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 리스트’ 청탁 지원자 합격 위해 女 지원자 점수 낮추는 등 점수 조작·남녀 차별

[법알못 판례 읽기]
KB국민은행 여의도 본점 전경. 사진=한국경제신문
KB국민은행 여의도 본점 전경. 사진=한국경제신문
‘부정청탁·채용 비리 1건도 없음.’

2017년 은행들이 채용 적정성에 대해 금융감독원에 보고한 자체 점검 결과다. 하지만 금감원이 현장 검사를 벌인 결과는 달랐다. 현장 검사 두 달 만에 금감원은 총 22건의 채용 비리 정황을 발견했다. 당시 이미 수사 중이던 우리은행을 시작으로 KB국민·신한·하나은행 등 전 시중은행이 채용 비리에 연루됐던 것이다.

이 가운데 KB국민은행은 ‘VIP 리스트’를 관리하며 남성 지원자들의 점수를 임의로 올려 여성 지원자를 탈락시키는 등 의도적인 남녀 차별의 정황 등이 드러나며 재판에 넘겨졌다.

소문으로만 듣던 남녀 차별 채용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이에 2022년 1월 14일 대법원은 KB국민은행과 임직원에 대해 유죄를 확정지었다. 당시 KB국민은행 인사팀장이던 A 씨는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회사도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으로 500만원의 벌금을 물게 됐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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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국민은행 측 1심부터 대법까지 모두 ‘유죄’

사건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KB국민은행 인사팀장 A 씨는 2015년 상반기 KB국민은행 신입 행원 채용 과정에서 일명 ‘VIP 리스트’를 받게 된다. 최고경영진 친인척뿐만 아니라 상사들로부터 청탁을 받은 지원자 명단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시 중에는 ‘신입 행원 최종 합격자의 남성과 여성 비율을 6 대 4나 7 대 3으로 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A 씨는 남성 지원자 113명에 대해 서류 전형 평가 심사위원들이 부여한 자기소개서의 평가 등급을 임의로 상향한 반면 여성 지원자 112명은 자기소개서의 평가 등급을 임의로 하향 조정했다.

또한 2차 면접 과정에서 청탁 대상자 20명을 포함해 28명의 면접 점수를 조작하고 그중 20명을 부정한 방법으로 합격시킨 혐의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2015년 하반기 신입 행원 채용과 2015∼2017년 인턴 채용 과정에서는 수백 명의 서류 전형과 면접 전형 점수를 조작하는 방법으로 청탁 대상자를 선발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A 씨를 비롯해 최종 결재권자인 전 부행장 B 씨, 인력지원부장·HR 총괄상무를 지낸 C 씨, 전 HR 본부장 D 씨 등 임직원 3명을 함께 기소했다.

1심 재판부는 2018년 10월 업무 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A·B·C 씨에게 각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했다. D 씨에게는 징역 10개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불법적인 조작으로 점수가 변경돼 당락이 달라진 지원자의 규모가 상당하다”면서도 “임직원들이 경제적 이득을 취득했다고 볼 사정이 없고 잘못된 관행을 답습하는 과정에서 범행에 이르게 됐다”며 집행 유예를 내린 이유를 설명했다.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혐의를 받는 주식회사 KB국민은행에는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A 씨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오히려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한 1심을 깨고 A 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한 뒤 법정 구속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다른 사건과 비교해 많은 지원자의 합격 여부가 변경돼 죄질이 좋지 않은 데도 범행을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A 씨는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원심의 판단은 바뀌지 않았다. 대법원 제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1월 14일 업무 방해와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KB국민은행 전 인사팀장 A 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다른 피고인들도 원심 형이 그대로 유지됐다.

신한은행 2심, 조용병 무죄…대법원 결과는?

2021년 11월에는 신한은행 신입 행원 공채 과정에서 드러난 채용 비리 사건 항소심의 결론이 나왔다. 해당 재판에서도 채용 비리와 관련해 재판에 넘겨진 임직원 대부분은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유일하게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만 1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받았다.

신한은행은 2013년 상반기부터 2015년 상반기까지 신입 사원 공채에서 부정 청탁 등을 통해 채용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조 회장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했지만 항소심은 이를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조 회장은 신한은행장으로 재직하던 2015~2016년 총 3명의 지원자 합격 과정에 부당하게 관여한 혐의로 2018년 기소됐다. 2심 재판부는 “이 중 2명은 부정 통과자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청탁 대상자이거나 은행 임직원 자녀라고 해도 일반 지원자와 마찬가지로 채용 과정을 거치고 대학이나 어학 점수 등 기본적인 스펙을 갖추고 있다면 부정 통과자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다.

재판부는 다른 한 명의 지원자에 대해서도 “조 회장이 지원자의 서류 지원을 전달한 사실만으로는 ‘합격 지시’로 간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조 회장이 합격 지시를 내린 것이라면 채용팀이 해당 지원자의 서류 전형은 통과시키고 1차 면접에서 탈락시키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조 회장과 함께 기소된 다른 인사팀 관계자들도 형량이 감경돼 벌금형이나 집행 유예를 선고받았다. 검찰은 항소심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대법원 상고를 결정했다.


[돋보기]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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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 채용, 왜 ‘업무 방해’로 처벌할까

앞선 은행들뿐만 아니라 기업의 채용 비리 사건을 처벌하는 규정은 바로 ‘업무 방해’다. 업무방해죄(형법 제314조)는 허위 사실 유포나 위계를 사용해 업무를 방해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이다.

즉 채용 과정에서 임직원들이 자신들의 위력을 이용해 점수 조작, 심사 자료를 조작했고 이로 인해 면접 담당자나 법인 등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논리다.

채용 비리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이 별도로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미국 등도 역시 채용 비리를 형사 처분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 기업의 영업 및 경제 활동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돼 있어 기업체의 고용 내용까지 형사법으로 막을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용 비리 처벌법의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업무 방해로 채용 비리를 처벌할 경우 피해자 구제가 어려워진다는 문제 때문이다. 채용 비리의 실질적 피해자는 합격권에 있었음에도 부정 청탁이나 점수 조작 등으로 탈락한 다른 지원자들이다.

하지만 업무방해죄로 채용 비리를 처벌하게 되면 법리적 피해자는 업무를 방해받은 회사나 면접 위원, 인사 담당자 등이 된다. 사실상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회사가 탄원서를 제출해 임직원의 양형을 낮추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채용 비리 사건을 심리한 재판부도 이를 지적했다. 2021년 11월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재판부는 선고 이후 “채용 비리를 처벌하는 별도의 조항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법 감정에 어긋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관행이란 핑계로 채용팀이 누군가의 지원 사실을 전달하거나 합불 결과를 미리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는 것조차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국회에서도 입법 공백을 없애기 위해 나섰다. 2021년 1월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채용 비리 처벌 특별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청탁자와 회사를 모두 처벌하고 부정채용자에 대한 채용 취소와 피해자 구제를 위한 절차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다만 법조계 관계자는 “부정 채용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등에 대한 구절이 모호하다”며 “기업의 재량권을 국가가 과도하게 침해하지 않게 구체적 규제 내용을 다듬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오현아 한국경제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