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 알고리즘으로 신용 평가해 연체율 낮춰
첫걸음 내디딘 한국형 BNPL

[비즈니스 포커스]
클라르나의 앱 화면. 사진=클라르나 제공
클라르나의 앱 화면. 사진=클라르나 제공
#한국. 출산으로 회사를 그만둔 주부 A 씨는 고민이 생겼다. 육아 용품 사는 게 만만치 않아 할부 금융이 가능한 신용카드가 필요하지만 회사 다닐 때 만든 카드의 연회비가 너무 비싸다. 해지하고 다른 카드를 발급받고 싶지만 ‘주부’로서 신용카드를 만들기 어려웠다. 그러다 최근 네이버페이와 쿠팡에서 신용카드 없이도 후불 결제가 가능한 서비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해외. 아디다스·갭(GAP)·세포라·H&M 등 글로벌 유명 브랜드 온라인 쇼핑몰과 메이시스(미국 최대 백화점), 월마트 등 오프라인 매장에 새로운 문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지금 사고 나중에 결제하라(Buy now, Pay over time).’ 세계 최대 전자 상거래 업체 아마존에서도 물건을 구매하고 결제하기 버튼을 누르면 ‘나중에 지불하라(Pay over time)’는 문구가 보인다.

아마존은 어펌(Affirm)을 도입했다. 이 소식에 미국 나스닥에선 어펌의 주가가 한때 40% 가까이 폭등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비전펀드2 등은 스웨덴 핀테크 업체 클라르나에 7000억원대 투자를 단행했다. 잭 도시 트위터 창업자가 이끄는 미국 핀테크 업체 스퀘어는 호주의 스타트업 애프터페이를 290억 달러(약 34조원)에 인수했다. 호주 인수·합병(M&A) 역사상 최대 규모 거래다.

아마존·손정의펀드·스퀘어가 손잡거나 투자·인수한 기업의 공통 키워드는 ‘외상(후불 결제)’이다. 어펌‧클라르나‧애프터페이는 해외에서 가장 잘나가는 후불 결제(BNPL : Buy Now, Pay Later) 기업이다. BNPL은 ‘지금 사고 돈은 나중에 내라’는 의미로, 일단 소비자가 물건을 받은 뒤 향후 몇 달 동안 비용을 나눠 갚는 방식이다.

한국도 네이버·카카오·토스·쿠팡 등이 BNPL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KB은행과 신한은행 등 금융권에서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BNPL 시장이 2025년까지 1조 달러(약 1152조원) 규모로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BNPL이 뭐야
해외에서 붐을 일으킨 BNPL…. 그런데 ‘할부 결제’, ‘후불 결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신용카드’다. BNPL은 신용카드와 무엇이 다를까.

우선 소비자는 신용카드를 만들기 위해선 말 그대로 개인의 신용을 증명할 수 있는 정보를 입력해야 한다. 직장이나 사는 곳, 계좌 등이다. 또 카드사들은 그동안의 결제 데이터를 분석해 카드를 발급해 주고 한도를 정해 준다. 금융 이력이 없는 주부나 학생, 사회 초년생 등이 신용카드를 만들기 어려운 이유다.

반면 BNPL은 서비스 가입 과정에서 신용카드와 달리 개인 신용도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 일정 연령 이상이면 ‘누구나’ 가입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업체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할부 수수료도 없다. 손쉽게 BNPL 서비스에 가입한 소비자는 쇼핑몰에서 물건을 구매하고 일정 기간 나눠서 갚는다. 한국보다 신용카드 발급이 더 까다롭고 할부 결제 서비스가 없는 해외에서 BNPL이 소비자에게 환영 받고 있는 이유다.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은 BNPL 시장 성장에 불을 댕겼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온라인 쇼핑 시장이 커지며 덩달아 BNPL 시장도 확대됐다. 온라인 쇼핑에 익숙하지만 지갑이 얇은 젊은층이 체크카드 전액 결제 대신 무이자 할부 서비스가 가능한 BNPL를 이용하는 사례가 늘었다. 글로벌 시장 조사 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미국 내 BNPL 서비스를 한 번이라도 이용한 사용자 비율(2020년 7월 대비 2021년 3월)은 18~24세가 38%에서 61%로 훌쩍 뛰었다. 25~34세도 47%→60%로, 35~44세는 50%→61%로 증가했다.

