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단계별 지원·제재 완화 위험…北, 우리 역대 정부에 얻을 건 얻고 합의 파기 일쑤

홍영식의 정치판
尹의 ‘담대한 구상’, 조급증 내면 北 살라미 전술에 당해[홍영식의 정치판]
역대 대통령들은 임기 초 ‘획기적’, ‘패러다임 전환’ 등 요란한 수식어를 붙인 대북 정책 청사진을 밝혔다. 어떻게든 임기 5년 내 대북 정책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고 싶은 의욕은 좌우 정부를 가리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 정책’,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등이 이어져 나왔다.

각 정책마다 강조점은 다소 달랐지만 큰 틀에서는 당근책을 제시해 한반도 평화 또는 북한 비핵화를 유도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경제 지원 내용을 보면 우파 정부가 더 파격적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10년 내에 1인당 소득을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하겠다는 ‘비핵 개방 3000’ 정책 아래 △북한 내 5대 자유무역지대 설치 △북한 지원용 국제 협력 자금 400억 달러 조성 △신경의고속도로 건설 △북한 지역 연간 300만 달러 이상 수출 가능한 200개 기업 육성 등을 제시했다.

한강 하구지역에 여의도 면적의 10배 크기로 인공섬을 건설, 남북 경협 단지를 만드는 ‘나들섬 구상’도 내놓았다. ‘이명박판 마셜플랜’이라고도 불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북한이 핵의 장막을 거두고 개혁·개방으로 나온다면 북한 경제 회복과 성장을 위한 지원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엔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건설, 남북한 경의선·동해선 도로 및 철도 연결 등 사업이 이뤄졌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의 대가로 북한에 5억 달러를 송금한 사실이 드러났다. 다만 이명박 정부 때 북한 군에 의한 남측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남북한 관계가 경색됐다. 이를 풀기 위해 양측 관계자가 중국 베이징에서 만났을 때 북측이 거액의 현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남측이 거절하면서 관계가 악화됐다. 어떻든 역대 정부마다 의욕적인 대북 정책을 제시했지만 결과는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담대한 구상’이란 타이틀로 큰 틀의 대북 정책을 내놓았다. 그 내용을 보면 북한 비핵화를 전제로 한 ‘원칙적인 대북 정책’을 천명해 온 정부가 맞나 싶을 정도로 파격적이다. 요약하면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그 단계에 맞춰 북한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게 골자다.
비핵화 의지만 보이면 식량·금융 등 대규모 지원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대규모 식량 지원 △발전·송배전 인프라 구축 △교역 확대를 위한 항만·공항 현대화 △농업 생산성 제고를 위한 기술 지원 프로그램 △병원과 의료 인프라 현대화 지원 △국제 투자·금융 지원 프로그램 등 대규모 지원을 망라했다. 북한의 비핵화 이전이라도 비핵화를 위한 각 단계별 조치에 상응해 대북 경제 협력 방안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8월 17일 취임 100일 기자 회견에서 북한이 확고한 비핵화 의지만 보여주면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다. 김태효 대통령실 안보1차장은 “포괄적인 비핵화 합의가 도출되면 동결·신고·사찰·폐기로 나아가는 단계적 비핵화 조치에 상응해 경제 협력을 위한 남북공동경제발전위원회를 가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차장은 대규모 식량 지원과 관련해선 ‘한반도 자원 식량 교환 프로그램(R-FEP)’을 제안했다. 국제 사회가 이라크의 석유를 사주는 대가로 식량을 지원한 ‘석유 식량 교환 프로그램’과 같이 식량·생필품 공급과 북한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연계하는 것이다. 대통령실은 정치·군사 부문의 협력 로드맵도 준비했다고 밝혔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지난 7월 대통령 업무 보고 뒤 브리핑에서 “담대한 계획 안에 북한이 제기한 안보 우려와 요구 사항을 포함해 경제적·안보적·종합적 차원의 상호 단계 조치가 포괄적으로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려되는 바가 적지 않다. 물론 북한이 대화에 일절 응하지 않고 핵 보유국을 위한 직진 일변도로 달리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협상의 장으로 끌어낼 필요성이 있다는 시급성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비핵화 단계마다 지원한다는 이른바 ‘단계적 동시 조치’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역대 정부에서 숱하게 봐 왔던 대북 정책 실패 방정식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북한 특유의 ‘살라미 협상 전술’에 말려들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위협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협상력을 높인 다음 단계별로 하나씩 얻은 뒤 핵 검증 단계에서 합의를 파기하는 행태를 반복해 왔다. 그러는 사이 뒤로는 핵 고도화 작업을 지속해 왔다. 2005년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9·19 공동 성명’ 1년 뒤 핵실험을 강행했고 2007년 2·13 합의 뒤 미국이 대북한 테러 지원국 지정 해제를 발표했지만 이듬해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고 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2012년엔 핵·미사일 실험 유예와 대북 지원 내용이 포함된 ‘2·29 합의’ 두 달 뒤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의 또 하나의 전술은 남측 대통령 임기 5년을 교묘하게 활용한다는 점이다. 얻을 것은 얻은 뒤 임기 말 파투를 내는 식이다. 임기 내 성과를 내려는 의욕이 앞서다 보면 자칫 북측에 되치기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비핵화 단계별 대북 제재 완화 또는 유예를 언급한 것은 섣부르다는 지적이다. 제재는 한 번 풀어지면 다시 조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북한이 비핵화 시늉만 하고 약속을 밥 먹듯이 어겼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북한, 체제 안전 위한 최후 보루인 핵 포기하지 않을 것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할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핵을 체제 안전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 여기기 때문이다. 북한의 목표는 핵 보유국 지위에 있다. 웬만한 수준의 제재 완화 당근으로는 쉽사리 먹힐 가능성이 낮다는 얘기다. 북한이 “피가 마르는 고통을 겪었다”며 협상에 나오도록 한 2005년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 북한 자금 동결과 국제 사회의 강력한 압박에 못 이겨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갑자기 대화로 방향을 튼 것과 같이 핵 포기로 이끌어 내는데는 오히려 제재 강화가 효과적이라는 게 증명됐다. 북한이 설령 핵 포기로 나아가더라도 이전과 달리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요구 사항들을 늘어놓을 게 뻔하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일각에선 ‘담대한 구상’에 대북 안전 보장이 빠져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경제 지원과 제재 완화에 이어 안전 보장까지 다 약속한다면 협상하기도 전에 미리 패를 다 까는 꼴이고 북한의 협상력만 높여줄 뿐이다. 북한을 대화로 유인하기 위해 한·미 연합 실기동 훈련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강한 군사력은 협상력을 높여 주는 지렛대라는 점에서도 실기동 훈련을 중단해선 안 된다.

정부는 담대한 구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역대 정부가 의욕적으로 내놓았던 대북 정책들이 왜 하나같이 실패로 돌아갔는지 하나하나 점검해 ‘담대한 구상’이 자칫 ‘담대한 지원’에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비핵화 단계별 지원 또는 제재를 완화하더라도 철저하고 엄정한 검증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조급증을 내다가는 북한에 역이용당하고 핵 고도화 시간만 벌어줄 뿐이다.

홍영식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한경비즈니스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