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투자 기업 탄소 배출량 측정 나서
탈석탄 선언하고 ESG 우수 기업 우대

[스페셜 리포트] 넷제로, 금융이 이끈다

지구촌의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금융권이 팔을 걷어붙였다. 세계 최대 자산 운용사 블랙록이 글로벌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투자를 선도하며 산업계의 경영 패러다임을 친환경 기조로 바꿨다면 한국에선 은행권이 ‘기후 금융’ 논의를 이끌고 있다. 그 선봉에 선 KB국민·신한·하나·NH농협·우리·IBK기업은행 등 6개 은행의 넷제로(net-zero) 전략을 짚어봤다.
‘기후 금융’ 시동 건 6대 은행
한국 금융그룹의 핵심인 은행권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KB국민·신한·하나·NH농협·우리·IBK기업은행 등 주요 은행들은 올들어 적도원칙 등 ESG 관련 국제 협약 가입은 물론 대출(투자) 기업의 탄소 배출량을 측정하기 시작했고 종합적인 여신 심사 모형을 만드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올해 초 파리기후변화협약 발효로 탄소 중립이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금융권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사 자체적으로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행이 고탄소 배출 기업으로 흐르는 자금을 차단하지 않는 한 ‘2050년 넷제로(탄소 순배출 0) 달성’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은행권이 자금을 공급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해 다른 산업이 탄소 배출을 줄이도록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자처하는 이유다.
자산 포트폴리오의 탄소 제로가 핵심
먼저 기본 배경을 설명하면 이렇다. 전 세계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에 비해 이미 1.2도 높아졌다. 심각한 피해가 빚어지지 않도록 각국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기 위해 대대적인 노력을 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탄소 집약적 산업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구조가 유지되면 그 결과는 바로 기온 상승으로 이어진다. 이는 사망률과 질병률을 높이고 갑작스러운 폭우나 가뭄의 원인이 된다. 빈번한 자연재해로 집·공장·인프라 등 기존 자산을 복구하는 데 돈과 시간이 투입되면 새로운 투자가 어려워진다. 말 그대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를 타개할 열쇠는 금융사가 쥐고 있다. 어떻게 가능할까. 우선 금융사는 철강·석유화학 등 전통 제조 기업과 다르다. 금융사의 주요 사업은 돈을 빌려주고 투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은행 자체에서 배출되는 탄소 배출량은 적지만 대출·투자한 기업의 탄소 배출량(자산 포트폴리오 탄소 배출량)은 상대적으로 많다.

다시 말해 자산 포트폴리오의 탄소 중립이 핵심이다. 은행 관계자는 “단기적으로는 기업이 탄소 중립이나 ESG 경영 성과가 우수할 경우 또는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할 경우 금리와 한도를 우대해 주는 포지티브 방식으로 기업의 탄소 배출량 감축 활동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는 석탄 발전업과 철강업 등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고 ESG를 미실천하는 기업에 대해 대출한도 축소와 가산 금리 등을 부여하는 네거티브 방식을 고려하는 결단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포지티브 방식 ESG 금융 상품 봇물
KB국민·신한·하나·NH농협·우리·IBK기업은행 등 주요 은행들은 포지티브 방식으로 자산 포트폴리오 탄소 중립을 이끌고 있다.

KB국민은행이 올해 4월 공개한 ‘KB 그린 웨이브(Green Wave) ESG 우수 기업 대출’은 자체적으로 선정한 ESG 평가 기준을 충족한 기업에 금리·한도 우대 혜택을 제공하는 상품이다. 신규 이후 여신 거래 시 해당 평가 기준에 미충족되면 우대 혜택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같은 달 우리은행은 한국환경산업기술원과 손잡고 ESG 우수 기업 전용 상품을 출시했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이 기업의 온실가스, 오염 물질 배출량, 환경 인증 실적 등을 종합 평가해 제공하는 약 3만8000여 개 기업의 환경성 평가 등급을 토대로 대출 금리와 수수료 우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올해 9월 동반성장위원회가 시행 중인 ‘협력사 ESG 지원 사업’을 통해 선정된 ‘ESG 우수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ESG 특화 대출 상품의 금리를 연 0.2~0.3%포인트 우대한다. 또 예산·인력이 부족한 협력 중소기업의 ESG 대응 역량 제고를 위한 다양한 교육과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올해 초 은행권 최초로 1000억원 규모의 ‘그린론(친환경 사업 한정 대출)’을 주선한 데 이어 4월엔 ‘ESG 평가 인증제’를 도입했다. ESG 평가 인증은 ESG 평가 업무를 신용 평가 회사와 회계법인 등 외부전문 기관을 통해 인증받는 것이다. 인증받은 기업과 프로젝트는 하나은행 ESG 금융 지원 대상이 된다.

IBK기업·NH농협은행 등 특수 은행은 각각 중소기업과 농업·농식품 분야의 ESG 경영 확산에 앞장서고 있다. IBK기업은행은 ESG 분석 전문 기업과 손잡고 중소기업 ESG 경영 수준을 무료로 진단하는 한편 IBK컨설팅센터에서 맞춤형 컨설팅 지원을 위한 시범 사업에 착수했다. ESG가 생소한 중소기업을 위해 ESG에 대한 이해와 구체적인 실천 과제를 제시한 ‘중소기업을 위한 ESG가이드’를 발간하기도 했다.