기업의 비즈니스 구조는 간단하다. BNPL은 밴(VAN)사나 신용 정보 회사 등 중간 단계가 없다. 소비자, BNPL 업체, 판매자만 있을 뿐이다. 소비자가 물건을 구매하면 BNPL 업체가 소비자 대신 판매자에게 일시불로 물건 값을 지불한다. 소비자는 BNPL 업체에 할부 기간 동안 매달 비용을 지불하면 된다.

중개 역할을 한 BNPL 업체는 가맹점에서 높은 수수료를 받아 수익을 챙긴다.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가 대개 2~4%라면 BNPL 업체들은 가맹점 수수료를 5~6%까지 받는다. 또 소비자에겐 연체율을 받는다. 이를 바탕으로 충당금을 쌓아 부실 리스크에 대비한다.
그래픽=배자영 기자
그래픽=배자영 기자
판매자들은 왜 도입할까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데 연체율이 높지 않을까.

BNPL이 빠르게 성장한 미국에선 금융 당국과 언론 등이 예의 주시하고 있다. 야후파이낸스는 “미국 BNPL 이용자의 34%는 최소 1건 이상의 결제를 연체했고 72%는 신용 등급이 떨어졌다”며 금융회사 크레디트 카르마의 조사를 인용했다. 미국 소비자금융보호국(CFPB)은 ‘과소비’와 ‘연체율 급증’ 등을 지적하며 어펌‧애프터페이‧클라르나 등 주요 BNPL 업체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기도 했다.

다만 BNPL 업체들은 자체 알고리즘과 내부 신용 평가 모델 등을 활용해 채무 불이행 비율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도 연체율에 대한 지적이 나왔다. 지난해 가장 먼저 BNPL 서비스를 선보인 곳은 네이버파이낸셜이다. 국민의힘 윤창현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네이버페이 후불 결제 고객의 지난 3월 연체율(1개월 이상)은 1.26%로 파악됐다. 지난해 말 신용카드 연체율 0.54%의 두 배가 넘는다. 네이버페이 후불 결제 서비스의 총채권액은 75억9900만원으로, 그중 9600만원이 30일 이상 연체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네이버파이낸셜 측은 “수백만, 수천만원인 카드사의 월 결제 한도와 최대 30만원인 네이버페이 후불 결제를 동일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적은 금액이 밀려도 연체율이 높게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둘째 의문은 수수료율이다. 수수료율이 높은데 판매자는 왜 BNPL 서비스를 도입할까.

한 가지 사례. 미국 온라인 결제 업체 페이팔은 2020년 말 ‘페이 인 4(Pay in 4)’라는 BNPL 서비스를 도입했다. 페이 인 4 서비스 사용량은 지난해 블랙 프라이데이(미국 최대 규모 쇼핑 행사) 기간 전년 대비 400% 증가했다. 디자이너 브랜드나 노트북 등 값비싼 제품들을 바로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젊은층이 늘어난 영향이다. 미국 매체 페이먼트닷컴에 따르면 온라인 쇼핑객의 54%는 BNPL 옵션이 있다면 다른 국가에서 물건을 살 의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비자 사용량이 많은 결제 시스템을 판매자들은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클라르나는 유럽의 최대 BNPL사로 17개국에 진출했고 가맹점 25만 개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내 2000만 명을 포함해 전 세계 사용자는 9000만 명이다. 호주를 중심으로 성장 중인 애프터페이는 1000만 명이 사용한다. 호주 전체 인구의 38%다.

시장이 커지자 대기업들도 BNPL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다. 신용카드 회사 아메리칸익스프레스는 100달러 이상 구매 시 최대 24개월간 무이자로 분할 납부할 수 있는 ‘플랜 잇(Plan it)’ 서비스를 내놓았다. 예컨대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카드로 델타항공에서 100달러 이상 결제하는 사람들에게 BNPL 서비스를 제공한다. 글로벌 정보기술(IT) 공룡 애플도 ‘애플 페이 레이터’라는 이름으로 BNPL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아이폰 등 애플 기기에 설치된 애플페이로 물건을 살 때 BNPL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선택 옵션을 제공한다는 얘기다.
애프터페이와 아마존 홈페이지  BNPL 서비스 설명 화면 캡처.
애프터페이와 아마존 홈페이지  BNPL 서비스 설명 화면 캡처.
한국 시장은 ‘다르다’
한국의 BNPL 시장은 해외와 조금 다르다. 한국은 신용카드 문화가 잘 정착돼 있다. 해외 BNPL 업체들이 내세우는 ‘무이자 할부’는 우리에겐 친숙한 문구다. 또 현행법상 후불 결제는 신용카드사 외에는 불가능하다. 그동안 이미 후불 결제 시장을 꽉 잡고 있는 신용카드사가 구태여 금융 이력이 없는 소비자를 공략하기 위해 BNPL 서비스를 출시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금융 당국이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빅테크가 ‘제한적인’ 소액 후불 결제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 줬다. 네이버파이낸셜·카카오페이·토스 등을 중심으로 BNPL 서비스가 ‘시범적’으로 출시됐다.

