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이력 부족한 1300만 명 타깃
빅테크는 플랫폼과 BNPL로 승부
시중은행도 새 신용평가모형 만들고 배달 라이더 상품 출시

[비즈니스 포커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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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기간 취업 준비생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원하는 기업에 입사한 A 씨. 입사 첫날의 설렘도 잠시, 왕복 4시간의 출퇴근에 결국 부모님 밑에서 독립해 회사 근처 오피스텔을 얻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A 씨는 평소 친한 직장 선배에게서 “사회 초년생은 대출받기가 쉽지 않을 텐데”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 배달 라이더인 B 씨는 최근 동생이 빙판길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쳤다. 당장 지급해야 하는 병원비는 300만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B 씨는 1금융권에서 대출받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B 씨는 300만원을 빌리기 위해 주변에 손을 벌렸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에서 어렵긴 다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B 씨는 지인을 통해 최근 배달 라이더를 대상으로 하는 대출 상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300만 명의 신파일러(thin filer) 대출 시장에 불이 붙고 있다. 중‧저신용자들의 대출을 목적으로 설립된 인터넷 전문은행은 물론 주요 시중 은행들도 발을 들이고 있다.

네이버·카카오·토스 등 빅테크들은 결제와 쇼핑 등 비금융 데이터를 활용해 자체적으로 새 신용 평가 모델을 개발하는 한편 선구매·후결제(BNPL : Buy Now Pay Later) 서비스를 내세워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 등 미래 잠재 고객을 공략 중이다.

시중 은행들은 통신 데이터를 활용하거나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등 비금융 신사업에 진출하며 신용 평가 모델을 고도화하는 데 힘쓰는 것은 물론 대출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배달 라이더나 프리랜서 등을 대상으로 한 전용 대출 상품을 속속 내놓으며 신파일러 고객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신파일러 시장, 크진 않지만 필수
우선 신파일러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신파일러는 ‘서류가 얇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대출·신용카드 사용 내역 등 금융 거래가 거의 없는 ‘금융 이력 부족자’를 의미한다. 주로 사회 초년생과 대학생·주부·노인 등 금융 소외자들이 해당된다.

신파일러가 얼마나 되기에 빅테크와 금융권이 눈독을 들이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신파일러는 1300만 명 정도인데, 이는 신용 등급을 매길 수 있는 국민 중 4분의 1 정도 되는 규모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신용 평가 기관인 나이스평가정보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전체 신용 등급 대상자 4730만7806명 중 신파일러는 총 1280만7275명(27.1%)으로 집계됐다. 이들은 높은 신용 등급을 줄 근거가 없어 통상 중간 수준의 신용 등급인 4·5등급(신용 점수 700~800점)을 부여받는다. 나이스평가정보는 최근 2년 동안 신용카드 사용 실적이 없고 3년 이내에 대출 보유 경험이 없으면 신파일러로 간주한다.

하지만 신파일러 대출 시장 자체는 크지 않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프리랜서나 미용실 헤어드레서, 자동차 딜러, 보험 영업 등은 소득 입증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신파일러 대출은 시장성보다 대출 대상자의 범위를 넓히는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도 “금융권이 이 시장에 드라이브를 거는 이유는 금융 정보 외 공공 요금과 월세 등 정보를 통해 대출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선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 즉 신용 평가 모델을 고도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신파일러 시장이 빅테크와 금융권에 선택이 아닌 ‘필수’ 공략지인 것은 분명하다. 고은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연령대가 낮은 고객이 신파일러인 경우가 많은데 당장의 이익보다 잠재 고객인 이들을 플랫폼에 계속 머무르게 하기 위한 ‘락인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며 “또 플랫폼 안에서 쇼핑 등 다른 결제 행위를 계속 이어 가거나 이들의 결제 정보가 쌓이다 보면 그 정보를 갖고 신용 평가 모형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BNPL에 힘주는 빅테크
처음부터 중금리 대출 확대를 목표로 만들어진 카카오뱅크·케이뱅크·토스뱅크 등 인터넷 전문은행은 대상 차주 범위를 기존 시중 은행보다 확대하고 대출 금리를 낮추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특히 카카오뱅크는 카카오그룹의 이점을 십분 활용했다. 카카오톡 선물하기 구매 실적이나 카카오택시 이용 등 카카오 계열사들의 결제·비금융 데이터를 활용한 새 신용 평가 모델을 고도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카카오페이도 카카오뱅크의 데이터를 내년 개시 예정인 후불 결제 서비스의 신용 평가에 적용할 계획이다.

