번지면서다. 세금을 투입해 자화자찬하는 비망록을 출판한 뒤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였다는 비판도 받았다.

결정타는 성추행·성희롱 의혹이다. 뉴욕 주 검찰이 “주지사가 11명의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공식 보고서를 내놓자 그나마 쿠오모 주지사에게 동정적이던 여론마저 확 바뀌었다. 쿠오모 주지사가 “정치적 배후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민주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손꼽히던 이 정치인은 재기 불능의 타격을 받게 됐다.
뉴욕 지배했던 정치 명문가…성추문 후 역사 속으로 [글로벌 현장]
◆“명백한 성추행 범죄” vs “문화적 차이일 뿐”

뉴욕 주 최초의 흑인 여성 검찰총장 겸 법무장관인 레티샤 제임스는 최근 기자 회견을 열고 “쿠오모 주지사가 전·현직 공무원을 성추행하고 여성에게 적대적인 근무 환경을 조성하는 등 관련 법을 위반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이 주정부 관계자 등 179명을 조사하고 e메일·문자 메시지·사진 등의 증거를 샅샅이 조사한 결과다.

보고서에서 드러난 쿠오모 주지사의 성추행 행각은 집요했다. 여성 보좌관을 껴안은 뒤 블라우스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움켜쥐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특정 여성 경찰관을 자신의 경호팀에 포함하도록 지시한 뒤 추행을 일삼았다는 내용도 있었다.

심지어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범죄 폭로로 ‘미투’ 운동에 불이 붙었던 2017년 말에도 자신의 보좌관인 린지 보일런에게 ‘스트립 포커를 치자’고 요구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쿠오모 주지사가 표면적으로는 여성 인권 신장에 앞장서 왔다는 점에서 공분이 컸다는 지적이다. 직장 내 성폭력에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과 성폭행 공소 시효를 연장하는 법안에도 서명했다.
쿠오모 주지사는 성추행 의혹이 불거지자 “수사 결과를 기다리라”고 큰소리쳤다. 막상 결과가 나오자 “누군가를 부적절하게 만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포옹하고 뺨에 입을 맞춘 것은 친근감을 표시하기 위한 이탈리아식 표현법”이라고 주장했다. 이탈리아 이민 가정에서 자란 환경이 문화적 이질감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

쿠오모 주지사는 어떤 사람일까. 미국에선 내로라하는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부친인 마리오는 1983년부터 1994년까지 내리 12년 동안 뉴욕 주지사를 지낸 인물이다.

쿠오모 주지사가 20대 시절부터 정계에 발을 내디딘 것도 아버지의 선거를 도우면서였다. 뉴욕 퀸스에서 태어나 뉴욕 포드햄대를 졸업한 뒤 뉴욕 알바니 로스쿨을 다녔던 그는 부친의 정책보좌관을 맡았다. 이후 뉴욕 주 검찰청 소속 검사에 임용됐다.

클린턴 행정부 때인 1993년 중앙 정계로 진출했다. 연방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에 선임됐기 때문이다.

더 주목 받았던 것은 1990년 정치 명가인 케네디 가문의 사위가 됐을 때다. 대선 과정에서 암살당한 로버트 케네디의 딸 케리(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와 결혼했다가 2005년 이혼했다. 2006년 뉴욕 주 검찰총장에 당선된 뒤 월가의 부정부패 수사를 지휘하며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팬데믹 직후엔 인기가 더욱 가파르게 치솟았다. 백신 방역에 부정적이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맞서 매일 코로나19 상황을 자세하게 브리핑했다. 윈스턴 처칠의 라디오 담화에 비유되며 일약 ‘코로나19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검찰의 성추행 보고서는 치명적이었다. 정치 기반인 민주당도 발빠른 손절에 나섰을 정도다. 당내 1인자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물론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 등은 쿠오모 주지사의 즉각 사퇴를 촉구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주지사에서 물러나라”고 압박했다. 민주당의 텃밭 격인 뉴욕주의회 의원들은 아예 탄핵 절차를 개시했다.