NH농협은행은 지난해 10월부터 자체 ESG 평가지수인 NH그린성장지수를 적용해 ESG 경영 우수 농식품 기업에 금리와 한도 우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기술과 역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자금력이 부족한 농업·농식품 기업에 대한 투자를 농산업가치펀드를 통해 확대해 나가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국내 시중은행의 기후 금융 전략은 이제 막 첫 걸음을 뗐다”며 “은행이 대출 기업의 탄소 배출량 측정 방법을 다양화고 더 많은 ESG 금융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선 기업의 환경정보 공시 의무 강화 등 정책으로 리스크를 줄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기후 금융’ 시동 건 6대 은행
석탄 대출 out, 네거티브 방식 기반 닦아
주요 은행들은 탈석탄 금융을 선언하고 적도원칙에 가입하는 등 네거티브 방식의 기반도 닦고 있다. 예컨대 우리금융은 2020년 이후 석탄 발전소 건설을 위한 신규 대출 약정을 중단했다. 기존 대출 건도 만기 도래 시 연장이나 리파이낸싱(재융자) 없이 회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적도원칙은 환경 파괴나 인권 침해를 일으킬 수 있는 대규모 개발 사업에는 금융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자발적 협약이다. 전 세계 37개국 118개 금융회사가 참여하고 있다. 한국에선 지난해 9월 신한은행이 첫 포문을 열었고 이어 KB국민은행이 올해 2월 적도원칙에 가입했다. 하나·NH농협·우리은행 등도 올해 8월 적도원칙에 가입했고 IBK기업은행은 내년 가입을 위해 물밑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적도원칙 가입으로 은행들은 자체적인 환경·사회 리스크 스크리닝 체계를 구축해 적도원칙이 적용되는 여신 취급 시 환경·사회 리스크를 감안한 등급 분류를 실시한다. 등급에 따른 관리 프로세스를 수립해 대형 개발 사업이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의 최소화한다는 전략이다.

금융그룹 차원에서도 ESG 전담 조직을 구축하는 등 탄소 제로에 앞장서기 위한 체질 개선에 한창이다. 특히 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국제적으로 검증받기 위해 과학 기반 감축 목표 이니셔티브(SBTi), 탄소 회계 금융 연합체(PCAF) 가입 등에 적극적이다. KB금융그룹은 올해 6월 ESG위원회를 개최하고 탄소 중립 중·장기 추진 전략 ‘KB 넷제로 스타(Net Zero S.T.A.R.)’를 선언하면서 업계 처음으로 대출·투자한 기업의 탄소 배출량을 공개했다. PCAF와 SBTi 방법론을 적용해 산출된 자산 포트폴리오 배출량은 약 2676만 톤(t CO₂eq)이다. 투명한 공개로 탄소 감축과 관련된 목표치를 더 엄밀하게 챙기겠다는 의미다. 전 세계적으로 자산 포트폴리오 배출량을 공개한 금융회사는 ABN암로와 APG 등 36개사다.
돋보기
은행권 채권, ‘ESG 간판’ 달았다

은행권이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채권 발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SG 채권은 친환경 사업 자금을 조달하는 ‘그린본드(녹색채권)’, 사회 문제 해소 기여 목적의 ‘소셜본드(사회적채권)’, 그린본드와 소셜본드가 결합된 성격의 ‘지속가능채권’ 등으로 구분된다. 올해 8월까지 은행채는 95조9350억원이 발행됐는데 그중에서 9.1%인 8조6950억원이 ESG 채권이다. ESG 채권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한국판 뉴딜 정책에 발맞춰 일자리 창출, 친환경 사업 등 지속 가능 활동을 지원한다는 취지다.

지난해 사회적 채권과 지속가능채권이 대부분이었다면 올해는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 등에서 녹색채권을 잇달아 찍어냈다. 하나은행은 올해 1월 유럽 자본 시장에서 5억 유로(약 6900억원)의 사회적 채권 발행에 성공했는데 마이너스 금리로 발행한 점이 특징이다. IBK기업은행은 올해 2월에만 1조500억원 규모의 원화 중소기업금융채권을 발행, 은행권 처음으로 ESG 인증 등급 제도를 도입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채권은 한국신용평가로부터 사회적 채권 가운데 최고 등급인 ‘SB1’ 등급을 받았다.

은행권은 원화 ESG 채권 발행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IBK기업은행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지원 등으로 상반기까지 3조3800억원 규모의 원화 채권을 발행했다. KB국민은행은 9300억원을, 신한과 하나은행은 각각 4000억원, 4350억원의 원화 채권을 내놓았다. 우리·NH농협은행도 각각 3000억원, 1500억원 규모의 원화 채권을 발행했다.

다만 금융권 관계자는 “ESG 채권 발행 후 조달한 자금이 실제 ESG에 투자되고 있는지 관리할 필요가 있다”며 “은행이 스스로 ESG 채권 관련 피드백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한다면 은행의 ESG 경영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