현행법상 카카오페이, 네이버파이낸셜 등 선불 전자 지급 수단 발행 및 관리업자(선불업자)는 후불 결제 업무를 할 수 없지만 금융 당국이 혁신 금융 서비스를 통해 활로를 열어 놓은 상태다. 선불업자가 기본적인 개인 정보나 구매 이력 등 비금융 정보를 바탕으로 신용 평가가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카카오·네이버·토스 등 빅테크는 각자의 플랫폼을 기반으로 BNPL 방식의 후불 결제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카카오페이는 월 15만원 한도의 모바일 후불형 교통카드에서 첫 삽을 뜬다. 이를 기반으로 신용 평가 및 심사 모델을 고도화해 내년 하반기 중 후불 결제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네이버파이낸셜은 올해 4월부터 만 19세 이상, 네이버페이 가입 기간 1년 이상 사용자 일부를 대상으로 후불 결제 서비스를 시범 도입했다. 자체 심사를 통과한 사람에게 월 30만원의 한도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네이버페이 포인트로 60만원어치의 제품을 구매했을 때 충전 잔액이 30만원이라면 모자란 30만원은 다음 달에 지불하는 방식이다.

토스의 운영사 비바리퍼블리카도 소액 후불 결제 시장에 진입한다. 월 30만원 한도의 서비스를 내년 상반기에 선보일 계획이다.

다만 한국의 BNPL 서비스가 해외와 다른 점이 있다면 분할 납부가 안 되고 소액의 온라인 결제에만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고 수석연구원은 “한국의 BNPL 시장은 금융 당국의 세부 규제를 예의 주시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시중 은행도 반격
배달 라이더 모습. 사진= 한국경제 신문
배달 라이더 모습. 사진= 한국경제 신문
주요 시중 은행들도 신용 평가 모형을 고도화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우리은행은 올해 7월부터 통신·유통 정보와 가맹점 정보 등을 활용한 대안 신용 평가 모형을 개인 사업자에 적용했다. 머신러닝 기법을 활용해 BC카드사 가맹점 정보를 불러와 평가 모형에 반영했다. 우리은행은 이를 네이버파이낸셜과 제휴한 ‘스마트 스토어사업자(SME) 대출’ 상품에도 적용했다. 45만 명이 넘는 스마트스토어 사업자들을 잠재 고객으로 끌어들이겠다는 복안으로 풀이된다.

KB국민은행은 통신료 납부 이력, 이용 패턴, 로밍 등 통신 정보를 금융 거래 정보와 융합하는 방식으로 신용 평가 모델 개발에 착수했는데 올해 8월 주부, 사회 초년생,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한 ‘KB 처음이지(EASY) 신용대출’ 상품을 내놓았다.

또 은행권은 자영업자와 배민 라이더 등 금융 소외 계층으로 대출 상품을 확대하고 있다. KB국민은행과 우리은행이 올해 9월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과 손잡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KB국민은행은 외식업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첫 내 가게 마련 대출’ 상품을 내놓았고 우리은행은 배민 라이더를 대상으로 소득 증빙 없이 최대 300만원까지 대출을 제공한다.

신한은행도 올해 10월 배달 라이더 전용 소액 신용 대출 상품인 ‘쏠편한 생각대로 라이더 대출’을 출시했다. 12월엔 긱 워커(gig worker)의 긴급 생활 자금을 지원하는 ‘신한 급여 선지급 대출’을 선보였다. 긱 워커는 일정 기간 계약하고 일하는 초단기 노동자를 의미하는데, 배달 라이더들은 긱 워커인 경우가 많다.

이와 함께 은행권은 배달 앱 등을 통해 비금융 정보를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KB국민은행은 KB스타뱅킹에 주문 배달 플랫폼 요기요 배너를 등재해 주문 배달이 가능하도록 연계 서비스를 시작했고 신한은행은 아예 음식 주문·중개 플랫폼 ‘땡겨요’를 12월 중순부터 운영한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