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바이오·반도체(BBC)도 메이드 인 아메리카 ‘비상’
동맹 외치더니 선거 앞두고 뒤통수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내 생산을 장려하는 법안과 행정 명령을 잇따라 발동하면서 ‘메이드 인 아메리카’ 공세의 수위를 높여 가고 있다.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IRA)으로 전기차 세제 혜택 대상을 북미산으로 제한해 현대차가 피해를 입게 됐다. 또 배터리 부품과 광물을 미국산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 제품으로 일정 비율 이상을 채워야 하는 규정도 심어 놓아 중국산 배터리 원료와 소재 의존도가 높은 K-배터리 기업들도 비상이 걸렸다.
반도체 산업육성법에는 미국 정부 보조금을 받으면 향후 10년간 중국 투자를 금지하는 가드레일 조항을 포함시켜 중국에서 생산 공장을 운영 중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압박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 바이오산업에서도 미국 내 연구와 제조를 강조하면서 삼성바이오로직스·SK바이오사이언스·셀트리온 등 한국의 바이오 의약품 제조 업체들이 술렁이고 있다. 트럼프보다 독해진 미국 우선주의
바이든 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부터 오바마 행정부 부통령 시절까지 친중 성향을 유지해 왔다. 2011년에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중국이 성공하면 미국이 덜 번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번영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에 우호적이었던 그의 대중관은 대통령 취임 이후 180도로 바뀌었다. 중국이 급성장하자 미국의 국가 안보와 국익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본격적인 중국 견제에 나서면서 사실상 무역 정책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정책 기조를 계승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중국과의 무역이 불공정하다는 이유를 들어 2018년 7월 중국산 제품 2200여 개에 ‘관세 폭탄’을 투하하면서 중국과 무역 전쟁을 시작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중국 외교·대중 정책은 ‘극단적 미국 우선주의’라는 평가를 받았던 트럼프 전 대통령보다 더 강도가 세고 노골적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6월 방위 산업이나 감시 기술 개발과 관련 있는 59개 중국 기업에 대한 미국 기업·개인의 투자를 금지하는 행정 명령을 발표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블랙리스트가 중국 군부의 소유, 통제 또는 기타 계열 기업을 대상으로 했다면 바이든 대통령은 더 광범위하다.
중국 3대 통신 기업인 차이나모바일·차이나유니콤·차이나텔레콤과 통신 장비 업체 화웨이테크놀로지스 등은 트럼프 전 대통령 때 이미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투기 제조사인 중국항공공업그룹, 위구르족 감시용 카메라와 안면 인식 기술을 개발한 항저우하이크비전디지털테크놀로지도 포함됐다.
트럼프 전 행정부가 대중 보복 조치를 위한 무기로 썼던 무역법 301조(슈퍼 301조)에 근거한 중국산 수입품에 부과하던 고율 관세(최대 25%)도 유지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당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탈퇴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파리기후변화협약·세계보건기구(WHO)·유엔인권이사회 등 각종 국제 협정에 복귀하며 ‘미국이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집권하면 국제 문제에는 가급적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던 트럼프식 고립주의를 폐기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전인 2020년 3월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왜 다시 미국이 리더가 돼야 하는가’를 보면 바이든 대통령의 강경한 대중 정책은 예견된 일임을 알 수 있다. 기고문에서 그는 “국제 경제의 규칙이 미국에 반해 조작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면서 “무역의 규칙을 정하는 것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술·산업에 대해선 중국에 강경하게 나설 필요가 있다며 “미국이 청정 에너지, 퀀텀컴퓨팅, 인공지능(AI), 5세대 이동통신(5G), 고속철도 등에서 중국에 뒤처질 이유가 없다”며 “디지털 시대의 규칙이 중국과 러시아에 의해 쓰여지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노림수, 블루칼라 표심 잡기
IRA, 반도체육성법, 바이오 행정명령 등 바이든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에 대해 ‘트럼프보다 더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강경 카드를 꺼내는 이유는 2018년 무역 전쟁으로 촉발된 미·중 패권 전쟁이 기후 변화·보건·군사 안보는 물론 첨단 기술 분야 등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점차 공세적으로 변화하는 중국의 전략적 도전에 맞서 최첨단 기술과 역량 투자에 올인하고 있다. 중국을 고립시키고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재건하기 위해서다.
바이든 대통령은 9월 5일 위스콘신 주 밀워키를 방문해 “전 세계의 제조업이 미국으로 몰려오고 있다”며 “한국, 일본, 전 세계에서 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기업 대표가 내게 그들이 미국에 오려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설명했는지 아느냐”며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환경과 가장 우수한 노동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생산하라는 말은 더 이상 구호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 배경에는 오는 11월 8일 실시되는 중간 선거가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7400억 달러의 지출 계획을 담은 IRA부터 반도체·바이오까지 미국 내 생산을 강조하는 이유는 중간 선거에서 경제 치적을 내세워 성과를 내려는 전략이다.
줄곧 내리막길을 걷던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인플레이션감축법·반도체육성법 등 굵직굵직한 역점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반등하고 있다. 미국NBC방송이 9월 18일 공개한 여론 조사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45%로 한 달 전보다 3% 올랐다.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인 노동자층에 호소하기 위해 연일 제조업 부활과 일자리 창출 성과를 내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패권 앞에 동맹 팽개쳐…중국 닮아 가는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2월 출범 이후 반도체·전기차 배터리·희토류·의약품 등 4대 핵심 품목의 공급망을 재검토하는 행정 명령을 내렸다. 이 행정 명령은 미국이 핵심 부품·원료 공급을 다른 국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됐다. 자국 생산 장려와 함께 중국의 기술 부상을 막고 미국의 대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의도다.
지난해 6월 백악관이 발간한 ‘공급망 100일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4대 핵심 품목 공급망의 특정 단계에서 지나치게 중국 편중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에서 생산하라’는 말은 더 이상 구호가 아니라며 전기차·반도체 등을 미국에서 만들게 하는 첨단 제조업 육성을 강조하고 있다.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 기업들의 ‘중국 탈출’과 ‘미국 귀환’이 지속적인 추세로 자리 잡고 있다. 건설 데이터 업체 닷지 건설 네트워크 자료에 따르면 지난 1년간 미국의 신규 생산 시설 건설은 116% 급증해 같은 기간 미국 내 모든 건설 프로젝트 증가율인 10%를 웃돌았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시작된 탈중국 분위기가 중국 당국의 도시 봉쇄에 따른 공급망 혼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뚜렷해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리쇼어링 로비 단체인 리쇼어링이니셔티브 자료를 인용해 미국 기업이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올해 약 35만 개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관련 통계 집계가 시작된 2010년 이후 최대 규모다.
바이든 대통령은 출범 이후 동맹 우선주의와 인도태평양 기반의 다자 경제 질서를 통한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복원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고강도 자국 우선주의 정책으로 한국·일본·유럽 등 동맹국들의 이익 침해까지 불사하면서 한·미 동맹으로 쌓아 온 신뢰마저 흔들리고 있는 상태다. 미국 기업들조차 IRA가 무리수라고 비판하고 있다.
아이오닉5와 EV6 등 전기차를 전량 한국에서 생산해 IRA의 세액 공제 대상에서 제외된 현대차·기아는 역차별을 당했다. 올해 상반기 미국 시장점유율 2위(9.1%)를 기록한 현대차·기아가 IRA의 최대 희생양이 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자국 선거와 자국 우선주의만 앞세우면서 전기차·배터리 산업에서 차별적인 보조금 정책으로 자국 기업과 시장을 보호한 중국과 다를 게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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