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적 이점에 외국군 핵심 주둔지로, 정치권 부지 개발 경쟁 격화

[스페셜 리포트]
7전8기 용산, 영욕의 땅에서 정치·경제 요충지로[알쓸신잡 용산⑥]
또, 용산이다.

2022년 상반기 윤석열 대통령이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용산 시대를 열더니 하반기에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용산정비창 개발 계획을 발표하며 용산의 르네상스를 예고했다.

오 시장은 7월 26일 용산정비창 일대 개발 계획을 발표하며 “더 늦기 전에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서울시장 4선인 그가 지난 임기 때 추진했지만 2013년 최종 무산된 이후 10년간 지지부진했던 사업의 재개발 계획을 다시 알린 것이다.

시민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혹자는 개발 소식에 땅값이 뛸까 기대하지만 무수한 공약과 무산의 역사가 반복되다 보니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많다. 그만큼 대한민국에 마지막 남아 있는 노른자위 땅 용산에는 숱한 역사가 쓰였다. 근대에는 일본군과 미군의 기지로 활용돼 ‘금단의 땅’이었다가 ‘자유의 땅’이 된 이후에는 정치인의 공약이 난무했다. 야욕의 땅이기도 했고 영욕의 땅이기도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022년 7월 26일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구상을 발표하고 있다. 2007년에 이은 둘째 재시도다. 사진=연합뉴스
오세훈 서울시장이 2022년 7월 26일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구상을 발표하고 있다. 2007년에 이은 둘째 재시도다. 사진=연합뉴스
글로벌 진출 '요충지' 된 용산 “‘용산(龍山)’은 이곳 언덕에 용이 나타났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 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는 용산의 지명에 담긴 유래가 나온다. 용은 왕을 뜻한다. 이 때문에 서울 용산은 예부터 대한민국 명당으로 꼽혔다. 뒤에는 남산이 있고 앞에는 한강이 궁수형으로 감아 돌아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 자리다.

명당에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지사다. 용산은 조선시대 때는 거상의 본거지였다. 넓은 평지에다 남쪽으로는 한강을 끼고 있어 전국의 조운선(화물선)이 몰려들다 보니 세금으로 걷힌 쌀과 공납품이 모이는 포구로 크게 발전했다.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지만 과거 만조 때는 서해 바닷물이 역류해 용산까지 오곤 했다. 이때 전국 각지의 배들이 서울에 들어와 모인 곳이 용산나루였다.
1910년 10월 일제강점기 조선에 설립된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철도의 관리, 운영, 운송 업무 등을 관장했다. 현 용산정비장 터인 용산구 한강로동 일원에 위치했다. 사진=용산도시역사아카이브
1910년 10월 일제강점기 조선에 설립된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철도의 관리, 운영, 운송 업무 등을 관장했다. 현 용산정비장 터인 용산구 한강로동 일원에 위치했다. 사진=용산도시역사아카이브
북쪽엔 남산이 성벽 역할을 하고 있어 군사 요충지로도 활용됐다. 이는 곧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한 땅이라는 뜻이다. 용산은 오히려 좋은 입지 때문에 질곡의 역사를 견뎌야만 했다.
몽골·청·러시아·일본 등 한반도를 침략한 외세들이 이곳 용산에 돌아가며 병참 기지를 세웠다. 특히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일본군의 주둔지로 용산을 활용했다. 군사기지(현 용산공원터)와 철도기지(현 용산정비창터)를 건설해 강압적 식민 지배의 본산으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대규모 병력의 출정과 귀환이 용산에서 반복되면서 용산역은 무수히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징병·징용으로 머나먼 이역에 끌려가야 했던 강제 동원의 출발지가 돼야 했다.

광복이 되면서 미군 시대가 열렸다. 990만㎡의 병영 시설을 갖추고 있던 자리에 미 7사단 병력 1만5000명이 주둔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작전권을 미군에 위임했고 1953년 7월 휴전 후 이 지역을 미군에 공여했다. 이를 계기로 용산 일대는 장기간 주한미군의 중추로 기능해 왔다. 주한미군 일부는 치외 법권이란 울타리 아래서 ‘윤금이씨 살해 사건’, ‘효순이 미순이 사건’ 등 흉악 범죄를 저질렀지만 한국 정부는 미군에 대한 어떠한 재판권도, 처벌권도 없었다.

한 세기 넘게 외국군의 핵심 주둔지라는 멍에를 쓰게 되면서 용산은 실상 ‘이방인들의 땅’으로 각인됐다. 식민과 분단 시대의 상흔이 오롯이 담긴 한국 근현대사의 그늘을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던 강남이 대한민국 부촌으로 자리 잡을 동안 개발의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물론이다.
광복 후 용산 일대는 장기간 주한미군의 중추로 기능해 왔다. 사진은 2014년 4월 방한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과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내 주한미군병사. 사진=공동취재단
광복 후 용산 일대는 장기간 주한미군의 중추로 기능해 왔다. 사진은 2014년 4월 방한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과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내 주한미군병사. 사진=공동취재단
용산에 변화가 감지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2003년 5월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용산 기지 이전 및 미2사단 재배치 계획’에 합의하면서 주한미군의 주무대가 용산 기지에서 경기도 평택으로 옮겨졌다.

