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는 없지만 , 최대한 쏟아부어 단숨에 선두권으로…

[비즈니스 포커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의 인수·합병(M&A) 질주는 올해도 이어졌다. 이번엔 가구·매트리스 기업인 지누스를 손에 넣었다. 지누스의 매출은 약 1조원이다. 그중 97%가 해외 시장에서 발생한다. 인수액은 약 9000억원이다. 현대백화점 창사 이후 최대 규모다.
아직 계약서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시장에서는 장밋빛 전망이 쏟아진다. ‘검증된 사업에만 투자하고 진출한 사업에서는 끝장을 본다’는 정 회장의 M&A 전략이 이번에도 빛을 발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지누스는 침대 매트리스를 압축 포장한 후 상자에 담아 배송해 주는 기술을 상용화해 성장한 기업이다. 미국 온라인 매트리스 시장을 사실상 평정했다. 수치로도 확인된다. 지누스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미국 전자 상거래 기업인 아마존의 침대 매트리스 카테고리 판매 1위를 차지했다. 아마존을 포함한 미국 온라인 매트리스 시장에선 30%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 중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에도 진출한 상태다.

이번 인수를 통해 현대백화점은 리빙 사업에서만 매출 3조6000억원을 올리는 한국 최대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또 약점으로 지적됐던 내수 사업 위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했다.

현대백화점의 지누스 인수를 바라보는 시장의 평가도 긍정적이다. 그간 정 회장이 단행한 M&A가 모두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유승우 SK증권 애널리스트는 “한국의 이커머스 시장 내 가구 배송 시장에선 아직 뚜렷한 강자가 없다”며 “현대백화점이 온라인에 강점을 가진 지누스를 앞세워 이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진단했다.

현대백화점의 추가 M&A에 대한 기대감도 높다. 지난해 창립 50주년을 맞아 “2030년 매출 40조원 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한 정 회장이 다시 한 번 적극적인 M&A를 앞세워 이 목표 달성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M&A 앞세워 10년 만에 매출 20조원과거에도 현대백화점의 성장 중심에는 정 회장의 M&A가 있었다. 정 회장은 2010년 ‘비전 2020’을 발표하며 현대백화점그룹을 ‘종합 생활 문화 기업’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후부터 유통에만 집중해 왔던 현대백화점은 사업 다각화를 위한 M&A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현대백화점은 이후 10여 년간 10여 건의 M&A를 진행했다. 그 결과 현대백화점은 ‘유통’과 함께 ‘패션’, ‘리빙·인테리어’라는 3대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2010년 7조8000억원이던 그룹의 매출은 10년이 지난 2020년 20조원을 달성했다. 대형 유통 기업 중 찾아보기 힘든 비약적인 성장이다.
“검증된 시장에만 진출해 끝장을 본다”…현대백화점의 M&A 성공 방정식
성장의 핵심 키워드는 정 회장이 보여준 돋보이는 M&A 전략이다. 투자업계에서 이번 현대백화점의 지누스 인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 회장은 큰 리스크를 떠안을 수 있는 ‘퍼스트 무버(개척자)’보다 다소 늦더라도 검증되고 안정적인 시장에 골라 진입하는 ‘패스트 팔로워(빠른 추격자)’ 전략을 구사해 왔다.
현대백화점이 이번에 인수한 지누스의 메트리스 제품들. 지누스는 전체 매출 1조 가운데 97%가 해외에서 발생한다.
현대백화점이 이번에 인수한 지누스의 메트리스 제품들. 지누스는 전체 매출 1조 가운데 97%가 해외에서 발생한다.
이는 현대백화점이 숱한 대형 M&A를 진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승자의 저주’에 빠지지 않은 채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 갈 수 있게 한 배경으로도 꼽힌다.

정 회장이 본격적으로 신사업 확대를 위한 M&A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것은 2010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이벌인 롯데와 신세계가 한창 대형마트 키우기에 열중하던 시기였다. 당시 대형마트는 문만 열었다 하면 성공이었다. 특히 골목 상권에 미치는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다. 이 때문에 롯데와 신세계를 두고 ‘유통 공룡’이라는 별명이 생겨나기도 했다. 반면 롯데·신세계와 함께 ‘유통 빅3’로 불렸던 현대백화점을 두고 ‘왜 대형마트 시장에 진출하지 않느냐’는 의구심이 늘 쏟아졌다.