쿠오모 주지사는 자진 사퇴했지만 다수의 연방법과 주법을 위반한 혐의로 검찰에 기소될 처지다. 또 연간 최대 5만 달러로 추산되는 퇴직연금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의회가 탄핵 당한 공무원 등에 대해 연금 지급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오모 비호하다 동반 추락한 ‘위선자들’

‘쿠오모 수렁’에 빠진 인사도 적지 않다. 유명 여성 인권 운동가인 로버타 캐플런 컬럼비아대 로스쿨 부교수가 대표적이다. 캐플런 부교수는 직장 내 여성 차별과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인권 단체 ‘타임스업’의 이사회 의장을 맡아 왔다.

캐플런 부교수는 2018년 타임스업 법률대응기금을 창설했다. 2019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해 명예 훼손 소송을 당한 칼럼니스트 진 캐럴의 변호인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쿠오모 주지사의 전 보좌관인 보일런이 성추행 피해 사실을 공개하자 그의 신뢰성과 폭로 동기를 문제 삼는 뉴욕 주의 공개 서한을 적극 검토하고 문구도 수정했던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다. 여성 인권을 위해 싸워 온 단체의 지도자가 되레 성추행 피해자를 공격하는 편에 섰던 것이다. 전형적인 ‘내로남불’ 행태다. 그는 결국 타임스업의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수년간 쿠오모 주지사를 보좌했던 멜리사 드로사 수석보좌관도 마찬가지다. 저명한 로비스트의 딸인 드로사 보좌관은 2013년 쿠오모 캠프에 소통 책임자로 합류했다. 뉴욕 주에선 여성 인권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인사로 통했다.

하지만 쿠오모 주지사의 성추문이 불거진 뒤 수비수 역할을 도맡았다. 쿠오모 주지사 고발자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사건 관계자들이 피해자와의 통화 내용을 몰래 녹음하도록 압박했다. 드로사 보좌관은 수석보좌관을 그만두면서 “지난 2년간 감정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후회했다.

CNN 간판 앵커인 크리스 쿠오모의 명성에도 금이 갔다. 주지사의 친동생인 그는 요양 시설 사망자 수 은폐 및 성추행 등 의혹이 잇따라 터지자 조언자 역할을 맡아 왔다는 의심을 샀다.

쿠오모 주지사가 불명예 퇴진함에 따라 여성인 캐시 호컬 부지사가 내년 말까지 주지사를 맡게 됐다. 뉴욕 주 최초의 여성 주지사가 탄생한 것이다.

동시에 내년 11월로 예정된 차기 주지사 선거전이 갑자기 달아오를 조짐이다. 4선 도전을 꿈꾸던 쿠오모 주지사가 사라지면서 그동안 숨죽여 온 유력 주자들이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호컬 부지사가 포문을 열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차기 선거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며 출마를 공식화했다. 고향인 뉴욕 주 버펄로에선 대면 모금 행사를 열기도 했다.

쿠오모 주지사를 끌어내린 제임스 주 검찰총장도 유력 후보 중 하나다. ‘흑인 여성’이란 정치적 프리미엄을 안고 있는 데다 성역 없는 권력 수사로 주가를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올해 말 물러나는 빌 더블라지오 현 뉴욕시장과 최근 뉴욕시장 선거에서 2위로 낙마한 캐슬린 가르시아 전 뉴욕시 위생국장도 출사표를 던질 것으로 전망된다. 토머스 수오지 연방 하원의원, 토머스 디나폴리 뉴욕 주 감사원장 등의 이름도 거론된다.

쿠오모 주지사의 성추문으로 민주당이 타격을 받았지만 캘리포니아·일리노이와 함께 ‘3대 민주당 텃밭’으로 꼽히는 뉴욕 주에서 공화당 출신이 주지사로 당선되긴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 수뇌부가 쿠오모 주지사를 빠르게 손절한 것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뉴욕(미국)=조재길 한국경제 특파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