2004년 12월 미군 기지 평택 이전 협정이 체결되고 2009년에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변화가 시작됐다. 이방인의 땅이자 식민과 분단 시대의 상흔을 간직한 용산에 평화의 공원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용산 기지 이전 및 미2사단 재배치 계획’을 합의한 2003년 한미정상 회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회담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DB
‘용산 기지 이전 및 미2사단 재배치 계획’을 합의한 2003년 한미정상 회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회담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DB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 시한은 이미 지난 지 오래다. 하지만 여전히 단계적인 반환 절차를 밟고 있다. 현재 주한미군사령부와 미8군사령부는 이전을 마쳤고 기지의 각종 편의 시설도 폐쇄됐지만 북쪽 노스포스트 구역 등은 한·미연합사령부가 여전히 사용 중이어서 반환이 늦어지고 있다. 정부는 여의도(290만㎡) 면적에 맞먹는 용산기지를 2027년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처럼 도심 속 국가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서울의 허파’가 될 것이란 약속이다. 정치적 요충지, 용산 개발 논쟁 군사기지였던 현 용산공원터가 국가공원으로 자리했다면 남은 공간이 하나 또 있다. 일제가 철도기지로 썼던 현재의 철도정비창터다. 철도정비창 시설이 광복 이후에도 유지되며 이 지역 일대인 서부이촌동(이촌2동) 쪽은 개발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미군기지를 끼고 있던 동부이촌동(이촌1동)이 1970년대 대규모 고급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정재계 거물급 인사들의 터전인 대한민국 부촌으로 발전한 것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실제 오래된 부촌 유엔빌리지에는 각계 명사와 연예인이 자리 잡으며 부자의 색깔이 변했다. 그 인근에는 단국대 부지에 들어선 한남더힐, 외인아파트 부지에 들어선 나인원한남 등이 자리 잡으며 최고의 부촌을 형성한다.)

정비창 부지는 서울 한복판에 여의도공원의 2배, 서울광장의 40배에 달하는 규모로 자리한 서울에 마지막 남은 금싸라기 땅이다. 천혜의 입지를 가진 땅이 미개발 상태니 이곳을 두고 정치권의 부지 개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치적용으로 이만한 노른자위 땅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007년 ‘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을 발표했으나, 좌초됐다. 사진은 2021년 서울시장 후보시절 서울 용산구 전자랜드 신관에서 용산 경제 정책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사진=국회사진기자단
오세훈 서울시장은 2007년 ‘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을 발표했으나, 좌초됐다. 사진은 2021년 서울시장 후보시절 서울 용산구 전자랜드 신관에서 용산 경제 정책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사진=국회사진기자단
2006년 지방선거에 나선 여야 서울시장 후보들은 저마다 용산 일대의 대규모 개발 계획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당시 오세훈 후보 역시 용산역 일대를 국제 업무지구로 지정해 컨벤션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안을 내놓았다. 당선 이후 프로젝트는 더 과감해졌다. 2007년 오 시장이 이끄는 서울시는 용산정비창 부지와 인근 서부이촌동을 묶어 이곳을 아파트와 금융·정보기술(IT) 기업 등이 밀집한 업무지구로 조성한다는 ‘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을 발표했다. ‘단군 이후 최대 개발 사업’이란 딱지가 붙을 정도였다. 정비창의 땅 주인인 코레일은 사업 과정에서 용산정비창 부지를 5조원 정도에 이 사업 민간 시행사였던 드림허브에 매각했다. 그런데 이듬해 금융 위기가 닥쳤다. 2013년 시행사가 쓰러졌고 이 사업은 물론 부지 매각도 무산됐다. 오 시장의 첫째 불발이었다.
2009년 1월 발생한 '용산참사'.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한강대로변 재개발지역에서 농성중인 철거민들이 경찰의 강제진압이 시작된 후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하다 망루에 지른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09년 1월 발생한 '용산참사'.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한강대로변 재개발지역에서 농성중인 철거민들이 경찰의 강제진압이 시작된 후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하다 망루에 지른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 무렵 용산 개발 과정에서 재개발 보상 대책에 반발하던 철거민과 경찰이 대치하던 중 화재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용산 참사’다. 당시 이명박 정부와 오세훈 서울시장은 용산역 주변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실시했다. 이 중에서도 알짜로 꼽히는 용산 4구역 공사에서 보상안을 놓고 점거 농성을 벌이던 세입자와 용역 직원, 경찰특공대 간 무력 충돌이 벌어지면서 발생한 화재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 용산시대.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될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의 모습이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연 용산시대.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될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의 모습이다. 사진=연합뉴스
2022년 용산의 개발 시계는 다시 빨라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용산 시대의 문을 열었고 오세훈 시장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오 시장은 2013년 좌초된 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을 다시 이어 나갈 계획이다. 그는 “그동안 많은 부침을 겪었다. 지난 임기 때 추진했던 용산국제업무지구 도시 개발 사업이 2013년 최종 무산된 이후 추진 동력을 잃어 버린 상태였다”며 “더 늦기 전에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오 시장에게 이번 용산 개발은 놓칠 수 없는 마지막 찬스다.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대권을 움켜쥐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오 시장에게 용산은 대선 로드로 가게 할 정치적 요충지다. 이번엔 다를까.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