제한적인 만큼 해외 BNPL 서비스와 다른 점이 있다. 분할 납부가 안 되고 온라인 결제에만 한정돼 있다. 최대 한도는 30만원이다. 또 판매자에게 높은 수수료를 부과해 수익을 내는 해외와 달리 네이버와 토스는 수수료가 비싸지 않다. 신용·체크카드 등 다른 결제 방식의 수수료와 동일하다. 한국 기업들이 당장 수익성을 쫓기보다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해 플랫폼 이용자(판매자·소비자)들이 계속 머무르게 하기 위한 플랫폼 잠금(lock-in) 효과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의 수수료는 1.8%(연매출 3억원 이하)~3.3%(연매출 30억원 이상)다. 토스는 구체적인 수치는 밝히지 않았지만 “토스페이 수수료 체제를 따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점은 한국의 BNPL은 타깃층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해외도 젊은층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것은 분명하지만 4050 직장인들까지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선 신용카드 혜택이 많아 직장인의 마음을 홀리기가 쉽지 않다. 결국 긱 워커(조직과 정해진 출퇴근 시간 없이 수입을 올리는 노동자)·주부·대학생 등이 고객이 되는 셈이다. 짚고 갈 점은 최근 이들을 타깃한 새로운 신용 평가의 필요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신파일러(thin filer : 금융 이력 부족자)는 1300만 명 정도인데, 이는 신용 등급을 매길 수 있는 국민 중 4분의 1 정도 되는 규모다.

최근 카드사를 중심으로 금융권이 BNPL 서비스에 관심을 보이며 핀테크 업체가 의기투합하는 배경이다. 신한금융에선 은행과 카드가 탐색전을 펼치고 있다. 신한카드는 한국 1호 대안 신용 평가 기업 크레파스솔루션과 함께 개발한 대안 신용 평가 모형을 금융사와 후불 결제사에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신한은행은 NHN페이코와 BNPL 서비스를 개발한다.

KB금융에선 KB국민카드가 앞장섰다. KB국민카드는 올해 하반기 BNPL 서비스를 출시한다. KB국민카드 사내벤처팀 하프하프는 통합 결제 서비스 기업 다날과 손잡았다. 이들은 비금융 정보 기반의 대안 신용 평가 시스템을 공동으로 구축한 후 금융 이력이 부족한 젊은층을 겨냥해 BNPL 결제 플랫폼을 선보인다는 복안이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가맹점 수수료율 인하, 카드론에 대한 차주별 총부채 원리금 상환 비율(DSR) 적용,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조달비용 상승 등 카드사의 영업 환경이 좋지 않다”며 “그간 리스크 관리 능력과 신용 평가 모형 고도화에 노력을 기울인 카드사로선 새로운 수익원으로 BNPL 서비스에 관심을 가질 만하다”고 분석했다.

이어 “후불 결제는 안정적인 상환을 위해 주로 급여 소득자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였는데 BNPL이 이 같은 전통적인 이론을 깼다”며 “데이터 분석 능력, 신용 평가 모델, 플랫폼 경쟁력, 위험 관리 노하우 등 4가지가 경쟁력”이라고 덧붙였다.
그래픽=송영 기자
그래픽=송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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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BNPL은 쿠팡이 1등?


쿠팡은 네이버와 카카오보다 앞서 후불 결제 시험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2020년 후불 결제 서비스 ‘나중 결제’를 도입했고 2021년 한도를 월 30만원에서 50만원 이상으로 늘리며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소비자들의 연체 상황 등에 따라 한도를 늘리거나 축소해 소비자가 연체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쿠팡은 금융 당국의 규제 샌드박스와는 무관하다. 쿠팡이 직매입해 판매하는 로켓 배송 상품을 주문할 때만 나중 결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판매자가 쿠팡인 만큼 후불 결제에 해당하지 않는 셈이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