정 회장의 선택한 길은 달랐다. 2012년 정 회장은 무려 4200억원이라는 금액을 써내며 패션 기업 한섬을 인수하는 결정을 한다. 또 가구 기업 리바트(현 현대리바트)도 500억원을 들여 손에 넣었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을 피하면서도 본업인 유통과 결합해 그룹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분야가 패션과 리빙·인테리어였다. 두 기업들이 가진 브랜드 파워와 현대백화점이 가진 유통망을 결합하면 미래에 충분한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M&A의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정 회장은 현대백화점 점포마다 리바트를 입점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그 결과 리바트는 현대백화점 피인수 후 매년 10% 매출 성장을 거듭하며 현재는 핵심 계열사로 자리매김했다.
뷰티 분야 M&A 가능성 높아인수 당시 5000억원 규모였던 리바트의 매출이 3배 정도 급증하며 지난해 1조4066억원을 기록했다.

정 회장의 M&A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17년에는 바닥재 등 건자재를 주력으로 생산하는 한화L&C(현 현대L&C)를 인수하며 ‘수직 계열화’를 만들었다. 인테리어 시장에서 현대리바트의 경쟁력이 높아질 수록 현대L&C가 판매하는 물량도 늘어나는 구조다.

이를 통해 현대백화점은 현재 한샘을 제치고 리빙 인테리어 시장의 선두 자리에 올랐다. 현대리바트와 현대L&C의 지난해 매출을 합하면 약 2조5000억원으로 한샘(약 2조3000억원)보다 많다. 최근 매출 1조원대의 지누스까지 인수해 현대백화점은 명실공히 업계 최강자가 됐다.

패션 부문에서도 한섬 하나로 만족하지 않았다. 경쟁력을 더욱 끌어올리기 위해 2017년 SK네트웍스 패션부문을 추가로 인수하며 승부수를 띄웠다.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한섬의 성장 속도가 더욱 빨라지며 현재 연매출 1조원을 돌파한 상태다.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 전문 기업이 됐다.

패션과 리빙·인테리어 사업 모두 첫발을 내디딜 때는 조심스럽지만 한 번 시작한 사업은 끝을 보는 정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다.

이런 그의 스타일을 감안할 때 올해 현대백화점이 뷰티·헬스케어 분야에서 지누스에 뒤를 잇는 대형 M&A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검증된 시장에만 진출해 끝장을 본다”…현대백화점의 M&A 성공 방정식
정 회장은 2020년 천연 화장품 업체인 SK바이오랜드(현 현대바이오랜드)를 인수하며 이 시장에 진출했다. 기능성 화장픔 시장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해서다.

여력도 충분해 보인다. ‘주력 사업’이 탄탄해서다. 현대백화점은 백화점 부문에서도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2월 서울 여의도에 미래형 백화점 ‘더현대 서울’을 열었다. 더현대 서울은 개점 1년 만에 매출 8000억원을 돌파했다. 오픈 당시 계획했던 매출 목표(6300억원)를 30% 가까이 초과 달성한 것이다. 이 기록은 한국 백화점 개점 첫해 매출 신기록이다.

더현대 서울의 성공은 파격적인 공간 디자인과 매장 구성, 차별화된 상품 기획(MD)의 경쟁력을 앞세운 것이 주효했다. 올해 신규 브랜드들의 입점은 물론 주변 상권 개발도 예정돼 있어 초대형 백화점의 잣대가 되는 ‘매출 1조 클럽’ 가입이 유력하다. 그 결과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더현대 서울을 앞세워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현대백화점이 신성장 동력으로 점찍은 뷰티·헬스케어는 백화점과 시너지를 내기 유리한 분야”라며 “그간의 행보를 봤을 때 좋은 매물이 나오면 현대백화점이 이를 놓치지 않고 인수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내다봤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