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적 이점에 외국군 핵심 주둔지로, 정치권 부지 개발 경쟁 격화
[스페셜 리포트]
2022년 상반기 윤석열 대통령이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용산 시대를 열더니 하반기에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용산정비창 개발 계획을 발표하며 용산의 르네상스를 예고했다.
오 시장은 7월 26일 용산정비창 일대 개발 계획을 발표하며 “더 늦기 전에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서울시장 4선인 그가 지난 임기 때 추진했지만 2013년 최종 무산된 이후 10년간 지지부진했던 사업의 재개발 계획을 다시 알린 것이다.
시민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혹자는 개발 소식에 땅값이 뛸까 기대하지만 무수한 공약과 무산의 역사가 반복되다 보니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많다. 그만큼 대한민국에 마지막 남아 있는 노른자위 땅 용산에는 숱한 역사가 쓰였다. 근대에는 일본군과 미군의 기지로 활용돼 ‘금단의 땅’이었다가 ‘자유의 땅’이 된 이후에는 정치인의 공약이 난무했다. 야욕의 땅이기도 했고 영욕의 땅이기도 했다.
명당에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지사다. 용산은 조선시대 때는 거상의 본거지였다. 넓은 평지에다 남쪽으로는 한강을 끼고 있어 전국의 조운선(화물선)이 몰려들다 보니 세금으로 걷힌 쌀과 공납품이 모이는 포구로 크게 발전했다.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지만 과거 만조 때는 서해 바닷물이 역류해 용산까지 오곤 했다. 이때 전국 각지의 배들이 서울에 들어와 모인 곳이 용산나루였다.
몽골·청·러시아·일본 등 한반도를 침략한 외세들이 이곳 용산에 돌아가며 병참 기지를 세웠다. 특히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일본군의 주둔지로 용산을 활용했다. 군사기지(현 용산공원터)와 철도기지(현 용산정비창터)를 건설해 강압적 식민 지배의 본산으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대규모 병력의 출정과 귀환이 용산에서 반복되면서 용산역은 무수히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징병·징용으로 머나먼 이역에 끌려가야 했던 강제 동원의 출발지가 돼야 했다.
광복이 되면서 미군 시대가 열렸다. 990만㎡의 병영 시설을 갖추고 있던 자리에 미 7사단 병력 1만5000명이 주둔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작전권을 미군에 위임했고 1953년 7월 휴전 후 이 지역을 미군에 공여했다. 이를 계기로 용산 일대는 장기간 주한미군의 중추로 기능해 왔다. 주한미군 일부는 치외 법권이란 울타리 아래서 ‘윤금이씨 살해 사건’, ‘효순이 미순이 사건’ 등 흉악 범죄를 저질렀지만 한국 정부는 미군에 대한 어떠한 재판권도, 처벌권도 없었다.
한 세기 넘게 외국군의 핵심 주둔지라는 멍에를 쓰게 되면서 용산은 실상 ‘이방인들의 땅’으로 각인됐다. 식민과 분단 시대의 상흔이 오롯이 담긴 한국 근현대사의 그늘을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던 강남이 대한민국 부촌으로 자리 잡을 동안 개발의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물론이다.
2004년 12월 미군 기지 평택 이전 협정이 체결되고 2009년에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변화가 시작됐다. 이방인의 땅이자 식민과 분단 시대의 상흔을 간직한 용산에 평화의 공원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정비창 부지는 서울 한복판에 여의도공원의 2배, 서울광장의 40배에 달하는 규모로 자리한 서울에 마지막 남은 금싸라기 땅이다. 천혜의 입지를 가진 땅이 미개발 상태니 이곳을 두고 정치권의 부지 개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치적용으로 이만한 노른자위 땅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 시장에게 이번 용산 개발은 놓칠 수 없는 마지막 찬스다.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대권을 움켜쥐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오 시장에게 용산은 대선 로드로 가게 할 정치적 요충지다. 이번엔 다를까.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